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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화 〉21 - 처음은 언제나 아프기 마련 (21/243)



〈 21화 〉21 - 처음은 언제나 아프기 마련

동생의 방문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반복적인 일상은 뒤돌아봐도 기억에 남는 게 거의 없는 법이다.

당연하다. 똑같은 장면만 주구장창 튀어나오니, 기억 자체가 짧은 영상이나 사진 따위로 압축되기 마련이다.

이젠 저녁마다 날아오는 혜민의 문자에 꼬박꼬박 답장을 하는 것도 일상으로 정착해버렸다.

...동생의 이름을 가족관계증명서로 확인한다는 게, 나로써도 어처구니가 없더라.

그래도 그나마 선명한 기억이 있다면 그게 가장 중요한 기억이겠지.

그러니까, 내가 퀸을 찍은 것처럼 말이다.

57승 9패.
깔끔한 개선식이었다.


나이트폴에서 '퀸'은 여러모로 상징적인 랭크라고 할  있다.

우선 정해진 점수만 올리면 도달 가능한 최고의 랭크인 게 컸다.

'킹'의 경우는 전체 유저들 중 상위 300명이라는, 딱 보기에도 더럽게 어려워 보이는 조건을 달고 있으니까.

아예 인원제한이 있는 킹과는 별개로, 퀸 랭크를 달성하는 유저의 수에는 제한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많은 유저들이 퀸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유저들은 마의 구간이라 불리는 룩2에서 좌절하고 정체되기 마련이니.

킹이 리그에 소속된 프로들의 영역이라는 걸 감안하면, 퀸이야 말로 일반 유저가 달 수 있는 최고 랭크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내가 '지존 초고수' 따위의 방제로 방송을 시작할 수 있는 랭크라는 거지.


처음 시작하는 일이다 보니 준비해야  것도 많았다.

방송 세팅이란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더라.

전문 방송인들은 대부분 송출 컴퓨터와 게임용 컴퓨터를 나누어 사용하는 투컴 세팅을 한다나.

알아보다가 포기했다. 깊게 들어갈수록 세팅에 필요한 금액이 껑충껑충 뛰는 모습에 엄두가  나더라.

그래서 내가 준비한  방송용 프로그램과 마이크 정도였다.

마이크는 가성비라는 이름을 둘둘 달고 출시된 10만원 상당의 제품으로 골랐다.

그냥 3만원 짜리 헤드셋을 살까도 고민했는데, 과거 지지직거리는 마이크로 음성 채팅을 테러하던 친구 하나가 떠올라 생각을 바꿨다.

그렇다고 무슨 50만원이 넘어가는 고가의 제품을 쓸 수도 없지 않나. 어차피 내 방송의 주력은 화려한 컨트롤이  것이다. 목소리는 잡음 없이 들리기만 하면 되겠지.

방송 플랫폼을 고르는 건 의외로 쉬웠다.
 별다른 고민 없이 저스틴을 선택했다.

조금이나마 있을 내 인지도는 스벅의 방송에서 만들어진 거니까. 아무래도 스벅이 방송하고 있는 저스틴에만 눈이 가더라.


그리고... 대망의 첫 방송이다.

방송 제목을 어떻게 해야 할지.

Nord는 넣는게 좋겠다. 시청자가 찾을 수 있는 키워드가 될 것이다.

나머지는... 방송의 컨셉을 알려주는 문구로 채워야 할까.

마음 같아서는 그냥 'Nord 나이트폴' 같은, 직관적이고 단순한 제목으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인터넷 방송을 즐겨 보는 건 아니었지만 나도 어그로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잘 알았다.

방송 제목이라함은 커뮤니티의 글 제목 같은 것 아닌가. 이미 유명세를 타서 고정 팬이 있는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의 어그로는 끌어줘야 시청자를 불러들일  있겠지.

'좆1밥들 때려 죽이는 방송 ^0^'

너무 어그로인가. 자극적이기만 해선 문제의 소지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선 방송인으로써 내가 가진 개성을 어필하는 게 좋겠지. 이를 테면 여자라는 점이나...

'섹1시한 여성 스트리머 퀸 양학방송'

아니야. 인간성은 포기하지 말자.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영 좋은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지나치게 어그로를 끄는 제목이고, 어떤 건 아무런 색깔도 없이 무미건조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그만큼 시작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닐까.

난 그냥, 어그로를 줄이더라도 직관성있는 제목으로 시작하리라 마음 먹었다.

'Nord11 나이트폴 퀸'
그래. 담백한 게 오래가는 법이다.

방송... 송출 시작.


이거, 나가고 있는 건가?

미리 듀얼모니터 한 쪽으로 치워둔 내 방송의 송출화면은 나이트폴의 시작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시청자 0명.

그렇다. 방송은 아무나 킨다고 해서 순식간에 시청자 몇백 명이 밀려드는 그런 속 편한 시스템이 아니었다.

그럼, 처음 방송하는 사람은 아무도 보지 않는 방송을 켜놓고 혼잣말을 시작하는 셈인가.

내심 허탈함이 밀려든다.

유명세? 그건 스벅을 통해서라는 지극히 한정적인 지명도였다. 지금 나는 저스틴에서 처음 방송을  일반인에 불과한 거겠지.

허공에다가 아무 말이나 내뱉기에는 아직  방송경력이 부족한  싶었다. 너무 어색하더라. 하다 못해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줄 봇이라도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나는 일단 평소처럼 게임을 플레이하기로 마음 먹었다. 말을 하는  시청자가 들어온 이후에라도 늦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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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에는 '저수'라고 일컫는, 24시간 항시 접속 중인 플랫폼의 망령들이 있다.

저수가 무슨 뜻인가. 그건 저스틴 백수라는 뜻의 약어였다. 할 짓이 없어서 저스틴에서 방송하는 모든 스트리머들의 방송을 들락날락한다는 망령 중의 망령.

무엇을 숨기랴. '꺆뀨륚띠' 또한 그들  하나였다.

닉네임에서부터 진한 분탕의 냄새가 나는 그는 휴학 기간의 절반을 인터넷 방송 시청에 할애한 진짜배기 저수였다.

그런 꺆뀨륚띠의 취미는 소위 '하꼬방'이라 불리는 시청자가 적은 방송에 들러 분탕을 치는 일이다.

그와 함께 분탕질에 맛을 들인 동료 중 하나는 그렇게 시청자가 적은 방에서 물을 흐리는 게 재밌냐고 물어왔지만, 꺆뀨륚띠에겐 전혀 이상할  없는 일이었다.

시청자가 없는 만큼 소수의 시청자에게도 쉽게 휘둘렸으니까.


그의 채팅 하나 하나에 일일히 반응하는 스트리머를 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었다.

'저수지'라는 이름의, 비슷한 족속들을 모아 만든 베타코드 그룹 채팅방이 생긴 이후로는 더 손쉽게 변했다.

동료 두세 명만 모아도 시청자가 불과 몇십 명에 불과한 하꼬방의 분위기를 뒤바꾸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경험이 부족한 스트리머가 시시각각 변해가는 채팅창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이 얼마나 즐겁던가.

단언컨대, 인간이 인간의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만큼 짜릿한 일은 없는 것이다.


오늘도  쾌락을 즐기기 위해 사냥감을 물색하는 꺆뀨륚티의 눈에 포착된 사냥감이 있었으니.

'Nord11 나이트폴 퀸'이라는 방송 제목이 바로 그것이었다.

방송을 전전하며 분탕질에 열심히인 꺆뀨륚띠인 만큼 그도 나이트폴에 대해선  알았다.

잘 알기는 물론이거니와, 실제 플레이에도 능숙한 편이었다. 일반 유저들 사이에선 고수라 불릴 룩3까지 달성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벽에 부딪혀 게임을 접긴 했지만.

그런데 방제에 '퀸'이라니.

그도 퀸이라는 랭크가 얼마나 도달하기 힘든 구간인지는 잘 알았다.

그러나 저스틴에 나이트폴 방송을 하는 스트리머가 대체 몇 명인가.

수십에서 수백, 시청자가 한 자릿수에 불과한 하꼬 스트리머들 까지 포함하면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지경이다.

즉, 그저  랭크만으로는 방송으로 성공하리란 보장이 없었다는 뜻이다.

꺆뀨륚띠의 눈에 너무나 매력적인 먹잇감으로 보일만도 했다.

나이트폴에서는 상위 1%에 거뜬히 들만한 초고수 유저가, 저스틴 방송에서는 시청자가 한두 명에 불과한 하꼬 중의 하꼬라니.

이 얼마나 자극적인 사냥감이란 말인가.


꺆뀨륚띠는 망설이지 않고 방송에 들어갔다.

닉네임은... Nord11? 닉네임에서도 성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방송 경력도 하루 이틀에 불과한 초보자겠지.

이런 스트리머들은 시청자 한 명의 입장에도 호들갑을 떨기 마련이다.

[안녕하세요.]

시작은 답지 않게 정중한 태도로 나서는 게 포인트다.

아주 예의바른 일반 시청자 행세를 할수록, 분위기를 휘저을 때의 효과가 커지기 때문이다.

이 순간이 꺆뀨륚띠가 가장 즐기는 순간이기도 했다.

공허한 채팅창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스트리머가 처음 올라온 인사를 보고 격렬히 반응하는.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다.

이게 무슨 일인가. 송출되는 화면에서 스트리머는 묵묵히 적군의 목을 썰어넘기고 있을 뿐이었다.

아, 방금 또 한 명의 플레이어가 팔이 절단되어 쓰러졌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이런 일도 종종 발생하는 법이다. 나이트폴 같이 집중력을 크게 요구하는 게임의 경우, 스트리머가 채팅창을 보기는 힘들었으니까.

그래서 꺆뀨륚띠는  한 번 채팅을 쳤다.

[와 진짜 잘하시네요.]

초보 스트리머라면 절대 그냥 넘어갈  없는 칭찬의 한마디다.

스트리머는 그에 대한 화답으로, 이번엔 검방을 든 경갑 플레이어의 몸통을 아예 두동강을 


...이 새끼는 채팅창이라는    모르나?

라고, 꺆뀨륚띠가 생각하려는 찰나.

방송을 들어오고 처음으로 스트리머가 입을 열었다.

"...아. 감사합니다."

키보드를 만지는 손등을 타고 소름이 올라온다.

여성의 목소리였다.

이어폰을 끼고 있던 꺆뀨륚띠의 귓속으로 직접 속삭이는 듯한 조용한 목소리.

높은 미성의 목소리가 차분한 억양 탓에 가라앉아, 더 없이 편안하게 들렸다.

[와 목소리 너무 좋으시네요^^]

그가 이렇게 스윗한 시청자였던 적이 있을까.

분탕밖에 없던 꺆뀨륚띠의 머릿속이 백지 상태로 변하는  한 순간이었다.


미성의 스트리머는, 청각적 자극은 물론이요 시각적 자극까지 충족시킬 역량이 있었던 모양이다.

원래의 목적을 잊고 방송에 정착해버린 꺆뀨륚띠는 곧 말을 잃었다. 퀸 랭크에서 벌어지는 학살이라니. 이 얼마나 귀중한 광경인가.

그가 지켜보기에도 수준이 높은 게임이었다. 전투가 발생하면 일말의 빈틈도 없이 아군의 지원이 도착하며, 전투의 중심에는 늘 마법사와 궁수의 지원이 함께하는.

 포화의 한복판에서 광전사는 끝까지 몸을 굽히지 않았다.

사지에서 흘러넘치는 피는 이미 치사량에 이르렀다. 그러나 광전사의 기세는 멈출 줄을 몰랐다.

이내 목숨이 끊기는 그 순간까지. 마지막으로 휘두른 대검은 결국  몸뚱이에 검을 박아 넣은 기사의 숨통을 끊어내는데 성공한다.

"후우..."

집중한 탓인지 부족한 멘트조차, 이미 빠질대로 빠져버린 꺆뀨륚띠에게는 매력적인 요소로 보였다.

 봐라. 내쉬는 한숨조차 이렇게 사람을 자극하지않나.

[캐리 ㄷㄷㄷ]

게이머라면 '캐리'라는 두 글자에 환장하는 법.

신경을 긁는 능력이 출중한만큼 마음을 달리 먹으면 사람 하나 북돋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꺆뀨륚띠는 마치 분재에 물을 주는 정원사의 마음으로, 우연찮게 발견한 작은 스트리머에게 애정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려고 했다.

자신의 채팅만 조용히 올라오던 채팅창에, 의문의 무리들이 몰려들기 전까지는.

[진짜 노르드좌임?]
[목소리 들으니까 찐이네]
[눈나...나 기다리느라 죽을뻔했어...]
[미친 퀸ㅋㅋㅋㅋ]
[츠바이...광전사...대검패링...우리 센세가 맞습니다]
[어서 올려드려라]
[말좀 더해주세요ㅠ]

노르드가 뭔데  씹덕새끼들아.

꺆뀨륚띠의 마음 속에서 가라앉고 있던 분탕충의 자아가 다시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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