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22 - 초코칩을 아시나요
원래 혈을 뚫는 건 처음이 어렵다고들 하지 않나.
사실 이대로라면 시청자가 한 명도 들어오지 않은 채 첫 방송을 마무리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더라.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여느때처럼 게임에 몰입하기 시작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공백에 가까웠던 채팅창이 무서운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찐 노르드좌 맞음?]
[방송언제시작함]
[그거 밑에 보임]
[츠바이 휘두르는 폼만봐도 찐르드죠???]
[찐르드는 씹; 어감 ㅈ같네]
[선생님 왜 말을 안하십니까]
대개 비슷한 내용의 채팅들이었다.
스벅의 방송이 각인시킨 '노르드'라는 이름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정작 몰려드는 시청자를 바라보는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았다.
시청자들이 모여들었을 때, 뭔가 보여주지 않으면 기껏 모인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내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일종의 무대에 오른 기분이었다.
정해진 시간 내에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떤 퍼포먼스를 펼쳐야 하는. 시간 제한이 있는 커다란 무대.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게임밖에 없는데.
게임만 한다고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단순히 극한의 실력방송을 원한다면 내가 아니라 프로의 방송으로 향하는 게 자연스럽잖아.
뭔가, 뭔가 멘트를 쳐야하지 않을까?
"어... 여러분들은 초코칩 이야기를 아시나요?"
[?]
[목소리ㅗㅜㅑ 귀르가즘]
[눈나...나죽어...근데 뭐라는거야...]
[노드르센세 첫번째멘트 '초코칩이야기']
[이분 왜 사람 죽이면서 초코칩을 찾으시죠?]
[선생님...]
[응~평온한 목소리로 스벅 모가지 뜯을 때부터 알아봤어~]
[와ㅠㅠ초코칩이 너무불쌍해요ㅠㅠ]
[불쌍한건 지금 리스폰되자마자 또 뒤진 상대 거북이었구연]
반응은 뜨거웠다.
근데 왜 아무도 초코칩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거지.
엉뚱한 맥락에서 튀어나오는 '초코칩'에 반응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유도하는 게 내 목적이었는데.
역시 익명성에 가려진 불특정다수를 상대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나는 내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돌발 상황에 취약했다. 어쩌면, 돌발상황만이 가득한 인터넷 라이브 방송은 내게 무리인 게 아닐까.
내심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게임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꿋꿋하게 계획한 바를 이어나가는 게 좋겠다.
"옛날에 칙칙한 초코칩과 촉촉한 초코칩이 살았데요."
[?????]
[초코칩이 뭔데 씹덕아]
[선생님...제발 입을 다물어주십쇼...]
[ㅈㄹ 목소리 존나좋은데]
[목소리가 문제가 아닌데요.]
[이 와중에 연속킬ㅋㅋㅋㅋ]
[이거 녹화영상이고 보이스만 생방아님?]
[어떤 미친련이 나이트폴영상에 초코칩얘기를 더빙해]
아, 망루 그늘 쪽에 매복한 궁병이 있다.
채팅창을 훑어보느라 잠깐 위치를 놓쳤다. 위기감지 신호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으면 연계되는 공격에 죽었으리라.
나는 궁병의 사선을 방해하기 위한 무빙을 시작했다. 장애물이 부족한 지역이었으니 나와 대치 중인 검방 유저를 궁병 사이에 배치하는 구도가 최적일 것이다.
궁병의 손이 활시위에서 머뭇거릴 때, 이때가 중요하다.
나는 단숨에 검방 유저를 향해 몸을 들이받는다.
이전의 대치상황에서 무기로만 공격했던 게 좋은 심어두기로 작용했다. 패링을 노리던 검방은 기습적인 돌진에 대응하지 못하고 내 접근을 허용했다.
대치 중인 거리를 좁히면서 인파이팅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러면 적 궁병도 오발을 걱정해 쉽게 지원하지 못할 터.
아차. 방송 중에 멘트가 비면 안 되는데.
"그런데 어느 날은 칙칙한 초코칩이 촉촉한 초코칩한테 가서 물어봤어요."
[선생님 제발 게임에 집중좀]
[방금 화살어케피함?? 경보에 반응한건가]
[그걸 어케반응함 아까 궁병위치 봤겠지]
[어케했노시발련ㄴ아]
[와 머야 이거 궁병시야 막는거냐?]
[아니 근데 초코칩은 대체 뭐냐고 ㅅㅂ]
[이쯤되면 초코칩이 뭔가 존나 중요한게아닐까?]
[이게,,,요즘 인터넷방송이냐?,,,]
시간을 끄는 건 잠깐이다. 적 궁병이 포지션을 다시 잡기 전에, 대치 구도를 끝내고 추격에 나서는 게 최선이리라.
적극적으로 패링을 노리는 검방을 잡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심리전만 잘 유도하면 된다. 잘못된 타이밍에 헛손질을 하게끔 할 수만 있으면 손쉬운 상대다.
지금.
가드를 무너뜨리기 위한 강공격을 하는 척. 들어올린 대검을 자연스럽게 다시 내리고.
짧게 휘두른 횡공격을 예측해 상대방은 패링을 시도할 터.
또 한 번, 이번엔 방향을 비튼다. 궤도가 뒤바뀐 대검이 방패를 지나쳐 적의 다리로 향한다.
-크억!
검방의 두려움은 완벽한 공수의 밸런스에 있다. 지나치게 패링만 의식하는 상대는 오히려 무너뜨리기 쉬운 편이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공격해오다가 기습적으로 패링을 시도하는 유형의 플레이어가 훨씬 위협적이다.
다리에 유효타를 허용한 상대방의 몸이 무너졌다. 이때 방심하지 않고 한 타이밍 뒤로 물러서는게 주요하다.
여기선 동료를 구하기 위한 궁병의 화살이 날아올 타이밍이니.
읽기 힘든 시청자들과는 달리 익숙한 전장의 흐름은 내게 편안함을 선사했다.
예상한 대로, 화살 두발이 양 옆으로 스쳐 지나가고.
광전사의 대검은 희망을 상실한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상황은 대충 마무리가 됐다. 홀로 나를 상대할 수 없는 궁병은 아마 위치를 다시 잡기 위해 도망쳤을 것이다.
지금은... 궁병을 쫓으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넌 어떻게 그렇게 촉촉할 수가 있니? 칙칙한 초코칩은 촉촉한 초코칩의 촉촉한 피부가 부러웠거든요."
[칙칙한...촉촉한...칙촉한...촉칙한...]
[어?어?어?어?어?어?어?어?]
[눈나 목소리 너무 촉촉해요]
[촉촉한건 사지가 찢어진 검방유저의 눈물샘 아닐까요]
[와 님들 저꿀팁알아냄 소리끄고보면 씹고수 방송임]
[오...]
[소리끄면 센세 목소리를 못듣잖아]
[칙촉한 ㅇㅈㄹ하는데 들을 필요가 있을까?]
[응ㅋㅋ 니들 안그런척해도 이미 칙촉한 이야기에 흠뻑 젖어버린거 다 알아ㅋㅋㅋ]
[느개미]
그래도 이야기를 시작하길 잘했다. 재밌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오자 시청자들도 점점 몰입하는 게 느껴졌다.
내 방송 경력은 종잇장 두께에 불과하지만 눈치를 보니 뭔가 알 것도 같았다.
채팅창은 사실 내용보다는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닐까.
어차피 올라오는 채팅의 거진 절반은 다 영양가 없는 문자의 나열에 불과했으니, 방송이 흥하는 척도는 채팅창이 올라가는 속도에 달려 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이런 기준에서 생각하면 역시 초코칩 이야기는 성공적이었다.
"여기서 촉촉한 초코칩은 뭐라고 했을까요?"
주제를 정해두니 무슨 말을 해야할 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아직 랭크게임은 킹이 섞이지 않은 구간이라 긴장감이 덜했다. 이런 화면을 그냥 보는 것보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함께 시청하는 게 시청자들도 좋을 것이다.
봐라. 채팅창도 흥분에 차 빨라지고 있었다.
[ㄴㅁㅂ??????아무도 안궁금하니까 제발]
[제발 닥치고 게임만 해주세요 선생님]
[솔직히 나만 궁금함?]
[너만 궁금해 씨1발아]
음.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채팅의 내용에서 눈을 돌리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토록 빨라지는 걸 보니 초코칩 이야기가 제대로 먹혀든 것 같다.
촉촉한 초코칩의 한마디는 이 이야기의 핵심이니까.
-나랏말싸미듕귁 님이 1,000원 후원!
<선생님 제발 입을 다물어주십시오...>
기계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처음으로 받는 도네이션이다. 방송을 시작하고 한 시간은 지났나. 앉아서 게임을 하는데 돈을 받는다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저게 진짜 돈이라는 사실도 실감이 나지 않더라.
"네... 그럼 아까 놓친 궁병을 잡으러 가볼게요."
아무튼, 이런 방송에 돈까지 후원하는 사람의 요청이다. 쉽게 거절할 수는 없겠지.
이야기를 끝마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한 번 말문을 튼 이후에는 할 말이 없어서 머리를 쥐어짤 필요도 없었다. 게임 속 상황이나, 채팅창에 맞춰 이야기를 주고받듯이 말을 하면 된다.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건 아니었구나.
"보통 궁병은 높은 곳을 선호하니까 그쪽에 주의하면서 움직여야 돼요. 지금 미니맵을 보면 아군이 전선을 미는 라인이니까, 아마 성벽까지는 달려가도 안전할 겁니다."
나는 궁병을 쫓기 시작했다.
중갑을 입은 광전사가 순수한 기동력으로 궁병을 쫓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건 속도로 따라 잡아 적을 죽이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포지션을 바꿔 다음 매복장소를 물색하는 궁병의 심리를 읽겠다는 목적에 가까웠다.
이동하면서 흘끗 바라본 채팅창은 초코칩 이야기를 막은 도네이션에 대한 찬반 토론으로 뜨거웠다.
[역시 훈민정음좌 개소리 깔끔하게 짜르네 ㄷㄷ]
개소리라니. 얼마나 훌륭한 서사를 가진 이야기인데...
[아ㅅㅂ 존나궁금하네 그래서 촉촉이 머라했는데]
[아니뭔데 이야기하냐마냐 ㅈㄹ임?? 잘듣고있었는데]
조금이나마 안달난 시청자가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아까 검방유저를 잡은 지역은 고성 맵에서도 꽤나 외곽에 위치한 평야지역이다.
몇 개의 망루를 제외하면 건축물이랄 게 없는 지역이기도 했다.
어딜가나 탁 트인 시야를 확보하기 힘든 고성 맵에서는 유일하게 장애물이 없는 구간이라, 일대일 결투에 자신이 있는 유저들이 게임 초반부에 자주 모여들기도 했다.
거기서 궁병을 놓친 건 확실히 아쉬움이 남는다. 복잡한 고성의 내부로 들어가면 기동성에 투자한 궁병을 잡기는 쉬운 일이 아닐테니.
눈을 마주치고 추격에 들어서면 늦는다. 궁병이 자리 잡을 지점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준비를 마치기 전에 기습하는 게 최적이겠지.
나이트폴 '실력' 방송을 슬로건 삼는다면, 이 정도 팁은 보여주는 편이 좋을 것이다.
치열한 전투를 끝낸 직후다. 갑작스레 암살자가 된 것처럼 잠행에 나서는 내 모습에 채팅창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분 머함? 중갑이라 발소리다들림]
[센세가 만만하냐? 닥치고 보고있어라]
[눈나 초코칩이야기 듣다보니 만만해졌어]
확실히 재밌더라.
내 행동 하나하나에 흔들리는 채팅창이라니. 나는 제 마음대로 갈대를 휘두르는 바람이 된 것마냥 신이났다.
고성에 진입해, 사방을 훑는 내 시야로 희끄무레한 인기척이 잡히고.
광전사는 무거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래서 뭐라그랬냐고 ㅅㅂ]
채팅창의 격분이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