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3 - 첫 고비만 넘기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게임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상을 빗나가는 결과는 없었다.
스포를 당하면 영화가 재미없어진다던데, 게임은 왜 그렇지 않을까.
결과를 향해 이끌어가는 주체가 본인이기 때문이겠지.
일종의 전능감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갈수록 빨라지는 채팅창의 반응을 보는 게 즐거웠다.
도망가는 궁병이 다시 매복할 장소를 찾아낸 것.
말한 순서대로 전열을 박살내고 길을 뚫어버린 것.
마지막 발악을 준비하던 머리를 박살낸 것.
깔끔한 흐름이었다.
본래 퀸 랭크에서 머릿속의 설계대로 게임을 주도할 능력은 내게 없었다.
그러나, 혜진은 내가 볼 수 없던 것을 보고 느낄 수 없던 것을 느꼈던고로.
난 망상에 불과했던 설계를 현실적인 영역에서 구현할 수 있었다.
그걸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건... 그래.
그 짜릿함을 차마 부정할 수는 없겠더라. 승리가 너무나 가까웠다.
모니터 너머로 승리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승리의 여운과 함께, 화면에 표기된 시청자 수를 바라본 나는 조금 아연했다.
"...사람이 많네요."
[노르드! 노르드! 노르드! 노르드! 노르드! 노르드!]
[진짜 ㅈㄴ 잘한다]
[ㄹㅇ퀸매칭이네 실화냐??]
[저도 죽여주세요]
[인간 믹서기 노르드좌]
절로 눈쌀이 찌푸려진다. 한 면을 가득 채우는 도배 채팅이 어지간한 채팅들들 모두 밀어버리는 탓에 정신이 어지러웠다.
관리자를 따로 뽑아야 하나.
게임 중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내가 채팅창을 보고 있으니 이러는 건가 싶었다.
첫 방송에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릴 줄은 몰랐다.
1,600명.
나는 이 구체적인 숫자가 명확하게 인지되지 않았다. 이게 전부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내 방송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게.
어디 운동장을 가득 채운다느니 하는 비유도 눈 앞에 현실로 펼쳐진 다음에야 효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0명에서 시작한 방송이 아무런 맥락도 없이 이렇게 부풀어 오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마 커뮤니티에서 누군가가 홍보글을 올리지 않았을까.
이상하게도 현실감이 없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 숫자인만큼, 나에게는 그만큼의 부담감도 뿌듯함도 없더라.
왜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의문이 더 컸다.
-냥냥코로 님이 10,000원 후원!
<언니사랑해요방송키기만기다렸어요너무잘하세요저도언니대검에맞아죽고싶어요랭크올려서만나러갈게요제발기다려주세요>
[10련이 도네이션혼자쓰냐?]
[도네이션은 혼자 쓰는거 맞는데요]
[어우 내용 소름이돋네]
...만원?
"아. 감사합니다. 만원이나... 받은 돈은 잘 쓰겠습니다."
[??? 이집 리액션 창렬이네]
[그냥 목소리가 포상임. 돈좀 더쏴라 새끼들아]
[잘쓰겠다(유흥비)]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멍하니 지켜보다 보면, 내 정신도 그 급류에 휩쓸려 어딘가로 떠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냥 채팅창만 바라보며 수 시간을 떠드는 사람도 있다던데. 마음 깊은 곳에서 존경심이 솟아났다.
내게 그런 능력은 없는 것 같다.
빠르게, 다음 게임을 시작하자.
-검방커신 님이 1,000원 후원!
<선생님은 어떤 맵을 선호하시나요>
간간히 터지는 도네이션에 기분이 좋았다. 돈을 받아서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계속 할 말을 찾아야 하는 나에게 주제를 던져 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기계음이지만 사람하고 대화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이트폴의 근본은 그래도 불땅이지 않을까요."
질문과 함께, 마침 방금 잡힌 게임도 붉은 평원이었다.
퀸 랭크를 달성한 이후에는 아마 처음일 것이다.
조금은 마음이 들뜨더라.
내가 가장 선호하는 맵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붉은 평원이었다.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하늘.
하늘 빛을 그대로 품어, 붉게 물든 드넓은 평원.
전투를 방해하는 아무런 장애물도 없다. 공성전이나 정복전 맵에서 등장하는 많은 수의 NPC병사들도 없었다.
눈이 마주치면 바로 병장기를 맞대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전장.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겠지. 이건 광전사의 무대였으니까.
광전사는 거대한 대검을 허리춤에서 치켜올렸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하늘을 향해 쭉 뻗은 양손검은 아무런 미동도 없다. 검신은 붉은 햇살을 받아 흉흉하게 빛났다.
마주선 창병의 눈에는 그게 마치 피를 잔뜩 머금은 것으로 느껴졌다.
광전사의 곁에 누워있는 동료의 시체는 아직도 온기를 머금고 있으리라.
창병은 조용히 창을 바로 잡는다.
무자비하게 동료를 격살할 때와 달리, 이미 피를 맛본 광전사는 기이하리만큼 차분해보였다.
선공을 양보하는가.
그게 단순한 오만이라 느껴지지 않는 건, 광전사의 대검이 어떻게 동료를 베어넘겼는지를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괜한 심리전을 유도해서는 안 된다.
주어진 선공권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한다.
단 한 번의 호흡도 낭비하지 않고 급소에 창을 찔러 넣어야 할 터.
결정한 이상 망설일 수는 없었다.
쾅!
땅을 울리는 진각과 함께.
창병은 무서운 속도로 광전사를 향해 쇄도했다.
첫 수에는 오히려 무게를 덜어낸다.
하늘을 향해 사선으로 쭉 뻗은 대검은, 힘이 가득 담긴 창의 일격을 가볍게 흘려낼 것이다.
그러므로 창병은 의도적으로 강공격을 포기했다.
챙!
대검과 부딪힌 창끝이 부드럽게 튕겨져 나온다.
창병이 돌진해온 속도를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가벼운 소리다.
반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위로 솟은 창은, 대검이 움직이기도 전에 창병의 몸쪽으로 회수되고.
이어지는 연격은 무섭도록 빨랐다.
하나같이 급소를 목표로 파고든다. 일격이라도 허용한다면 판금 갑옷이 아닌 이상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어질 공격이다.
광전사는 그 모든 공격을 흘려냈다.
다시 한 번. 광전사의 목을 향해 다가오던 창이 대검의 검신에 부딪혀 왼쪽으로 크게 틀어진다.
우측 발을 땅에 딛고 몸을 크게 뒤틀어, 창을 다시 회수한 창병이 연이어 광전사의 좌측 어깨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그에 반응해 광전사는 몸을 뒤틀어 어깨갑주의 곡면으로 창을
창병이 풋내기였다면 방금의 일격으로 앞으로 쏠린 무게중심 때문에 광전사에게 공격을 허용했을 터.
그러나 창병은 창을 흘릴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금새 자세를 바로 잡았다.
창병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저 무거운 대검으로 창병의 연격을 따라잡을 수도 없을텐데, 저 지독한 광전사는 중갑의 곡면을 통해 치명적인 공격을 모조리 흘려내고 있었다.
이대로 호흡이 다 할 때까지 공격을 이어간다 한들, 집중력이 먼저 떨어지는 건 누구일까.
절망적인 생각이 창병의 머리를 스쳐가는 순간.
창병은 선택했다.
상대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까지 포착할 수 있는 지근거리였다. 창병은 의도적으로 공격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통하지 않은 연격에 지쳐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지는 척, 광전사에게 공격권을 내주는 모양새였다.
한참동안 수비로 일관하던 광전사는 이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았고.
진각을 밟으며 대검을 허리춤으로 잡아당긴다.
그게 창병의 노림수였다.
대검에 비해 공격이 빠른 창의 특성을 이용하여, 상대의 공격을 유도하고 카운터를 성공시키는 것.
육중한 츠바이핸더에 공격권을 양도하고 창병이 무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야말로 뼈를 내주고 뼈를 취하는 동귀어진의 수.
그러나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저 무자비한 광전사를 같이 데려갈 수 있다면, 전장의 유불리는 아군에게로 기울 것이다.
광전사의 움직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숨을 고르던 창병의 몸이 한껏 당겨진 활시위처럼 깊게 내려 앉았다.
뒷일을 고려하지 않은 최대 한도의 강공격이다.
커다란 대검을 들어올린 광전사에게, 빛살처럼 빠르게 창이 쇄도한다.
그 순간이었다. 이미 창을 내지르고 있던 창병의 본능이 시끄럽게 경종을 울려댔다.
광전사는 아직도 허리춤에서 사선으로 대검을 들어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공격의 전조였던 진각은, 미끼에 불과했나.
경악이 섞인 의문이 창병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러나 이미 쏘아진 화살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사선으로 세워진 대검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창과 자연스럽게 맞닿았다.
창병이 기대하던 살을 찢는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챙-하고 울리는, 철과 철이 맞닿는 소리가 경쾌하게 퍼져나가고.
창은 놀랄 정도로 쉽게 튕겨나갔다.
자세가 무너진 창병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노을을 반사해 붉게 빛나는 광전사의 커다란 대검이었다.
강한 상대는 써는 맛도 좋다나.
낚시터에서 대어라도 낚은 것처럼, 마우스를 쥔 내 손으로 짜릿한 손맛이 타고 올라왔다.
비명도 없이 쓰러진 창병의 시체를 눈 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썩, 괜찮은 전투였다.
아무런 장애물도, 아무런 방해꾼도 없이.
무기 하나에 의존해 죽음과 직면하는 순간이다.
나이트폴의 가장 근본적인 재미라고도 할 수 있겠지.
퀸 까지 랭크를 끌어올린 보람이 있었다.
나에게도 최후의 한 수는 도박이었다. 만약 내가 읽은 대로 창병이 카운터를 노렸던 게 아니라면, 숨을 고르고 대검의 일격을 흘려낸 창병이 다시금 공세로 전환할 수도 있던 장면이었다.
서로 숨을 가다듬은 그 순간은 뭐였을까.
창병이 공격해오리라는 확신이 들었는데.
채팅창은 무서운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뭐라고 한들, 나이트폴의 진가는 보는 것만으로 숨을 가쁘게 만드는 전투 장면에 있는 법이다.
내 생각이 맞다면 방금은 시청자들도 피가 끓었으리라.
이런 것도 일종의 카타르시스일까.
방금 내 몸을 타고 흐른 전율이 조금이라도 공유가 됐는지는 모르겠다. 방송을 보는 사람들은 스트리머에게 몰입을 하는 걸까.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이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전투의 여운이 아직 공간을 맴돌고 있을 때. 이게 아마 오늘 방송의 하이라이트겠지.
뭔가, 이 여운을 오래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방종을 하면 되지 않을까.
"방송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
[진짜 선생님 미쳐ㅛㅇ어요????]
[아니ㅜ게임도 안끝났자나요제발]
[이미친련 지금머라는거야]
[제발창병좌랑 한판만더]
[진짜 장난함?]
[이집장사 좆같이하네]
방송이 꺼지고 암전된 화면만큼 여운을 길게 남기는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원래 다음화를 궁금하게 만드는 드라마가 잘 된다고 그랬어.
이럴 때 망설이면 안 된다. 나는 바로 방송을 종료했다.
-오프라인
검게 변한 화면 옆으로, 채팅창이 무서운 속도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계속 보고 있으면 미련이 생길 것 같아서 그냥 인터넷 창까지 꺼버렸다.
마지막으로 본 시청자 수가 2,000명이 넘더라.
...내겐 너무나 과분한 관심이었다.
이미 일방적으로 기운 게임은 집중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중반에 있던 나와 창병의 전투가 중요 국면이었다.
한 번 주도권을 잡은 이상 궁병이 두 명인 아군 조합이 힘을 잃기는 쉽지 않았다.
리스폰되어 나와 다시 대면한 창병도, 이전과 같은 집중력은 보여주지 못하더라.
자연스럽게 내 머리는 첫방송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찼다.
자신의 플레이를 누군가가 봐준다는 건 생각보다도 훨씬 짜릿한 일이었다.
저런 환경에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혼자 게임을 즐기는 게 밋밋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래도,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사실이 정신적인 부담감을 주는 것 같기는 하더라.
방송 런타임이 세 시간 밖에 안 되는데도 뭔가 피곤했다.
긴장이 풀린 몸이 의자에서 축 처진다. 처음이란 건 언제나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는 법이다
개인방송이라는 걸 조금 만만하게 봤나.
그냥 게임만 하다 보면 알아서 멘트가 떠오를 줄 알았는데. 확실한 대상도 없이 혼자 말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재밌더라.
준비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음 방송은, 그래.
유익한 교육 방송으로 가는 게 어떨까. 잔잔한 느낌이 나랑 잘 맞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