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30 - 도전장을 받아라
며칠이 지났다.
동생들을 보내고 난 뒤 저스틴 커뮤니티에 바로 게시판 등록 신청을 했다. 승인까지는 의외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더라.
주말에 신청해 월요일 아침에 게시판이 열렸으니, 해결된 셈이다. 관리자가 일을 열심히하는 모양이다.
내가 관리자로 설정된 게시판이었건만. 첫글은 나의 몫이 아니었다.
첫글이고 나발이고...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내 것이 아니었으니. 나도 모르는 게시판 개설 타이밍을 귀신 같이 눈치채더라. 그러고는 활활 태우는 것이다. 장작이라도 던져준 기분이었다.
공지같은 걸 올릴 시간은 줘야되는 거 아닌가.
인정할 건 인정을 하고 넘어가자. 나는 어느샌가 기습적인 방종에 재미가 들렸다. 그 단순한 행동에 활활 불타오르는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는 건 일종의 쾌락이었다.
어찌보면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감정지배의 극한이었다. 나는 마우스 왼쪽 버튼 하나를 누름으로써 시청자 수백 명의 감정선을 건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 짜릿함이란.
물론 나도 아무런 이유 없이 시청자들의 격한 반응만을 기대하며 방송을 꺼버린 것은 아니었다. 잠잠해진 채팅창을 보며 소통 시간을 가지다가, 피자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그만...
사실 팔할 정도는 쾌락성 방종이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업보는 돌아오는 법.
아뿔사. 불 붙이는 재미에 맛을 들이다보니 새로 마련한 내 집이 활활 타오르는 캠프파이어가 되리라는 사실을 간과하고만 것이다.
누군가 커뮤니티의 악영향에 대해 묻는다면, 고개를 돌려 내 저컴 게시판을 보게 하라.
굳이 다른 설명이 없더라도 한 번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테니.
관리자 권한으로 게시글을 정리할까 하다가, 다 내가 자초한 일이라는 생각에 그만뒀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더 번질 게 뻔하기도 했다.
계속 보다 보니까 나름 정감도 가더라. 저러고 있는 걸 보면 나에게 관심은 있다는 뜻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도배글도 나쁘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게시판에 악질들만 모여드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불이 잠잠해질 때면, 내 방송과 나이트폴에 대해 논의하는 생산적인 글이 하나 둘씩 올라오는 것이다.
그럼 마치 아스팔트 바닥에서 솟아난 작은 꽃잎을 보는 것처럼 마음 속에서 뿌듯함이 피어오르고는 한다.
자연스럽게 내 마음은 방송으로 움직이고.
어느덧, 방송에 대한 부담감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이럴 때는 어설프게 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둘다 데려간다는 마인드로-"
말을 하는 도중 좌우 양 방향에서 자연스러운 합격이 피고든다.
이미 사지로 몰린 상황이다. 적을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된다. 여기선 흘리거나 막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조금이라도 큰 타격을 남기기 위해 공격을 시도해야 한다.
어떤 쇠붙이에 몸이 뚫릴 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 도끼보다야 칼날이 낫겠지.
난 우측에서 돌진하는 유사 바이킹을 피해 좌측 칼쟁이에게 몸을 날렸다. 사브르와 흡사한, 두껍지 않은 외날의 도를 사용하는 친구다.
이런 비교적 가벼운 무기를 사용하는 유저들은 대개 컨트롤에 자신이 있는 경우가 많다. 내 접근에도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스탭을 밟은 칼쟁이는 내 대검을 피하며 칼을 휘둘렀다.
섬뜩한 예리함에 칼의 궤적마다 피가 비산한다.
그러나 예상한대로다. 죽지만 않으면 발악할 힘은 남아있다. 피를 흘린 광전사는 더 난폭해진 움직임으로 대검을 들어올렸다.
광전사의 진가는 목숨을 포기한 그 찰나의 순간에 피어나는 법이다.
몸을 찢는 칼바람을 무시하고, 광전사의 대검이 그대로 적의 옆구리를 도려냈다.
콰직-
베어낸다기 보다는 부숴뜨린다는 표현이 적절하겠지. 데스 카운트다. 내장이 쏟아지는 부상을 입은 저 칼쟁이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리라.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미 도끼를 든 바이킹이 보내는 찌르는 듯한 살기가 가까웠다. 살아남기는 글렀다. 단 한 방, 대검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를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일 터.
아마 지금이겠지.
시야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다만 도끼가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을 들으며, 그게 내 몸의 좌측 상단으로 부터 내리찍히는 강렬한 일격임을 짐작한다.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즉사만 면한다면 된다.
오른손으로 대검을 고쳐 잡았다. 그대로 오른발을 디딤발 삼아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퍽- 하는, 갑옷과 뼈가 동시에 박살나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내 몸이 부숴지는 것조차 반동으로 삼아, 온 몸을 비틀어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얕았다.
왼팔이 망가진 상태에서 행한 공격이다. 상대를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건 역시 무리였나 보다.
회색으로 변한 내 시야에서, 대검에 스친 옆구리를 붙잡은 바이킹이 황급히 부상을 치유하는 게 보였다.
본대와 분리된 구역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시간이 끌린 것만으로도 팀적으로는 크나큰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승리로 이어질 큰 공헌일텐데. 이렇게 아쉬움이 남는 건 내가 방송인이 다 된 탓일까.
"아쉽네요. 처음 돌파 타이밍에 한 명 바로 잡았으면 둘다 죽일 수 있었던 건데."
[엠1창 뒤에 눈달렸냐???]
[캬 이맛에 센세 방송본다]
[도끼 쪽으로 돌파하는 건 별로였음?]
[저거 검객빌드인데 커버가 존내 빨라서 안됨]
[아씨발 방종하지마 그정도아니었어]
[쫄지마셈 이정도로는 방종안하지ㅋㅋ 안...하지?]
[팬티좀갈아입고올게요]
채팅창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개짓거리 말라는 채팅들을 무시하며 묵묵히 실력 방송 컨셉을 밀고 나간 게 먹혀들었던 것 같다.
이제 적어도 랭크 게임을 플레이할 때만큼은 채팅창이 게임과 관련된 내용으로 가득했다. 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일인가.
자고로 게임 방송은 게임에 관한 심도 깊은 대화로 가득해야 하는 법.
...물론 소통 시간을 갖는다하면 대다수의 시청자가 무뢰한들로 돌변하는 건 아직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몇명의 악질들을 밴하다 보니 성희롱은 줄어들더라.
나야 별 생각이 없었으나, 동생들이 내 방송을 본다는 걸 알아버린 뒤였다. 그런 걸 방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혜민이는 지금도 방송을 킬 때면 관리자 기능을 넘겨달라고 문자를 보내오는데.
제발 그냥 안 봐줬으면 좋겠건만.
최강전사이무식:Nord11. 나는 너랑 싸운다. 17시 붉은 평원으로 와라.
승기를 잡은 게임에서 전체 채팅이 올라온다. 저건 놀랍게도 아군의 채팅이었다.
그렇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마저 불러오는 저 기묘한 친구는 무려 현 퀸 상위티어, 시즌 최고랭크는 킹에 빛나는 랭커였다.
오늘만 세 번째 마주치는... 내 시청자이기도 했다.
[저새낀 뭔데 천상계에서 저격을하냐]
[거대장도리맨 ㄷㄷ 고랭크에서 대형둔기가 통하네]
[진짜 무식해보임... 닉값;]
[무식하다니 깜장 중갑 좆간지인데]
[어휘력보면 한국인아님]
[아까 적으로 만날때보니까 ㅈㄴ잘하더만 센세랑 일대일 비비는 사람 진짜 보기드문데]
[무식이가 ㅈ으로 보이냐?]
[좆이긴해]
저격이라.
나는 즐거웠다. 나도 프로선수 한 번 저격해보겠다고 이를 갈아가며 퀸 상위티어에 안착했던 전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슨 심정으로 그랬더라. 단순히 관심이 목적이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애초에 그 선수는 방송을 하지도 않았으니까.
한 쪽 모니터에 관전 사이트를 켜놓고, 새로고침을 눌러가며 게임 매칭 시간 맞추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글쎄, 내가 정말 잘한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었나.
아무튼 저격이라는 건 원래 유명인에게나 붙는 것이었다.
스벅은 참 좋은 예시 중 하나였다. 랭크도 어중간한 탓에 저격하기에 딱 알맞는 대상이기도 했다. 룩으로 복귀한 지금은 조금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내 경우는 조금 다르다. 나는 퀸이 아닌가.
이쯤부터는 저격이라는 행위도 의미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물론 사람이 몇 없으니 도달할 수만 있다면 원하는 대상과 매칭을 잡기는 오히려 쉬웠다. 그런데 퀸 유저들은 굳이 저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킹에 가까운 퀸 상위티어까지 도달하면, 만나는 놈들은 사실 거기서 거기다. 열 번 정도 매칭을 돌리면 익숙한 이름이 심심찮게 보일 정도였으니.
악의적인 트롤링이라도 했다간 박제당하는 것도 한 순간이다. 뭐 프로 선수도 아니고, 익명성을 보장 받는 일반 유저라면 그런 걸 시도할 수는 있겠다.
허나 일반인이 퀸 까지 달성했다면 그건 나이트폴에 인생을 갈아넣은 진성 겜창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니 같이 게임을 하는 고랭크 유저들 사이에서 낙인찍힐 짓을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저격이란 걸 당하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는데.
'최강전사이무식', 유쾌한 저격이었다.
세 판이나 연속으로 같이 게임에 잡혀서 저렇게 채팅으로 어필하면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채팅을 치는 내용도 참 한결같다. 17시 붉은 평원, 결투 신청처럼 보이는 저 무언가.
아군으로도 만나고 적으로도 만났다. 내가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이무식이라는 유저가 저격으로써 실천할 수 있는 비매너 플레이를 하지 않고 순수하게 전력으로 부딪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했다.
외형도 근육 덩어리라 써는 맛이 있어서 더 좋다.
저 일대일 도전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될만큼.
어디보자... 다섯 시가 얼마 안 남았다.
Nord11:무식씨 일대일 결전 하실까요?
즉흥적인 생각이었다.
나이트폴의 주류는 역시 프로 리그가 채택한 6 대 6 이었지만, 게임 특성상 일대일 매칭의 인기도 낮은 편이 아니었다.
아무런 변수 없이 눈 앞의 상대만을 박살내는 남자의 모드였으니. 인기가 없을 수가 있나.
나 또한 원래는 일대일, 결전을 자주 플레이하는 유저 중 하나였다. 방송을 한답시고 빠르게 랭크를 올리느라 최근엔 거의 손도 대지 않았지만.
저런 사람이라면 해볼만 할 거 같은데.
돌고돌아돌멩이:ㅅ1발 선생님 저는요 왜 저딴 무식한 새끼만
Download___7:진짜 어이엄네ㅋㅋ 나도 지금부터 저격들어간다
화살한방울:다 숨어있었네 이 새기들ㅋㅋㅋㅋ
뭐야.
게임 채팅을 치자마자 기다렸다는듯 올라오는 채팅이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았다. 분명 이때까지는 아무 채팅도 없이 묵묵하게 게임을 하던 유저들이었는데.
나를 안다고? 겜창들이라 본인들 랭크에서 방송하는 사람들을 죄다 외우고 다니는 건가.
내 방송 채팅창이나 게임 채팅을 보다 보면 주제도 모르고 '아. 내가 사실 좀 유명하구나'라는, 헛된 망상에 빠질 때가 있다. 실상은 우물 안 개구리가 같이 사는 개구리들 사이에서 이름을 좀 날리는 수준에 불과할텐데.
좁은 곳에 사는 갇혀 사는 인간은 이래서 무섭다. 누가 옆에서 주제를 알라고 계속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혜민이 정도면 그런 역할을 제법 잘 수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게임 채팅은 시끄러웠다. 아무 말 없이 게임을 하던 게 다 연기였나 싶었다. 덩달아 방송 채팅창도 신이 났는지, 웃음소리가 실제로 들릴 지경이다.
저런 것도 저격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이 정도 랭크에서는 저격이 없다는, 내 논리에 오류가 있나 의심이 생길 정도였다.
최강전사이무식:도전을 받아들인다.
아. 한 박자 늦은 타이밍에 대답이 돌아왔다. 지가 도전을 받는 입장인 것처럼 말하는 게 좀 우스웠다. 무슨 컨셉인지도 잘 모르겠는 유저다. 킹, 킹 랭크라. 나처럼 이번 시즌부터 시작한 건 아닐테니 본캐는 유명한 사람일 것 같은데.
아무튼 간만의 결전이다. 방송인으로써도, 게이머로써도 이건 꽤나 만족할만한 그림이지 않는가.
내 마음은 기대감으로 부풀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