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33 - 무섭다면 오히려 뛰어들어
불타는 금요일이라는 말이 있다.
대충 내일이 주말이니, 금요일에는 밤을 지새우며 놀고 먹어도 된다는 면죄부를 부여하는 말이다.
이걸 처음에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누구인지 몰라도 자기 최면에 꽤나 조예가 있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 불타는 금요일의 오후인 지금.
서른 둘... 아니지. 현재 스물 둘이라는 나이를 쳐먹은 나는 고등학교의 앞에 와있는 것이었다.
뭘 불태우라는 건지, 궁금해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몸을 혹사하면 혹사한만큼 시간은 빨리 지나가는 법이다.
어쩌면 수명을 갈아넣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금요일까지는 금방이었다. 체감 상 눈 한 번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약속이 코 앞이더라.
방송하고, 편집하고.
그 동안 내가 한 일은 저 두 가지 밖에 없었다.
그래도 오후 약속이라 참 다행이었다. 저번처럼 아침에 만나야 했다면 시차 적응을 위한 준비 기간이 필요했을 터.
내겐 해외여행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입고 나갈 옷을 고민하는 것은 나름대로 큰 문제였다.
예전처럼 집에서 동생들을 기다리는 게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동네에 마실을 나가는 것도 아니었다.
혜민과 주호가 다니는 학교는 대중교통을 기준으로 무려 한 시간이나 떨어진 어마어마한 거리였다. 이쯤되면 나로써도 추레한 몰골로 나가기는 힘들었다.
일찍 일어나 아침에 샤워를 마치고 머리까지 말렸다. 그 동안 내 생활패턴을 고려했을 때 이 정도면 엄청난 준비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그래도 화장은 차마 못하겠더라. 무슨 심각한 거부감이 들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엘튜브로 화장법을 검색해봤다가, 너무 어려워서 금방 포기해버렸다.
무슨 얼굴에 세 겹 네 겹씩 분을 칠하던데. 화장품의 종류를 구분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단언컨대 화장은 기술이었다. 나 같은 초보자는 절대 못하는.
그걸 내 얼굴에다 대고 연습까지 하기에는... 아직 힘들더라.
첫날 이후로 혜진의 옷을 제대로 뒤져본 것은 두 번째였다.
그때 꺼낸 편한 옷 몇 가지를 돌아가며 입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고심 끝에 달라붙는 청바지와 흰 티셔츠, 그 위에 입을 옷으로 루즈핏의 검정 가디건을 골랐다.
...무려 이십 분 간 고민한 코디임을 밝힌다.
이 중 여자 옷을 잘 아는 남자만 나에게 돌을 던져라.
퇴근 시간이 아닌 도로는 비교적 한적했다. 따뜻한 봄이다.
버스에서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선했다.
아직 춥다고 생각했건만.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봄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게 예뻤다.
그래도 시간은 가는구나라는, 정말 새삼스러운 상념과 함께.
빈 좌석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히다 보니 목적지까지는 금방이었다.
환승을 한 번만 하면 됐다는 게 다행이었다.
나는 삼십 분을 돌아가더라도 환승이 적은 길을 선호했다.
버스를 갈아타는 과정이란 얼마나 귀찮은지.
영인고를 바라보는 내 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등학교에 명문 타이틀이 어울릴지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다 룰렛으로 돌려서 가는 것 아닌가.
동생들이 다니는 학교는 그런 내 생각에 흠집을 낼 정도로 컸다. 아마 유명한 사립고일지도 몰랐다.
체육관으로 추정되는 건물은 신축된 것인지 학교인 주제에 세련돼 보였다.
...재단이 좀 큰가본데.
수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주변은 조용하다.
4시 30분. 워낙 신경을 쓰다 보니 약속 시간마저 넉넉히 나온 탓이다. 시간이 꽤나 많이 남아버렸다.
혜민이의 성격을 생각하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 쳐도 여유가 너무 많았다.
일단... 여동생님께 잘 보이기 위해 커피라도 하나 사다 줄까.
띠리리링-
드디어 기다리던 종소리가 들렸다. 수업을 마무리짓는 종소리였다. 혜민이 오늘 아침부터 기다렸던 소리이기도 했다.
4시 40분. 아직 혜진과의 약속 시간이 20분 남았다. 담임의 느려터진 종례를 감안하더라도 늦을 리는 없을 터.
그러나 혜민은 초조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동안 방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던 그녀의 언니다.
독립을 하고 극적으로 변화된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혜민이 보기에 바깥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건 여전했다.
혹시. 혹시라도 약속을 무시하고 나오지 않았다면? 혹은 인파가 많은 곳을 견디지 못하고 불안감에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다면?
언니에 한정되어 발동하는 그녀의 무한한 걱정은 끊이질 않는 것이다.
"혜민쓰! 왜 또 얼굴 찌푸리고 있어. 금욜인데 노래방이나 안 갈래?"
활달함이 섞여있는 목소리다.
혜민의 친구인 유정이었다. 차가운 인상 탓에 친해지기 어려운 혜민에게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접근해오던 친구였다.
일 년 전에는 주호와 같은 반으로, 학교에서는 드물게 주호와 혜민 둘 모두와 친분이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노래방이라니. 혜진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혜민에게는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제안이었다.
"아니. 선약이 있어서."
다소 매몰찬 혜민의 거절에도 유정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오, 주호랑 어디 가는 거야?"
"주호가 왜 나와?"
"아닝. 매일 주호랑 너랑 같이 집에 가는 거 보니까. 이번에도 둘이 약속이라도 있나 했지."
"...아니야. 언니가 마중나오기로 해서."
"언니?"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하는 유정을 보며 혜민은 아차 싶었다.
제 친구들에게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는데.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유정의 성격 상,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이상-
"와! 너네 언니 오신데? 한 번도 우리한테 얘기해준 적 없잖아. 나 얼굴 한 번만 보게 해줘~"
...이렇게, 반드시 달라붙어 올 터.
낯선 사람을 꺼려하는 혜진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차갑게 쳐내고 싶었다.
그러나, 유정도 혜민에게 단순한 친구가 아니었다.
잘 지내던 친구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채 홀로 2학년에 올라온 혜민이다.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 탓에 고립되어 가던 혜민이 반에 융화될 수 있던 건 유정의 노력 덕분이었다.
이번 한 번만 친구의 투정에 어울려줘야 하나.
내심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민이 단 번에 거절하지 않고 망설인 이유에는 혜진의 변한 모습에 대한 믿음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근 한 달간 변화한 제 언니라면, 동생의 친구 하나 정도야 너그럽게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종례를 위해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기 전까지,
옆에서 끈질기게 들러붙어 오는 유정을 보며 혜민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만 것이다.
영인 고등학교의 정문 앞이다.
종례를 마친 학생들이 하나 둘 교문 밖으로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루한 수업을 끝마쳤기 때문인지, 내일이 주말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학생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정문을 벗어나는 길이다. 무엇 때문인지 남학생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정문 앞 벤치에, 여성 한 명이 커피를 들고 앉아있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머리가 봄 바람에 흩날렸다. 그게 불편한지 여성은 계속 머리를 쓸어넘기며 얼굴을 찌푸렸다.
새하얀 피부에 햇빛이 반사되며 얼굴이 반짝였다. 손 까지 흘러 내려오는 가디건의 소맷자락을 끌어올리자 희고 가는 손목이 드러났다. 머리를 넘기면서 드러난 목덜미조차 창백했다.
왠지, 있어선 안 될 곳에 자리한 것 같은.
묘한 분위기를 가진 여성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간간히 눈을 마주친 학생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뚜렷한 경계심이 담겨 있는 눈길 때문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누구든 접근하는 사람을 꺼리는 것 같았다.
그 때문인지 앉아있는 벤치를 경계로 명백히 다른 공간이 만들어졌다. 여성에게 호기심을 표하는 학생들도 그 공간으로 접근하지는 못했다.
"어, 누나?"
그때였다.
정문을 빠져나오는 학생들의 무리 사이로 주호가 뛰쳐나왔다.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상보다 일찍 끝난 종례에 친구들과 웃으며 달려나온 길이다.
그런데 제 누이가 학교 정문 앞에 있다니.
분명 오늘 집에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학교까지 찾아올 줄은 전혀 몰랐다.
삽시간에 혜진의 앞에 도달한 주호의 뒤로 친구들이 따라 붙었다.
"뭐야? 주호 누나야?"
"와 겁나 예쁘시네."
"안녕하세요. 주호 절친 김정환입니다."
"저, 저 추잡한 새끼 목소리 까는거 봐라."
혜진의 표정이 굳어버린 것도 한순간이었다.
눈치가 빠른 주호는 누이의 표정변화를 바로 포착했다.
자신의 실수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는 바람에 친구들이 옆에 붙어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주호도 혜진이 낯선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꺼리는 지도 몰랐다. 그동안 방 안에서 두문불출했던 것도 다 그 때문이지 않은가.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친구들이 순식간에 주변에 모여든 이 상황을 얼마나 불쾌하게 여길 지는 안 보고도 뻔했다.
안 PC방에 가겠다고 대 여섯명의 반 친구들과 함께 나온 참이다. 차라리 그냥 모르는 척 하고 지나가는 쪽이 좋았을 텐데.
주호의 머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으로 복잡했다.
그러니 혜진이 보여준 대응은 주호로써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경직된 자세로 앉아있던 혜진이 들고 있던 커피를 벤치 위에 올려두고는 일어났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일어난 혜진이 주호의 눈에는 너무나 생소했다. 원래는 몸을 구부정하게 하고 걸어다니는 사람인데. 허리를 곧추 세우니 쭉 뻗은 다리 때문에 키가 훨씬 커보였다.
그러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 아닌가.
"안녕하세요. 주호 누나입니다."
몹시, 몹시 격식이 있는 인사였다.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쌌던 주호의 친구들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친구의 누나에게 저런 식의 인사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한 탓이다.
아직 인사를 건내지 않았던 주호의 친구들이 황급히 고개를 마주 숙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주호 친구 하균입니다."
"안녕하세요..."
그제서야 혜진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무표정한 얼굴이다. 치켜올라간 눈매 탓에 표정을 짓지 않아도 날카롭게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주호가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면 결코 말을 붙일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사를 한 이후에 혜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급격히 바뀐 분위기 때문인지 주호의 친구들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참지 못하고 주호가 말문을 열었다.
"학교에는 웬일이야? 집으로 바로 오는 거 아니었어?"
"아... 혜민이랑 만나서 가기로 했어."
주호가 말을 걸자 정색하고 있던 혜진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덩달아 가라앉았던 분위기도 가벼워졌다.
경직되어 있던 주호의 친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표정한 혜진은 너무도 싸늘한 인상이었다. 쉬지 않고 떠드는 고등학생들의 말문을 틀어막을 정도로.
예쁜 얼굴에 혹해서 달려들 듯 접근했던 정환도 주호와 혜진이 나누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에게도 혜진이 그어 놓은 보이지 않은 선이 보였다. 접근하면 물어버릴 것 같은, 그런 선.
혜민이 교문 밖으로 나온 건 그쯤이었다.
옆에는 결국 쳐내지 못한 유정을 동반한 채였다.
교문을 나서기도 전부터 혜진을 알아봤는지, 얼굴을 굳히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유정은 갑작스레 걸음이 빨라진 혜민에게 의문을 표하면서도 열심히 따라붙었다.
주호의 친구들 사이를 헤치며 혜민이 다가왔다.
"언니!"
주호와 혜진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설명을 하지 않아도 상황을 이해한 모양이다. 주호를 바라보는 혜민의 얼굴이 차갑다 못해 싸늘했다.
할 말이 없는지 시선을 돌리는 주호를 한창 째려보고 있을 때, 그녀의 볼에 차가운 감촉이 와닿았다.
"너 주려고 커피 사왔지. 헤헤."
...참, 답지 않게 실 없는 웃음이다-라고, 그곳에 있던 모두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