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34 - 자고로 집이라 함은
"주호는 같이 안 가?"
"응. 어차피 쟤도 집에 있는 게 편할 거야. 쇼핑 따라 다니는 거 싫어하니까."
그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인데.
물론 언제나 그렇듯 내 진정한 속내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꾹,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다.
상황 정리는 무척이나 빨랐다. 멍한 표정으로 커피를 받아든 혜민이 정신을 차린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친구들과 PC방에 들렸다 오겠다는 주호를 얼른 보내고, 혜민의 옆에 있던 유정이를 간략하게 소개 받고. 그걸로 끝이었다.
물리적인 의미로 끝이었다. 혜민이 내 손을 잡고는 그곳에서 벗어났으니까. 이것도 중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유정이는 도대체 뭐하는 친구니.
다소 일방적인 느낌이 있는 게 옥의 티였다.
혜민의 손에 끌려가면서 보았던 유정이의 얼굴만 기억에 남는다. 정말 서로의 이름만 소개하고는 땡이었다. 상황이 흘러가는 속도에 따라오질 못했는지, 정신이 이탈한 듯한 표정이었다.
친구를 이런 식으로 방치해도 되는 건지.
혜민이는 아직도 내 손을 잡고 앞장서고 있었다. 내가 건내준 커피는 딱 한 입 마셨나. 이렇게 걸어가는 데 쏟아지지 않는 게 용하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 이곳의 지리를 내가 알 턱이 없다. 어디로 가든 나는 따라갈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면 다행일 것이다.
학교 근처에서 버스라도 탔다가는 사람들에 치여서 몸을 가누기도 힘들 테니까. 혜민이 정한 목적지가 가까운 곳이면 좋겠는데.
"혜민아. 근데 우리 뭐 하러 가는 거야?"
"쇼핑. 언니 입던 옷만 입잖아. 내가 언니한테 어울리는 옷 봐뒀어."
그래, 역시 내 동생. 너 밖에 없다.
차라리 안심이 가는 답변이었다.
옷이라. 쇼핑하면 떠오르는 일 순위의 항목이지 않은가.
혜민이가 간혹 보여주는 예상 밖의 행동들을 떠올리면 이렇게 예상가능한 시나리오가 오히려 좋았다.
두 번의 방문에서 내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혜민이의 말대로 내가 입던 옷만 입는 스타일이기는 했다.
지나치게 나풀거려서 꺼림칙한 옷들을 제외하면, 원래 혜진이 입던 옷들 가운데 내가 선호하는 옷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착용감이 좋은 옷들은 다용도로 활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잠옷 겸 일상복 겸 외출복.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게 좋은 옷이었는데.
학교에서 대로로 나와 세 블럭은 걸어간 것 같다. 대충 이십 분 정도 걸었을까.
퇴근 시간을 목전에 둔 탓인지 지나다니는 차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아니면 이곳의 교통량이 원래 많을 지도 모른다.
스쳐 지나가듯 본 교통 표지판에는 생소한 지하철역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었다.
역 근처에는 언제나 상권이 형성되기 마련이지. 아마 혜진이 나를 이끌고 가는 곳도 이 근처이리라.
늘어난 교통량 만큼이나 사람들도 많아졌다. 빈번히 모르는 사람과 어깨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상하게도 평소에 느껴지는 불쾌함이나 거북함이 덜했다.
다른 건 혜민의 옆이라는 사실 밖에 없는데.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게 이리도 보탬이 되는 건가.
인파가 늘어난 이후로 혜민이는 움켜쥔 손에 힘을 더했다.
조금 따듯했다.
나름 번화가인지 높이 솟은 건물들 사이 사이에서 익숙한 로고를 찾을 수 있었다. 내게 익숙한 로고들도 간간히 보인다.
이걸 그리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
사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불쑥 머리를 파고 든다. 유일하게 바뀐 건 나 하나 뿐이라는 자조섞인 깨달음도.
앞서 나가던 혜민이 발을 멈췄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쭉 늘어선 건물들 중 하나였다.
Halo Star. 멋들어지게 흘려쓴 글씨체가 인상적이다.
이 건물의 1층에서도 꽤나 큰 면적을 사용하는 가게인 모양이다. 내가 모르는 대형 브랜드라도 되는 것 같았다.
유리벽 너머로 슬쩍 들여다 본 내부는 다양한 스타일의 옷으로 가득했다. 늘어선 옷가지 사이 사이로 사람들의 면면이 보인다.
...남자도 있는 걸 보고, 안심이 드는 건 왜일까.
들어가자마자 부담스럽게 달려드는 점원이 없다는 점에서 일단 먹고 들어간다.
원목 느낌이 나는 벽지로 도배된 실내에는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열된 옷만 없었다면 카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꽤나 훌륭한 인테리어였다.
입구 근처의 마네킹을 훑어보던 혜민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는 마네킹이야."
"...뭐?"
"내가 골라주는 옷. 입어줄 거지?"
"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옷을 골라? 여기 꽤 비싸보이는데."
"괜찮아. 아빠한테서 카드 받아놨으니까."
아니. 네가 괜찮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 해도, 나로써도 공짜로 옷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좋은 기회였다.
옷이라는 게 얼마나 비싼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돈을 뜯어 가는 것 같아 조금 양심이 아팠지만, 이렇게 선뜻 카드를 내줄 정도면 애들 옷 정도야 가볍게 생각할 확률이 높았으니까.
문제는, 혜민이 골라올 옷이 어떤 종류냐 하는 문제겠지.
...아니지. 공짜라는데 종류고 나발이고 무슨 상관인가. 이미 여자 한 달 차 베테랑인 내가 여성 의류 정도에 벌벌 떨 수는 없었다.
언니를 끔찍히도 생각하는 혜민인데 설마 그렇고 그런 옷을 골라올까도 싶었다.
그랬다. 정말로.
"이거 보자마자 언니 생각부터 했어. 너무 이쁘지?"
라고 말하는 혜민이 들고 있는 건 토끼 잠옷이었다.
여전히 배경음으로 흘러나오는 클래식 사운드와 핑크색 토끼 잠옷이 너무도 안 어울려서 헛웃음이 나오더라. 대체 이런 가게에 동물 잠옷이 왜 있는 거지.
옷걸이에 걸려있는 잠옷이 꽤나 긴 탓에 혜민은 팔을 머리춤까지 들어올리고 있는 상태였다.
저기 건너편에서, 점원들이 우리를 보면서 웃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이건 확실히 자의식 과잉 같은 게 아니라고.
아, 모르겠다. 어차피 잠옷인데 뭐.
"그래... 귀엽네."
"그치! 나도 이런 걸로 꼭 사고 싶었는데 주호가 자꾸 뭐라고 하더라구. 언니랑 커플 잠옷으로 맞추면 딱 좋을 것 같아."
내 감성은 주호랑 더 잘 맞는 것 같은데.
혜민이 정말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걸 보니...
뭐라 할 말이 없더라.
저렇게 언니를 아끼는 동생인데.
하루 정도야 마네킹이 되어줄 수도 있겠지.
난 그냥 예스맨이 되어버렸다.
쇼핑 한 번 하는데 뭐가 그렇게 할 게 많겠나. 난 쇼핑백을 한가득 들고 나온다는 게 드라마나 만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 가능한 일이었다. 해가 저물고, 신체가 허기를 호소할 때쯤 돼서야 혜민의 마네킹 노릇이 끝났다.
혜민이 들고 오는 옷 하나 하나에 리액션을 하는 것도 처음 뿐이었다. 계속 갈아입다 보니 나풀거리는 블라우스든, 치마든 별 생각 없이 입게 되었다.
개중에 실제로 구매한 품목은 몇 개 안 되는 건 또 통곡할만한 일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다행인가.
가게를 나올 때에는 정신적으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해가 지며 건물들이 형형색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태양을 대신하는 광원이다. 도시의 저녁은 낮보다도 밝았다.
내게 이런저런 옷을 입히는 게 즐거웠던 모양이다.
혜민이의 표정이 본 적 없을 정도로 밝았다. 이게 에너지 총량의 법칙인가. 내게서 빠져나간 에너지가 혜민에게로 모두 흘러간 것 같았다.
밥은 먹고 살아야지, 그래도.
"요 근처에서 뭐라도 먹고 가자."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냥 집에서 먹는 게 좋겠어. 아주머니가 언니 온다고 갈비찜하셨다는데?"
갈비찜.
갈비찜은 인정이지.
집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 그러나 걸어서 가기는 애매한 거리라 버스를 타야 하는 게 문제였다. 이제 완전히 퇴근시간이 되어버린 지라 앉아서 가는 건 불가능했다.
주행을 시작한 버스에서 손잡이에 의지하고 있자면 몸이 나풀나풀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쇼핑백이 손에 가득한 탓에 짧아야 할 거리가 늘어난 것 같았다. 도시의 온갖 소음으로 가득찬 버스 내부가 무슨 일인지 적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용히, 혜진의 집을 상상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은 고역이었으나 내리고 나서는 금방이었다. 나는 당연히 아파트 단지를 생각했는데, 내린 곳은 꽤나 큰 주택단지였다.
확실히 잘 사는구나.
피부에 와닿지 않는 부유함이다. 내가 완전히 독립한 셈 친다면 이젠 정말로 나와 멀어진 곳이기도 했다.
내가, 혜진이 살았던 곳. 그러나 나는 전혀 모르는.
묘한 감흥이 일었다.
철컥-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로 온기가 느껴졌다. 그제서야 내가 추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른 봄의 저녁이 이 약한 몸에는 쌀쌀했던 모양이다.
사람이 들어오자 자동으로 켜진 현관 등의 주황빛이 마치 온기를 머금은 것 같았다. 어색한 티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신발을 벗었다.
신발장을 열지는 못했다. 여러 칸이 있는 탓에 무엇을 열어야 할 지 모르겠더라. 그냥 내 신발을 한 켠에다가 가지런히 모아놨다.
똑같이 생긴 실내화들이 쭉 나열해 있는 모습에 마음이 놓이더라.
앞장서는 혜민을 따라 거실로 들어가니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아마, 갈비찜의 냄새. 긴장감에 조금 억눌려 있던 허기가 다시금 고개를 들어올렸다.
건물의 외관에서도 느꼈지만 역시 내부가 넓었다. 거실은 그중에서도 가장 컸다.
한 쪽 벽면에는 고급스러운 가죽 재질의 소파가 있고, 반대편에는 벽면을 크게 감싸는 대형 티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네모난 거실의 네 방향을 에워싸듯 서 있는 스탠딩 스피커가 눈에 들어왔다.
거실 너머에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가정집에 2층이라니. 집의 구조를 보면 동생들과 내 방은 아마 윗층에 있을 것 같았다.
그 규모에 놀라는 와중에도 여기서 영화를 보면 장난 아니겠다라는, 다소 실 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머, 혜진이 왔구나!"
부엌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웃으며 다가왔다. 집안 일을 도와주신다는 가정부 아주머니였다.
내가 온다고 갈비찜을 준비하셨다는 걸 보면, 아마 꽤 오랜 시간을 이 집에서 일하지 않았을까.
"아, 안녕하세요."
할 수 있는 말이 제한적이라는 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집에서 나는 항상 조심해야 했다. 혜민이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혜진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혜진이 한 평생을 살아왔을 이 집은, 그렇기 때문에 내겐 너무도 어려웠다.
혜진이 말주변이 없던 사람인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과거에도 아주머니와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주머니는 내 인사를 받고는 금방 저녁을 차려주겠다며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좋아. 한 고비는 넘긴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의 가장 큰 고비가 될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어?"
"응. 오늘 골프 약속있으시다고 늦게 오신댔어. 아마 저녁도 먹고 오실거야."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적어도 밥은 편한 마음으로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와 함께 밥을 먹는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내가 속으로 궁상을 떨고 있을 때였다. 혜민이 스마트폰을 슬쩍 보고는 왼손에 든 쇼핑백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일단 방에서 옷이라도 갈아입어 언니. 나도 갈아입고 나올게."
뭔데 나를 저렇게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걸까.
아, 토끼...
그걸 입고 갈비찜을 먹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