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5화 〉35 -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 (35/243)



〈 35화 〉35 -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다.


나는 눌러쓴 머리 부분에 손을 가져다 댔다. 두 개의 기다란 토끼 귀가 있었다. 아니, 당연히 진짜 귀는 아니고.


대체 잠옷 대가리에 이런   달아두는 건데.


아마 이건 잠옷의 탈을 쓴 코스프레 복장이거나 인형탈이 아닐까. 그래도 가장 거슬리는 머리 부분이 탈착 가능한 것은 호재였다.

지금은, 혜민이를 위해 그냥 내려가야 하겠지.


피부에 와닿는 부드러운 감촉은 마음에 들었다. 수면바지를 처음 입었을 때의 그 느낌이다.


조금만 더 더워지면 못 입겠는데 이거.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들어온 혜진의 방은 허전했다. 원래 무언가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는 듯한 공허함.

독립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가지고 나온 탓일까. 혜진이 나온 뒤에 크게 청소를 했다고 하니 버려진 것도 많겠지.


 사람이 일생을 살아온 방이란, 인생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을 것 같다는 환상이 있다. 그러나 그런 낭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추억이 묻히는 곳은 기억이다. 혜진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내가 어떻게 혜진의 추억을 이해할  있을까. 내겐  방에 묻어난 추억을 읽을만한 밑바탕이 없었다.

책장에는 책보다 비어있는 공간이 더 많았다. 저것도 모두 버려진 흔적들일까.

책장을 훑어보다가 혜진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공책들을 찾았다.

공책. 헛된 것을 알면서도 살며시 다가오는 기대감을 안고 스프링이 달린 공책을 펼친다. 줄 사이의 여백을 한참이나 남기는 작은 글씨다. 학교에서 했던 필기의 흔적이었다.

공책은 절반도 채워져 있지 않았다.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기억의 보고라도 된 것처럼, 책장 어딘가에서 일기장이 튀어나와 내게 혜진이라는 인간의 일생을 축약해 보여주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혜진의 방은 어디까지나 혜진의 기억이 머물던 장소였기에.


내게  방은 어디에나 있을 하나의 공간에 불과했다. 문을 닫을 때 경첩에서 흘러나오는 마찰음이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거 혜민이 짓이지?"


토끼 잠옷을 입은 내 표정이 볼 만 했나 보다. 거실로 내려가는 도중 마주친 주호가 내뱉은 말이었다.


'짓'이라니. 굉장히 직관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저건 또 무슨 얼굴인가. 신기한  구경하는 듯한 저 모습을 보니 꿀밤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었다.

주호는 딱 보기에도 편해 보이는 츄리닝 바지와 함께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나도 언제나 저런 옷을 선호했었는데. 왜 지금은 토끼 탈을 뒤집어 쓰고 있는지.

끼익-

"언니, 갈아입었어?"

계단과 가장 가까운 방에서 혜민이 문을 열고 나왔다.

...토끼. 연분홍색인 내 옷과는 달리 조금 보라색에 가까운 색깔이다. 커플룩이라는 말이 어울리게도, 색깔만 조금 다를  형태는 거의 흡사했다.

잠옷이라 크기가 꽤 넉넉하게 나왔다는 걸 감안하면 옷의 사이즈도 비슷할 것 같았다.

모자까지 뒤집어 쓰고 토끼 귀를 축 늘어뜨린 혜민이는, 그래. 솔직히 귀여웠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입은 걸 보니까 확실히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더라.


혜민이는 방문을 열고 나온 상태에서 그대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시선이 고정되어 움직이질 않는다.

통짜로 되어있는 탓에 가게에서 입어보지 못하고 구매한 옷이다. 당연히 착의한  보는 것도 처음이겠지.


어떠냐. 니가 그리도 원했던 핑크 토깽이가.

"...언니,  번 안아봐도 돼?"



뭐라는 겨.


얼이 빠져 바로 대답하지 못한 내게로 혜민이 접근해왔다.


실내화가 천으로 만든 재질이라 발 소리가 들리지 않아야 할 것이 분명한데, 왠지 환청처럼 두다다 하고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나는 곧장 뒷걸음질 쳤다. 좁은 복도에서 내 등은 금방 벽에 부딪혔다. 도망칠 곳이 없어.

"멈춰!"


멈춰는 무슨, 지랄.

나에게 달라 붙은 혜민이 몸을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커다란 인형이라도 껴안는 모양이다. 조금 발버둥치다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주호와 눈이 마주쳤다. 몸에서 힘이 빠지더라.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언니, 너무 귀엽다..."


토끼 대가리에 둘러쌓인 귀로 혜민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칭찬 정말 고맙네. 귀엽다니, 하하.


벗어나는  포기하고 몸에서 힘을 빼자 부드러운 잠옷 너머로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스킨십이 사람의 정신적 건강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더니, 솔직히 기분이 좋더라.


등을 쓸어오지만 않았으면 더 괜찮았을텐데.


체감상 꽤나 오랫동안 포옹을 유지하던 혜민은 그만하고 저녁이나 먹자는 주호의 타박을 듣고 나서야 뒤로 물러났다.

마주친 눈빛에 아쉬움이 남아있던 게 포인트였다. 이건 밥을 먹은 뒤에도 시달릴 게 뻔했다.

거실과 부엌 사이에 위치한 커다란 식탁에는 공을 들인 티가 잔뜩 묻어 나오는 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대충 보기에도 찬이 열 개가 넘었다. 외관에도 신경을 썼는지 색깔이 풍부했다. 초록색, 빨간색, 노란색, 검은색... 알록달록하다. 이게 얼마만에 보는 가정식인가.


주로 반찬 하나와 햇반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나다. 잘 차려진 식탁은 보기에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옆에서 감탄하는 주호를 보니 평소에도 이 정도의 식단이 나오는 건 아닌 모양이다. 내가 오랜만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신경을 쓰신 건지.

자극적인 감각이 몰려든 탓에 배가 울렸다. 기나긴 쇼핑이 끝났을 때부터 굶주림을 호소하더니. 더 이상은 참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수저를 들어올렸다.

...갈비찜이, 눈물나게 맛있더라.





"자고 갈거지? 언니 방에 침대 없으니까  방에서 같이 자자."
"응? 그냥 이불깔고 자면 될 거 같은데..."
"무슨 이불이야. 바닥에서 자다가 허리 망가져."


너랑 자는 편이 망가지는 게  많을  같아.


간만에 먹은 가정식은 너무나도 맛있었다.


끼니는 대충 해결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나였지만, 막상 누군가 이렇게 상을 차려준다면 업드려 절을 하면서 받아 먹을  있었다.

밥을  먹을 때까지 입도 열지 않고 식기만 움직였던 것 같다. 평소에는 조금만 먹어도 금방 가득차는 배가 오늘따라 유난히 오래 버티더라. 음식의 질에 따라 위장의 수용량에 변동이 오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우리가 먹는  지켜보던 아주머니는 금새 식탁을 정리하고는 퇴근하셨다. 내가 나가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물어오지 않은 건 아주머니의 배려였을까.


밥을 먹고 나자 혜민이가 일어나 커피를 내려왔다.

집에 가정용 커피머신이 있는 모양이다. 음식 냄새로 가득했던 거실이 은은한 커피향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적당한 포만감을 느끼며 내려 마시는 커피라니. 처음 집에 들어올 때의 긴장감은 어디로 갔나. 나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한껏 늘어지는 것이었다.


파묻히듯  몸을 기댄 내게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던 주호가 말을 걸었다.

"누나, 약속 지키는 거지?"

약속. 혜민이가 문자를 할 때마다 약속을 강조해온 터라 약속이라는 말에 노이로제가 생길 것 같았다.


주호가 말하는 건 나이트폴에 대한 약속이겠지. 그런 거라면 부담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내 전공이었으니까.


"지금 바로 봐줄까?"




주호의 방은 꽤나 컸다. 깔끔한 가구 배치 때문인지 혜진의  보다도 넓어 보였다.

평소에 주변을 어지럽히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았다. 한 쪽 벽을 차지하는 책장에 꽂힌 책들이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참고서와 문학전집. 인문학 관련 서적도 종종 보인다. 아랫 열에는 스포츠 만화로 추정되는 만화책이 있었다.

친구의 집에서 만화책을  때처럼, 나도 모르게 1권을 꺼내 읽고 싶어졌다. 특별한 구석이 없는 구조 탓일까.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방이다.


자신도 구경을 하겠다며 따라나선 혜민이 내 뒤에서 꼼지락대는 것이 느껴졌다. 뭐가 그리 좋은지 아까부터 잠옷의 토끼  부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뭐하는 건데.


우리보다 앞서 방에 들어온 주호는 자연스럽게 책상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눌렀다.


공간이 넓은 덕분에 주호의 뒤에서 구경할만한 자리는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오래 지켜볼려면 의자가 필요할 것 같은데.

"남는 의자 없어?"
"서재에 접이식 의자 있을거야. 내가 가져올게, 언니."

혜민이  가져오는 사이였다. 어느새 나이트폴을 실행한 주호가 자신의 아이디를 입력하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컴퓨터가 꽤나 좋아보였다.



"누나 스벅한테 가르쳐주는 거 영상 돌려봤거든. 그거 보면서 검방 카피해놨어."

검방. 예습까지 하다니 학습 의욕이 충만한 훌륭한 학생이었다.

주호는 바로 빌드창을 띄웠다. 조금 개량을 했는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핵심적인 요소는 내가 스벅에게 알려준 검방 빌드와 일치했다. 세부적인 특성이 조금 다른 걸 보면 아마  판 정도는 직접 플레이하면서 건드려봤겠지.


그렇다면 바로 게임 플레이를 확인해보는 게 좋겠다.

"빌드는 문제 없어. 일단 바로 랭크 돌려보자."
"나 비숍인거는 감안하고 봐줘."
"비숍이 말도 하네."
"...누나, 나이트폴하면 사람이 좀 바뀌는구나."


뭐라 중얼거리는 주호를 무시하고 매칭을 재촉했다.

봐주기로  이상 랭크 계급장을 한 단계 정도는 높여야 하는 법 아닌가. 주호의 플레이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는 이상, 시작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현재 랭크는... 비숍3. 커뮤니티에서는  없이 비웃음 당하는 저랭크였으나, 전체 유저로 치면 그래도 중상위권은 된다고 말할 수 있는 랭크였다.

고등학생 정도면 꽤나 적당한 수준이 아닌가.

"친구들 랭크가 높은 편이야?"
"아니. 다들 고만고만한데 이번 시즌에 룩2까지 찍은 놈이 하나 있거든. 저번에 계속 약올린다고 말했던 애가 걔야."

아, 역시. 그 나이 대 청소년이 게임 랭크에 목을 매는 이유가 뭐가 있을지는 안 보고도 뻔했다.

친구들 사이의 서열정리라,  유치한 경쟁 구도가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는 나도 잘 알았다. 그야 경험자였으니까.

유저가 많은 비숍 구간은 매칭도 매우 빨랐다. 혜민이 접이식 의자를 가져온 것와 거의 동시에, 게임도 로딩창으로 넘어갔다.

"무슨 팁 같은 거 없어?"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보며 주호가 물어왔다. 팁이라. 사실 비숍 수준에서 머무는 유저들은 대개 순수하게 게임을 즐기는 경우가 많았다.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이기면 기뻐하고, 지면 분해하되 자신의 플레이를 복기하면서 잘못된 부분을 고치려 하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그건 잘못된  아니다. 프로 선수도 아니고. 일반 유저가 굳이 자신의 게임 실력을 늘려야겠다는 목적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간 오히려 스트레스만 늘어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어떤 계기로 랭크 상승에 대한 갈망이 생겼다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플레이 하나 하나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올라가지 못한 이유를 찾기 위함이다.


그건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본인 플레이의 문제점을 간단히 발견할 안목이면 금방 찾아내고 보완했을 테니까.


주호가 나에게 플레이를 봐 달라고 요청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겠지.


실력이 몇 수는 위인 유저가 저랭크 유저의 플레이를 지켜보면 어떨까. 게임 한 판을 지켜보며 얼만큼이나 단점을 찾아낼지. 이건 나로써도 기대가 되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역할은 주호의 플레이를 보며 훈수와 지적질을 하는 것이었다. 될  있으면 까탈스럽고 악랄한 시선으로.

그래. 다시 말하자면 시청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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