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36 - 붙잡아두는 것들이 필요해
"지금 패링! 이걸 못하네."
"방금은 강공격을 섞었어야지. 무조건 연타만하니까 상대방한테 읽히잖아."
"주호 군은 그, 무빙이라는 게 없나?"
"왼쪽에 화살 날아온다. 이걸 놓치네. 아까 화면에 궁병보였는데."
"이 게임 흑백게임인가요?"
풉-
혜민은 이제 웃음을 참기도 힘들었다.
애써 게임에 집중하는 주호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구겨지는 광경이란.
자신감에 찬 상태로 게임을 플레이하던 평소의 쌍둥이 동생과는 너무 달랐다.
반면 마치 조롱하는 것처럼 주호의 플레이를 평가하는 제 언니의 얼굴에는 조금의 장난기도 보이지 않았다. 놀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것 같았다.
평소 입 밖으로 나오는 단어를 신중히 선택하던 혜진이었다. 혜민은 거침없이 말하는 언니의 모습이 새롭게 느껴졌다.
나이트폴이 관련되어 있어서 그런걸까.
지금 혜진의 모습은 스트리머 노르드를 연상시켰다.
"으악!"
쾅!
커다란 방패를 든 적을 공략하는 데 실패한 주호가 단말마를 내질렀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화살에 머리를 내줬기 때문이다.
또 다시 흑백화면이다. 키보드를 한 번 내리친 주호가 힘이 빠진 듯 고개를 숙였다. 이번 판만 몇 번째 죽은 건지. 이제는 흑백화면이 훨씬 눈에 익었다.
지금까지는 잘 참는 것 같았는데. 풀리지 않는 게임에 혜진의 훈수까지 더해지자 분을 참지 못한 모양이다.
"비숍3에 걸맞는 플레이였어, 주호야."
혜진이 쐐기를 박아 넣었다.
형편없지는 않았다.
내가 전문적인 관전꾼인 것도 아니고, 비숍 유저들의 평균적인 수준이 어떤가를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다.
명확한 기준으로 주호의 플레이를 가늠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평소에 보던 잣대라는 게 있는 법이다. 스벅 때도 그렇고, 지금 주호의 경우도 그랬다.
스벅의 경우를 생각하면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기준선은 룩 랭크의 초입 정도인 것 같은데. 그렇게 보면 주호의 플레이는 비숍에선 꽤나 괜찮은 수준이었다. 적어도 눈쌀이 찌푸려지는 플레이는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칭찬 한마디 건내지 않은 건...
왜, 몸에 좋은 약은 쓰다고들 하지 않는가.
다 주호 좋으라고 하는 소리야.
"랭크 감안하면 나쁘진 않은데."
"...진짜?"
"응."
축 쳐졌던 주호가 고개를 들었다. 원래 절벽에서 떨어뜨리고 끌어올리는 게 교육의 묘미였다. 떨어질 만큼 떨어졌으니 조금은 올려줘도 괜찮겠지.
"처음 구도 때문에 이기기 힘든 게임이었어. 원래 궁병있는 팀한테 첫 교전에서 밀려버리면 복구하기가 힘들거든. 상대 궁병이 잘하더라."
사실이었다. 양학을 하는 사람이라고 확신에 차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 구간에 머물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핑계를 찾아가며 패배를 합리화하다간 대체 언제 승리할 수 있겠는가.
"근데 그거랑 별개로 너무 많이 죽었어. 전체적인 운영은 좋았는데 기본적인 걸 너무 안 지켜.
집중할 때 눈 앞에 있는 상대한테만 신경쓰면 안 돼. 이번 판에 궁병한테 끊긴 것만 몇 번째야? 전투 중에는 힘들더라도 충돌 전에는 볼 수 있잖아. 훑어보는 식이라도 주변을 확인하고 움직여야지."
내 말을 곰곰히 듣던 주호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맞는데... 눈 앞에 상대가 있으면 시야가 좁아지던데."
"나이트폴 시작한지 얼마나 됐어?"
"응? 고1 때 시작했으니까... 일 년 조금 안 된 것 같아."
"그럴만하네. 그건 과하게 긴장해서 그런거야. 쟤가 먼저 공격해오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쫄아서 해야 될 거를 못하는 거지. 사실 어느 정도 거리만 유지하면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있다가도 충분히 받아칠 수 있는 건데."
실상 나이트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PVP게임에 적용되는 소리기도 했다. 긴장된 탓에 나타나는 일종의 터널시야다.
게임에 익숙치 않으면, 사람은 눈 앞에 존재하는 상대에게만 정신이 팔리기 마련이다. 경직된 신체는 주도적인 플레이를 망설이게 만들고.
수동적이며 시야가 좁은 플레이어라니. 단순한 먹잇감이 아닌가.
물론 이건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문제이긴 했다.
드물게 처음부터 긴장 따위는 하지도 않고 쉽게 게임에 적응하는 경우도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게임에 시간을 갈아 넣어도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일 년.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학생 신분인 주호를 생각할 때 플레이 타임이 그렇게 길지도 않았겠지. 주호가 후자의 경우는 아니면 좋겠는데.
그건 그렇고 이런 뉴비도 비숍은 찍는구나.
내 안에서 비숍의 가치가 한 단계 더 떨어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누나 말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긴장이 바로 풀리지는 않잖아."
그렇지. 가장 좋은 방법은 의식한 상태로 게임에 판수를 박아 넣어 자연스럽게 몸이 적응하게 만드는 건데. 이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라 문제였다.
단기간에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이라...
아. 좋은 방법이 있었다.
"너 내가 스벅이랑 하는 거 봤어?"
"그거 여러 번 돌려봤지. 검방 운영법까지 설명해줬잖아."
"아니 그거 말고. 첫 번째로 만났을 때."
주호의 얼굴이 굳었다.
원래 이론만으로 체득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럼 압축된 실전으로 몸에 때려박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 그건 아닌 거 같아 누나."
"왜? 스벅도 대련해서 빨리 늘었잖아."
"대련...? 그게 대련이야? 그냥 일방적으로 죽기만 하던데-"
"싸우면서 배우면 그게 대련이지 뭐야."
말로 하는 피드백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백날 리플레이를 돌려가며 복기 해봐도, 실전에 들어가면 똑같은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그렇게 될 바에 한 번이라도 더 실전을 경험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몇 시간만 있으면 두려움 따위는 느끼지 않게 만들어줄 수 있는데.
"내 방에서 할래?"
옆에서 지켜보던 혜민의 말이었다.
내 방송을 보고 나이트폴을 설치해놨다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나이트폴을 해보겠다는 말이 그냥 빈 말이 아니었구나.
괜히 심각한 표정을 짓는 주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심술이 난다. 다 너 좋으라고 하는 일인데.
"방 파놓고 기다려. 금방 들어올게."
주호를 뒤로하고 혜민이와 방을 나왔다.
복도가 밝은 탓에 2층 끄트머리의 창문이 더 어둡게 느껴졌다.
어느새 완연한 밤이었다.
너무 부드러운 탓에 어색했던 잠옷의 감촉이 이제는 자연스러웠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피부에 스치는 게 기분이 좋았다.입고 있으니 점점 거부감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잠옷이라는 걸 따로 사 입은 적은 없었는데. 왜 입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도 같았다.
혜민의 방은 계단과 마주하는 위치에 있다. 접이식 의자를 들고 혜민의 뒤를 따라갔다.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생각보다 가벼웠다.
혜민이의 컴퓨터도 나이트폴이 돌아갈 만큼 좋을까. 설치를 해놨다고 하니 한 판 정도는 플레이했을 지도 모른다. 잘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그때였다. 계단에서 누군가가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짧은 순간, 상황 판단을 마친 몸이 경직됐다. 초조함에 의자를 잡은 손에서 식은땀이 새어나오는 듯 했다.
올라올 사람이 누군지는 뻔했으니까.
"어머니. 오셨어요?"
내 앞에 있던 혜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눈꼬리가 올라간, 날카로운 느낌이 드는 눈매가 인상적이다.
복장은 완전한 정장차림이었다. 분명 혜민에게서 골프를 치느라 늦으시는 거라고 들었는데. 단순히 여가 목적의 골프는 아닌 것 같았다.
어깨춤에 살짝 닿는 머리카락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주름살이 낀 얼굴에서, 혜진과 혜민의 얼굴이 조금씩 묻어나왔다.
...낯선, 어머니였다.
혜민이의 인사를 듣고 고개를 들어올린 어머니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극적인 표정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동생들로부터 내가 방문한다는 사실을 들어서일까. 눈이 살짝 움찔한 게 전부였다. 그것 외에는 얼굴에서 감정을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혜민이의 무표정한 얼굴이 차가워보이는 건 어머니의 유전인 것 같았다. 웃음기가 없는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혜민의 인사에 돌아오는 대답이 없기 때문인지.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머리를 굴리고 굴리다 겨우 튀어나온 한마디였다.
바로 어머니의 눈이 커졌다. 내 인사에 대한 반응이었다.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얼굴이 혜진의 인사 한마디에 흔들리다니.
이 모녀관계에 대해 도통 감을 잡기 힘들었다.
"...그래. 잠옷이 귀엽구나."
잠옷. 아.
"귀엽죠? 오늘 언니랑 가서 산 거에요."
어느샌가 내 뒤로 돌아온 혜민이 마치 자랑을 하듯 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졸지에 어머니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
시선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정 없이 흔들리는 내 눈동자가 들킬까 두려워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내 머리 위로, 토끼 잠옷의 머리가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차라리 토끼가 되고 싶었다.
어머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주변을 둘러싼 침묵에 숨이 막혔다.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고개를 들어올리기가 힘들었다.
"방은 지낼만하니?"
"...네. 편해요."
그게
어떻게 지내고있는지, 돈 걱정은 없는지, 왜 연락은 한 번도 안하는지... 내가 그동안 고민했던 그 어떤 질문도 없었다.
어머니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로써는 다행이었는데.
혜진에게는-.
손에서 따스한 감촉이 느껴졌다. 혜민의 손이었다.
"언니. 들어가자."
별다른 말이 없었음에도, 나를 배려해온다고 느낀 것은 왜일까. 나는 말없이 혜민이 이끄는 대로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복잡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주호에게 화풀이를 했던 것 같다. 나는 게임 속에서 방패를 들어올린 주호의 캐릭터를 죽이고 또 죽였다. 방금 있었던 만남이 머리에서 계속 맴도는 탓에 게임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왜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는 걸까. 장녀의 출가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걸까. 원래 혜진을 쳐다볼 때 저런 차가운 시선을 보냈을까. 혜진과 어머니의 관계가 대체 어땠길래.
그런 와중에도, 주호의 방패는 계속 박살나고 있었으니.
주호에게는 사과를 해야할 것 같았다.
한창 죽다가,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달려온 주호가 울분을 토해냈다. 긴장이 커녕 트라우마가 되게 생겼다고. 온전한 내 잘못이었다. 나도 모르게 어물쩍하게 넘겨버렸다.
눈치가 좋은 건지 주호는 별 말 없이 방에서 물러났다.
밤은 더 깊어져 가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잠들기가 힘들어 혜민이에게 나이트폴을 가르쳐주겠다는 핑계를 대며 시간을 보냈다.
계정을 새로 만들었다는 혜민이는 당연하게도 조작이 서툴렀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모니터를 지켜보다 몇 마디 설명을 보탰다.
그렇게 해도 결국 시간은 흘러가더라.
혜민의 곁에 누운채로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건 불행임과 동시에 축복이었다.
내가 어머니와 마주한 순간 어머니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보호받은 게 아니었을까.
내가 혜진의 삶에 대해서 아는 건 극히 짧은 단락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혜진의 삶을 통째로 책임져야만 했다.
정체성이 덧씌워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진다. 미래의 내가 온전한 나로써 살아간다고 해도, 혜진의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그 과거의 무게는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하는 문제였다.
혜민과 주호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완전한 타인이 된 것처럼 가족과의 인연을 끊을 수가 없었다. 관계를 지운다는 것은 존재의 부표를 없앤다는 뜻과도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가끔, 관계의 무게를 실감하고 날 때면.
나는 모든 걸 벗어던지고 그저 고립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낯선 관계가 너무나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