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40 - 방심하지 마라
파피루스는 고개를 들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회였다. 그에게는 아직도 저번 대회의 기억이 눈에 훤했다. 본선에 올라가 8강 까지 쉬웠던 게임이 없었다. 그야말로 치열한, 명승부의 향연.
그걸로 대체 몇 명의 시청자가 방송으로 유입됐을지.
스트리머인 그에게는 천금같은 기회였다.
그걸 붙잡은 건 자신의 능력이었고.
지금,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 대회가 지난 번보다 어려울 거라는 사실쯤은 그로써도 알고 있었다. 대회 전부터 킹 랭크의 누가 나온다느니, 프로 지망생인 누가 나온다느니 하는 무성한 소문이 그의 게시판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나이트폴 실력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진 그였지만 저런 괴물들을 상대로 승리를 점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당연했다.
애초에 자신은 킹이라는 벽을 온전히 오르지도 못했으니까. 시즌 내내 킹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나이트폴의 모든 유저가 알고 있을 사실이다. 일반인과 격이 다른, 프로리그의 벽.
그러나,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다.
대회 전 며칠 간은 휴방까지 하며 빌드를 가다듬었다. 누구를 만날지는 몰랐다. 유연한 빌드에 변수를 섞고자, 얼마나 머리를 쥐어짰던가.
마침내 다가온 예선전이다. 여기선 저번 대회에 함께 참가한 동료 스트리머의 말마따나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제발, 첫 상대로 괴물들이 잡히지 않기를-하고.
파피루스는 경기 전 공개된 상대방의 빌드를 떠올렸다.
저번 대회 예선전의 룰과 똑같았다. 경기 직전, 각 선수들은 상대방이 제출한 빌드를 제공받는다. 선수들은 상대방의 빌드를 보며, 기본 빌드에서 최대 세 개까지의 특성을 교체할 수 있다.
여기서부턴 심리전의 영역이다. 어떤 특성을 바꿔야 유리함을 점할 수 있을지. 적이 바꿀 특성을 예측해서 자신의 빌드를 수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 빌드를 유연하게 짜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다. 빌드 상성에서 우위를 가져간다고 실력 차이마저 역전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나, 승부의 변수란 건 비할 바 없이 올라갔으니까.
그는 다시금 양손으로 도끼창을 강하게 붙잡았다.
결전 대회 답지 않게 공격적인 광전사 빌드였다.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생존 관련 특성을 전부 도외시한, 공격 일변도의 극단적인 빌드.
너무나 개성이 강한 탓에 파피루스는 빌드를 본 순간 바로 그게 어떤 유저인지 파악했다.
Nord11. 저스틴에 나타난 초신성 스트리머.
츠바이핸더와 광전사 기반 빌드를 사용하는, 퀸 랭크의 여성 플레이어였다.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다. 최근 저스틴을 보는 나이트폴 유저들 사이에서 가장 뜨꺼운 화제가 되었던 사람이니까.
그도 영상 클립을 통해 몇 번인가 접한 적이 있었다. 주로 스벅과 함께한 영상이었다. 비숍인 스벅을 상대한다는 걸 감안해도 꽤나 훌륭한 플레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래봤자 퀸 랭크의 여성 유저에 불과했다.
여성 유저. 여성 유저라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였다.
성적인 편견을 제쳐두고서, 나이트폴 여성 유저는 절대적으로 수가 부족했다. 성비를 따지면 얼마나 나올까.
8 대 2, 아니. 9 대 1?
여성 유저의 수가 현저히 부족한 만큼, 당연히 실력있는 유저도 매우 적었다. 애초에 퀸만 달성해도 커뮤니티에서 이름을 날리는 수준이다.
그런데 대회에 여성 유저가 나온다니.
전혀 유래가 없던 일은 아니었다. 지난 대회만 하더라도 우나밍이라는 룩 랭크의 여성 유저가 참가했다.
그 우나밍은 예선 2차전에서 탈락했다. 보통 유저라면 전혀 화제가 될 리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나밍에게 패배했다는 이유로 1차전의 패배자가 얼마나 조롱을 받았는지.
대회에서 여성 유저를 상대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이기는 게 당연하고, 지면 그야말로 개망신이 되어버리는.
그는 광활한 평야 너머로 흐릿하게 일렁이는 광전사를 흘끗 쳐다봤다.
몇 년째 퀸 상위 티어를 유지한 파피루스다. 최근에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킹을 유지했던 적도 종종 있었다.
유명세를 얻었다지만 상대는 기껏해야 퀸을 이제 막 달성한 플레이어였다. 상위 랭크로 올라올수록 그 미세한 차이가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내던가.
방심만 하지 않으면 승부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절대, 절대 패배해서 박제당할 일은 만들지 않으리라.
부우웅-
결투 시작을 알리는 웅장한 나팔소리가 저 멀리 언덕에서 들려오고.
두 전사는 다리를 움직였다.
도끼창과 츠바이핸더.
장병기 간의 싸움이다. 충돌 직전 파피루스는 이 전투의 행방이 거리 조절에 달려 있다고 확신했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되 너무 멀어져서도 안 된다. 대쉬를 할 수 있는 여유 거리가 생긴다면, 공격적인 성향의 광전사는 아마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도끼창의 범위 안으로 파고들 것이다.
핵심은 그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는 데에 있었다. 자신의 도끼창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사거리에서 상대방을 붙잡아두는 것. 더 접근하거나 더 멀어지지 않게 공격을 이어나가는 게 중요했다.
그렇다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첫 충돌이다. 여기서 대검과 무기를 맞대기라도 했다간 단 번에 주도권을 내어 줄 가능성이 높았다.
먼저 공격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했다. 침착하게 적의 돌진을 끊어내는 선택이 주요할 터.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구도다. 지평선 저 너머에 위치했던 광전사가 어느새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졌다.
어깨갑주와 하반신을 감싼 갑옷의 일부를 덜어내, 무게를 줄인 중갑 세팅이다. 일대일 전투에서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인가.
육중한 크기의 대검은 어깨 위에 걸치듯 올라가 검신이 후방을 향해 있는 상태였다. 외견 상 특별한 변수는 보이지 않았다.
파피루스는 도끼창을 품 안으로 잡아당겼다.
섣부르게 빈틈을 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광전사의 대검은 후방을 향하고 있다. 공격을 하기 위해선, 검을 휘두르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달려나가는 기세와 함께 창을 찔러 넣으면 광전사의 선택지는 좁혀질 터.
피하거나, 물러서거나.
그 순간 전투가 끝날 때까지 거리가 좁혀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방패도 없고, 판금으로 몸을 감싼 것도 아니다. 단기 결전이 예견된 무기들 간의 싸움이다. 파피루스는 검신을 뒤로 향한 광전사의 자세를 본 순간부터, 전투의 구도가 어떻게 흘러갈지 시뮬레이션를 마쳤다.
수백 번, 수천 번의 경험에서 유도된 결과였다. 그는 벌써부터 승기가 자신 쪽에 있다고 확신했다.
아직 서로의 간격이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광전사가 대검을 붙잡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와서 자세를 바꿀 생각인가. 이미 충돌까지는 몇 걸음 남지 않은 상황이다. 자세를 바꾸는 순간 자신의 창이 광전사의 몸을 꿰뚫을 터.
구도를 뒤늦게 파악했을 것이다. 전투에서 상대보다 늦은 판단은 목숨으로 직결되는 법.
상대의 실수를 놓칠 수는 없었다. 파피루스가 속도를 올리기 위해 땅을 거세게 박찼다.
그 순간이었다.
광전사가 대검을 던졌다.
'뭣?'
이런 건 시나리오에 없었는데.
그 육중한 쇳덩이를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을 리가 없다. 돌진을 멈추고 황급히 멈춰선 파피루스가 도끼창을 들어올려 대검을 간신히 쳐냈다.
쇳덩어리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어느새 눈 앞까지 도달한 광전사가 가시가 박힌 건틀릿을 맹렬한 기세로 뻗어왔다.
아. 끝났구나.
허망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광전사의 거친 주먹을 얼굴로 받아내며 파피루스는 패배를 직감했다.
그의 예상대로, 확실히 간결한 싸움이었다.
예선전은 3판 2선의 짧은 다전제로 진행됐다.
단언컨대 다전제의 핵심은 전략적인 한 수다. 대회라는 건 게임의 장르를 불문하고 결국 멘탈 싸움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니.
멘탈을 무너뜨리는 한 방. 얼마나 많은 프로들이 다전제의 첫 세트를 내주고 연이은 패배에 허망함을 표했는가.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내가 무슨 프로로 이름을 날린 전문가인 건 아니었다. 나도 나이트폴의 많고 많은 고인물 중 하나에 불과했지.
몇 시즌 동안 퀸을 유지할 정도면 어지간한 노림수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의외성을 유도할 거면 스스로도 꽤나 큰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선택을 해야된다는 뜻이다.
무기를 집어던진 것은 꽤나 리스크가 높은 선택이었던 셈이다.
글쎄, 무기를 던진 상대가 주먹으로 달려드는 건 퀸이라도 쉽게 해보지 못할 경험이었을 거다.
잔뜩 위축된 상대를 잡아먹는 건 쉬운 일이었다.
이어지는 2세트. 도끼창을 양손에 쥔 상대방은 한껏 몸을 움츠렸다. 똑같은 수를 두 번이나 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날아오는 대검의 잔상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을 터.
공세를 양보한 도끼창이라니.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또 있나.
예선전의 룰이 마음에 들었다. 전투 직전에 상대방의 빌드를 공개하는 룰이라니. 심지어 전투 장면도 방송으로 송출되지 않는 상황이다. 일회용에 불과한 전략적인 수를 맘대로 써먹을 수 있는 환경이라는 뜻이다.
솔직하게, 나는 매우 신났다.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전투 시나리오는 언제나 짜릿함을 가져오는 법이거든.
대회라는 사실이 가져오는 긴장감이 없었다. 긴장감은 육체적인 반응이 아닌걸까. 아니면 혜진 또한 이런 일에 긴장감을 느끼지 않는 걸까. 대회 예선전임에도 불안감이 전혀 없었다.
태진일 때도 그랬다. 대회를 앞두고 긴장감에 목소리를 떨던 길드의 막내를 얼마나 달랬던가. 나는 아무런 긴장도 느끼지 못하는 탓에 속으로는 얼떨떨했던 기억이 있다. 이게 뭐라고 긴장하는 거야, 라는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만 한 일이지만.
베타코드 메세지 알람이 울렸다. 대회 예선을 진행하는 채널이었다. 이걸로 첫 번째 매치일 뿐이다. 본선 까지는, 꽤나 많은 경기가 남았다. 아직 마음을 놓기는 이르겠지.
나는 다음 게임을 위해 자세를 바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