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42 - 아는 만큼 보인다
확실히, 쉽지 않은 대회더라.
전반적으로 참가자들의 수준이 높았다. 단순히 랭크가 높은 것만이 아니다.
결전 대회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일대일에 확고한 자신이 있는 유저들이 모여든 모양이다. 빌드를 보는 순간 얼마나 이를 갈고 나왔는지, 고개를 젓게 하는 상대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데굴데굴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유저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철저하게 실리를 따진 대방패 빌드.
아마 패자조 따위의 룰이 있었다면 당장 기권하고 다음 기회를 노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미동도 없는 거북이의 등딱지를 후려치는 취미 따위는 없었으니까.
이런저런 변수로 틈을 만들어낼 수 있는 팀전과는 또 일대일 전투에서 방어 일변도로 밀고 나가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는지.
...내가 치른 예선전에서 가장 긴 전투였다. 그걸 전투라고 해도 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직접적인 타격은 없고 방패를 둔 심리전만 계속되는 구도였다. 승패가 나지 않는 가위바위보 싸움을 몇 분 동안이나 하고 있었는지.
진저리가 낫다. 본선에서도 대방패를 만나면 그냥 기권이나 하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로.
아무튼, 여차저차 예선전을 뚫어낸 것이다. 제일 까다로운 상대가 마지막 순서였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 게임이 끝나고 집중력도 다 떨어졌으니까.
방송에서 공개한 예선전의 하이라이트를 보면 내가 대진운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한 달 경력의 뉴비인지라 참가자들에 대해 아는 게 없었지만, 해설진의 코멘트나 시청자 반응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가는 법이다.
저 선수가 프로 리그 2군에 속해있는 선수라느니, 매시즌 킹 랭크를 달성하는 이름난 유저라느니...
2군 선수면 그냥 프로가 아닌가. 난 프로를 지망하는 아마추어가 나올 거라 예상했지 진짜 프로가 참가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괜히 대회의 무게가 늘어난 느낌인데.
저런 탈 일반인과 만나지 않은 걸 보면 꽤나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쉽다고 느낀 상대방은 없었지만, 벽을 느낀 상대도 없었으니까.
본선 진출에 성공한 것으로 내 일차적인 목표는 이미 달성된 셈이다.
적어도 방송에서 실력파 방송인이라고 뻗댈 항목이 하나 추가된 것이다. 난 나름대로 뿌듯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내 등장이 시청자들에게 서프라이즈가 됐을까. 수만 명의 시청자가 내 플레이에 반응하는 모습이란 분명 짜릿함을 불러 일으키는 장면이었다.
프로 선수들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 듯한, 순간의 전율. 반대로 무참히 패배했을 때의 타격이 얼마나 클 지도 대충은 상상이 된다.
...그건 안 봐도 되겠지. 어차피 본선은 실시간 반응을 볼 수도 없으니까.
내 생각보다 예선전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이 많았다.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예선 하이라이트가 꽤나 반응이 좋았던 모양이다.
하기야, 내가 보고 있을 때도 계속해서 시청자가 늘어나고 있었으니. 리그 시즌이 아니니 대회에 목마른 사람들이 결전 대회로 모여든 것 같았다. 시청자들의 관심이 높았다.
참가자가 많은 탓인지, 늦은 밤까지 계속된 방송은 본선 진출자 명단과 32강 대진표를 추첨하는 것으로 끝났다.
사실 이걸 보기 위해 계속 보고 있던 거였는데. 중간에 깜빡 졸았던 것 같다. 이 시간이 되면 언제나 수면 부족이 나를 괴롭힌다. 빨리 잠들지 않으면 본선에도 무리가 갈 텐데.
본선은 바로 내일부터 진행된다. 제출한 빌드를 수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상대가 누군지 알아두는 건 당연히 필요한 일이었다. 미리 전투 구도를 만들어보는 건 결전에서 매우 중요했으니까.
내 닉네임은 대진표의 좌측 하단에 박혀 있었다. 첫날 경기는 확정인 것 같다.
상대는, '칼고'인가. 아마 방송을 하는 사람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디서 들어봤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졸았을 때 나왔나? 하이라이트에서 본 기억이 없었다. 어쩌면 오늘 밤도 편히 잠들기는 그른 모양이다.
그보다 먼저, 내 게시판에 공지를 남겨야 하지 않을까.
본선이 진행되는 중엔 방송을 키기 힘들 것 같았다. 이번엔 잠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대회라는 명분이 있었으나, 또 말 없이 며칠 동안 방송을 안 켰다간 게시판에서 어떤 꼴이 발생할지. 안 보고도 뻔했다.
휴방 기간은... 내가 대회에서 탈락하는 순간까지. 기간을 적다가 조금 망설이게 되더라. 탈락할 때까지라니. 이렇게 적어놓고 본선이 시작한 첫 날에 패배하면 얼마나 창피한가.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대로 올리기로 했다. 그 정도 조롱은 감당할만하겠지. 본선 진출에 성공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면죄부는 있을 터였다. 32강에서 탈락한들 심한 놀림거리가 되지는 않을 거다.
미리 걱정거리를 쌓아두지 말고 그냥 올리자.
<안녕하세요. 노르드입니다. 휴방공지입니다.>
제가 저스틴 결전 대회 본선 진출에 성공해서요. 성공 기념으로 휴방을 하려고 합니다.
더 높이 올라가기는 힘들 것 같은데, 아무튼 본선에서 탈락하기 전에는 대회 준비에 힘써야할 것 같습니다.
제 피셔맨 방송을 기다려주시는 여러분들께 죄송한 마음입니다. 빨리 복귀해서 다시 열심히 낚시에 전념할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대회 응원은 안 해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doyuib0608:이거 찐임???
-서윗각설:관리자마크ㅋㅋ
-아이도:이왜진;;
냥냥코로:언니대회하이라이트잘봤어요ㅠㅠ너무잘하세요언니우승하실거에요우승하고방송꼭켜주세요제가후원많이해드릴게요사랑해요
노르드발닦개:제발 방송에서 미리좀 말해주세요. 선생님 본선진출 소식을 예선 하이라이트에서 안다는 게 말이됩니까??
-나랑달:안될건없지ㅋㅋ
-화살한방울:전날까지 낚시하던 양반이 갑자기 하이라이트 튀어나오니까 어이가업음...
smatafuc:아니 낚시에 전념하지 마시라구요;
-angler11:원래 낚시전문 스트리머입니다^^
꺆뀨륚띠:느긋하게 오셔도 되니까, 이렇게 공지글만 제때 남겨주세요...
감나라배나라:낚시만 하다가 대회를 나가는 스트리머가 있다!?
-akrmsptba6:휴방기간이 나이트폴 연습한 기간인듯??
-감나라배나라:그때 겜전적 거의 없었는데
-nasdqr060:본캐로 한거아니냐? 헉 그때 전적 뒤져보면 방장 본캐찾을수있는거아님?
-서윗각설:접수완료
한량23:응 ㅋㅋ 어차피 본선 상대 칼고야~ 거품 싹 다 꺼지고 바로 방송키겠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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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예선전일 뿐인데요, 뭐. 본선 경기는 내일 바로 시작해요. 제 상대는 노르드님이 됐네요."
[유명한 사람인가요?]
[칼고님은 결승까지 가실듯]
[츠바이던진 사람이네ㅋㅋ 그거보고 빵터졌는데]
[저분 잘하시나]
[방송하시는분아님?]
공식 방송이 종료됨과 동시에 후원이 쏟아졌다.
미리 신청만한다면 개인 방송으로 대회를 중계할 수 있다는 건 큰 메리트였다. 예선전은 그게 더 두드러졌다. 녹화된 자신의 모습을 자기 시청자와 함께 볼 수 있는 건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게임적으로나, 방송적으로나.
본선부터는 참가자들의 생방송 스트리밍은 금지되어 있었으니, 드문 기회이기도 했다.
대회 중이라는 이유로 방송에 송출되는 캠을 꺼둔 칼고였다. 그는 채팅창에서 시선을 돌려 자신의 게시판에 올라온 대진표를 바라봤다.
Nord11.
자신의 본선 첫 상대였다. 예선전 하이라이트 영상에서 주인공이 되었던 참가자이기도 했다.
보기 드문 실력파 여성 유저에, 나이트폴을 플레이하는 스타일마저 유니크한. 이대로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면 이번 대회에서 가장 주목받을만한 참가자.
내심 기꺼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저런 사람을 꺾으면, 그 관심도 자신에게로 향할 테니까.
각종 이벤트 대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며 좋은 성적을 남기던 칼고였다. 그의 저컴 게시판은 여러 시청자가 남긴 대회에 대한 코멘트로 가득했다. 그중에는 본선 첫 상대로 결정된 노르드에 대한 다양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고는 추천 수가 높은 게시글 하나를 선택해 클릭했다.
플레이분석>, 이라.
대진표가 발표되자 마자 작성한 걸까.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도 본문의 내용이 상당히 길었다.
군데 군데 짧은 영상 클립이 포함되어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칼고는 곧바로 첫 번째 영상을 재생했다.
노르드의 개인 방송 화면이다. 두 손으로 예선전에서 봤던 거대한 츠바이핸더를 쥐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성벽을 보면 랭크 게임의 고성 맵인 듯 했다.
광전사는 양손에 외날의 도를 거머쥔 상대방과 대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망설임 없이, 육중한 대검을 든 광전사가 적을 향해 뛰어든다.
그에 맞서는 상대는 날랜 몸놀림으로 대검을 피해냈다. 저돌적인 상대와 정면에서 마주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장비 덕분에 훨씬 움직임이 용이했다. 연이은 공격을 모두 피해내고는, 광전사의 빈틈을 찾아 달려든다.
연계가 강점인 상대에게 접근을 허용했다. 그 위기의 순간에도 광전사는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내리친 대검을 회수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내딛은 발로 진각을 밟고는,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는 상대방의 품으로 마주 돌진했다.
관전자의 시점이 아니라 개인 화면이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눈 앞에서 번뜩이는 날카로운 칼날과 사방으로 비산하는 피에 질려 눈을 찌푸리고 말겠지.
하지만 정작 칼을 향해 뛰어든 광전사는 무섭도록 침착했다. 칼고의 눈은 무식하게 돌진한 광전사가 급소를 노려 오는 적의 공격을 흘려내는 것을 포착했다.
자신의 피가 쏟아지는 데도 흔들리지 않는다. 최소한의 피해로 거리를 확보했을 뿐이었다.
광전사라더니. 미쳤다고 말하기에는 무섭도록 냉정한 플레이였다.
피를 흘린 광전사의 움직임이 한층 빨라졌다. 아마 특성의 영향일 것이다. 상대의 속도를 따라잡은 광전사의 대검이 적에게 도달하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단 일격. 쌍수를 든 플레이어의 본다면 어이가 없는 결착이었다.
칼고의 눈이 자신의 채팅창으로 향했다.
[와 상남자시네 ㄷㄷ]
[근데 좀 무식함ㅋㅋ 모아니면도인듯]
[칼고님이었으면 돌진했을때 잡았을것같아요]
[와 잘한다]
[상대 저걸 못죽이냐;; 대놓고 정면에서 오는데]
나였다면, 이라.
칼고는 특별한 멘트 없이 본문으로 넘어갔다.
매우 공격적인 성향에, 저돌적인 플레이 스타일. 노르드가 대회에 제출한 빌드에 대한 분석도 함께였다. 이론적으로는 꽤나 그럴듯한 내용들이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을 주로 사용하니, 그에 주의하라는 당부의 말들.
그가 느끼기에는 다 헛소리에 불과했다.
칼고는 글을 넘기고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역시 노르드의 개인 화면이었다.
오늘은, 그에게도 꽤나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플레이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