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3화 〉43 - 광전사 (43/243)



〈 43화 〉43 - 광전사

"네, 다음 경기는 본선 4차전. 칼고 선수와 노르드 선수의 경기입니다. 예선전을 빛낸 선수들이기도 하네요. 칼고 선수의 이름은 익숙하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번 대회 뿐만 아니라 다양한 나이트폴 대회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드디어 대회의 본선이다. 이미 몇 차례의 경기를 마친 후였다. 다행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부족한 일은 나타나지 않았다.

본선은 5전 3선승제의 다전제로 이루어졌다. 4차전이 시작할 때까지  하나의 경기에서도 일방적인 게임이 나오지 않았다.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는 결전의 특성 때문인지, 세트가 길어진다고 지루함을 호소하는 시청자도 없었다. 치열한 접전이 오히려 흥분을 유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지금 등장한  선수에 의해 대회의 분위기는 더욱더 달아올랐다.

[노르드!노르드!노르드!노르드!]
[노선생 낚시터로 돌아와]
[칼고 파이팅!]
[칼고오빠 사랑해요~~~~]
[꼬추새끼들이 오빠 ㅇㅈㄹ]
[이거 엄대엄 아니냐??]
[정배는 칼고임]

인지도가 높은 두 명이었다. 칼고는 다양한 대회를 참가한 실력파 스트리머로써 유명세를 얻은 플레이어였다. 넓은 무기풀과 화려한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팬이 많은 편이기도 했다.

그 상대인 노르드 또한, 방송 경력은 매우 짧았으나 예선전에서의 임팩트 있는 모습으로 대회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인상을 남겼다.

대진이 공개되었을 때부터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은 매치였다.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탓에 제한을 걸어두었음에도 채팅이 올라가는 속도가 무섭게 빨랐다.

"칼고 선수의 빌드입니다. 이 선수가 유명세를 얻는 데에는 올웨폰 플레이어라는 게 아주 컸죠. 퀸 랭크 구간에서 모든 무기로 일정한 성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거든요. 쌍검을 사용했을 땐 킹 랭크에서도 고승률을 유지해서 많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는 작정을 했는지, 주무기인 쌍검으로 참가한 모습입니다."

"네. 여러분들이 소위 가위맨이라 부르는, 트롤링의 상징과도 같은  쌍검입니다. 잘 다루면 화려함의 극치,  다루면 추함의 상징이죠. 이 난이도 높은 무기를 완벽하게 다루기 때문에 칼고 선수가 이렇게 유명해진 것 아니겠습니까? 이미 예선전에서 보여준 바가 있으니까요. 오늘도 매드무비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팬분들께서 기대하고 계실  같네요."

"상대하는 노르드 선수도 이에 못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츠바이핸더도 당당히 나이트폴의 로망으로 불리는 상징적인 무기입니다. 이번 매치는 로망과 로망이 맞붙는, 정말 낭만적인 매치라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두 무기 모두 방어를 도외시한 만큼 보는  넘치는 게임이 

해설자들의 멘트가 마치 기름을 붙듯 열기를 더했다.

경기를 앞둔 두 선수가 자세를 가다듬는 것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중계진을 비추던 화면이 나이트폴을 상징하는 붉은 평원을 비추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본선 무대였다.



유난히 불타오르는 듯 이글거리는 태양이다.

지평선 끝에 걸린 태양을 경계선 삼아, 두 명의 전사가 서로를 마주하고 섰다.

그 우측이다. 광전사였다. 사람의 몸체와 비교될법한 압도적인 크기의 대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몸에 두른 중갑은 붉은 빛을 반사하지 않고 집어 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이글거리는 태양 빛이 그대로 광전사의 후광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붉었다. 마치 스스로가 광원이 된 것처럼, 뜨거운 열기를 온전히 품은 듯 했다.

그와 마주하고  전사는 붉은 광전사의 모습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양 손에 쥔 두 자루의 검을 땅을 향해 늘어뜨리고 있다.


 몸을 감싼 흰색 갑옷은 붉은 태양 빛을 그대로 반사해, 오연하게 빛났다. 깊은 밤에도 희게 빛날 것 같은 고결함이다.

투구로 가려진 얼굴에서 청명한 눈빛만이 존재감을 내비쳤다. 정갈하게 서 있는 자세가 마치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영웅처럼 보였다. 맑은 눈은 오직 광전사의 형상만을 품고 있었다.

붉게 일렁거리는 지평선의  극단에서, 두 전사의 시선에 자신의 적수가 담겼다.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 따위는 없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전사는 뛰기 시작했다.



충돌은 예상보다 빨랐다. 어느새 서로의 모습이 온전히 눈에 담기는 지근거리였다. 수를 던진 건 거의 동시였다.

육중한 대검을 앞으로 향한  달리던 광전사가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반격을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 달리는 기세를 그대로 실어낸 강렬한 찌르기였다.

쇄도하는 대검을 보고도 칼고는 계속 달려나갔다. 가공할 위력의 공격에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모습이다.

달려가는 기세를 줄이지 않고, 검이 닿기 직전 몸을 측면으로 회전시켜 찌르기를 흘려냈다. 종이  장 차이로 갑옷을 훑으며 지나간 대검에서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도대로 좁혀진 간격이다. 칼고의 양손이 교차하듯 움직였다. 회전하는 힘을 그대로 담아낸 오른손의 검이 광전사의 목을 노렸다.

칼고가 휘두른 검이 금방이라도 목을 절단낼 것처럼 다가왔다. 광전사는 대검을 찌르면서 앞으로 쏠린 균형을 억지로 바로잡지 않았다. 오히려 왼발을 한 발 더 내밀어, 칼고가 달려왔던 방향으로 나아간다.

동시에 오른쪽 어깨를 비틀어 올렸다. 목에 도달하기 직전인 칼고의 검이 노르드의 어깨갑주에 부딪혀 비틀렸다. 궤도가  검이 광전사의 투구를 스치듯 지나갔다.

 수가 빗나갔다. 일격에 대응할 것을 대비해 움직인 왼손의 검도 광전사에게 닿지 못했다. 노르드가 앞으로 쏠린 무게중심을 이용해 칼고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탓이다.

어느새 다시 뒤돌아선 광전사가 자세를 바로 했다. 허리춤에서 하늘을 향해 대검을 들어올리는 모양새였다.

우수의 검날이 상하지 않았나 확인한 칼고도 다시 자세를 잡았다. 다리를 살짝 굽히고 검을 쥔 양손을 모두 앞으로 내미는 모습이었다.

휴식은 숨을 가다듬는 한순간이면 족했다. 전투의 흥분이 전장을 감싼다. 호흡을 내쉼에 따라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검의 흔들림이 눈에 훤하다. 두 전사가 다시 몸을 움직였다.


거리가 충분히 벌어진 상태였다. 사거리의 이점을 가진 광전사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우측으로 크게 당긴 대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칼고의 허리를 향한 일격이었다.

칼고는 육중한 대검과 무기를 맞대는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았다.

왼발을 땅에 박을 것처럼 강하게 내딛으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달리던 기세를 멈추기 위한 진각이다. 처음의 충돌과 같이, 미세한 차이로 상대의 공격을 흘린 다음 반격을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상한 대검의 일격이 다가오지 않는다.

허리를 베어낼 것처럼 크게 당겨진 대검은 여전히 광전사의 품에 머물러 있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페이크 모션이었다.

노르드는 억지로 질주를 멈춘 칼고를 향해 한발을  내딛고는, 그제서야 대검을 휘둘렀다. 그 한걸음 차이로 닿지 않았어야 할 대검의 사정권에 칼고가 들어왔다.

급박한 전투의 순간이다. 대검이 휘둘러지기 시작하는 걸 보고 멈춰선 칼고와, 검을 휘두르지 않고  발을 더 나아간 노르드의 움직임이 모두  호흡에 일어났다.

인간의 반응속도로 대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노르드가 칼고의 움직임을 읽어낸 것이다. 수 싸움의 패배였다.

한번의 판단이 생사를 가르는 전투였다. 칼고는 그 찰나의 순간 자신이 읽혔음을 인정했다. 전투 구도를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살아남아야  터.

황급히 두 검을 겹치며 왼쪽으로 내밀었다.


쾅-!

"컥!"

급하게 멈춰선 탓에 이미 자세가 무너져있던 상황이었다. 불안정한 자세로 묵직한 대검의 일격을 받아낸 칼고가 그 충격으로 나동그라졌다.

자세를 추스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간신히 검을 놓치지 않은 칼고가 모양새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뒤로 몸을 굴렀다.

쾅, 하는 충격음과 함께, 방금까지 칼고가 머물던 자리에 육중한 대검이 내려꽂혔다. 칼고의 등 뒤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광전사는 한번 손에 잡은 공격권을 쉽게 양보하지 않았다. 자세를 바로잡을 시간은 커녕, 숨 고를 시간도 허용하지 않는다. 온 몸에 흙을 묻혀가며 땅을 구르는 칼고의 몸을 향해 살기가 가득 담긴 대검이 계속해서 쇄도했다.

이대로 가다간 금방 목숨을 잃을  뻔했다. 어떻게 해서든 회복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오른발로 강하게 땅을 박차 튕겨나가듯 구른 칼고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금방 추격해온 광전사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이를 악문 칼고가 왼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했다. 광전사가 다가오는 방향이었다.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집요한 괴물을 떼어놓지 못할 터. 칼고는 회전하던 힘을 담아 오른손의 검을 강하게 던졌다.


챙-

다행히 검을 내던진 방향이 정확했던 모양이다. 철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검 하나를 내주고 숨 고를 시간을 벌었다. 왼손에 남은 마지막 검을 두 손으로 거머쥔 칼고가 다시 광전사와 마주했다.


광전사는 칼고가 던진 칼을 튕겨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새 밤과 가까워진 걸까. 붉은 노을 빛에 은은한 어둠이 섞여 들었다. 찬란하고 선명했던 붉은색이 검붉게 물들었다.

광전사는 처음 본 그 순간처럼,  모든 빛을 흡수하듯 머금고 있었다. 칼고의 눈에는 그게 마치 핏물을 머금은 것처럼 보였다.

투구에 가려진 광전사의 얼굴에서 두 눈만이 시퍼렇게 빛났다. 그 차가운 눈빛이, 마치 자신을 꿰뚫어 보는  같이 느껴져서.

칼고의 심장이 철렁이며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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