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44 - 네 비석을 박아줄게
내딛은 발에 힘을 싣는다. 진각은 공격의 전초, 상대 또한 이를 보고 대응에 들어갈 터.
그러나 망설이지 않는다.
횡으로 내지른 대검이 거칠게 공간을 쓸었다. 상대를 베어내지는 못했다. 허나 받아칠 엄두를 내지 못한 적이 큰 폭으로 물러나는 것을 확인했다.
이 공간을 점유할 수 있다면 전투의 주도권은 내 손에 있는 것이다. 대검의 사정권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절대 공격해올 수 없는 거리.
방심은 금물이다. 이전처럼 상대가 위험을 감수하고 흘려내기를 시도한다면 아직 변수는 남았으니.
나는 조급함을 버리고, 서서히 사냥감의 숨통을 조여가면 되는 것이다.
거리를 내주지 않는다. 적은 지금까지 간격을 좁히지 못해 양손의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한 상태였다.
대검이 닿는 사정권 밖에서 눈치를 보듯 배회하던 상대가 기습적으로 뛰어들었다.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어내기 위한 움직임이다.
대검을 휘둘러 접근을 막되, 강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 무기를 바로 회수할 수 있게끔 여력을 남겨두어야 한다.
접근해오던 도중 백스탭을 밟아 일격을 피해낸 상대가 억지로 몸을 비틀었다. 관성을 역행해 내 빈틈으로 파고들려는 모습이다.
내뻗은 오른발에 힘을 준다. 이미 전방을 휩쓴 대검을 그대로 돌렸다. 힘을 거스르지 않는다. 대검의 무게를 그대로 받아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묵직한 질량의 대검에 회전의 힘이 더해졌다.
그대로, 접근하는 적을 향해 때려박는다.
회피가 늦었다고 판단했는지, 양손에 든 검으로 일격을 막아내려 하지만.
그건 먹잇감의 마지막 발버둥에 불과했으니.
콰직-
무언가가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승리의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세트 스코어 2 대 1. 쉽지만은 않은 두 번째 승리였다.
"네! 집요하게 거리를 허용하지 않던 노르드 선수가, 끝내 무리해서 접근을 시도한 칼고 선수를 베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세 번째 세트를 가져갔네요. 승부를 결정지은 마지막 일격입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종이 한장 차이의 승부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양 선수가 두 번째 세트를 의식하는 모습이 계속해서 엿보이는 장면이었네요. 이번 세트만 보면 우월한 무기의 사거리를 이용해 게임 내내 칼고 선수의 접근을 차단한 노르드 선수였습니다. 그것만 보면 완벽한 우세를 가져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건 2세트도 마찬가지였거든요. 간발의 차이로 일격을 비껴내며 접근에 성공한 칼고 선수가 바로 승기를 잡았지 않습니까? 그 패배에서 느낀 것이 있는지, 이번엔 노르드 선수가 정말 철저하게 거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네요."
"김학규 해설의 말씀대로 보이는 것만큼 압도적인 차이는 아니었습니다. 그것과 별개로 경기의 수준이 정말 높다는 걸 다시 강조드리고 싶네요. 도중에 노르드 선수가 몇 번이나 모션 페이크를 사용하는지 보셨습니까? 저는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당연히 견제를 위한 공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눈 앞에서 상대하는 칼고 선수의 시점에서 어떻게 보였을지는 상상도 하기 싫네요. 아마 접근을 하면서 머릿속이 엄청나게 복잡했을 겁니다."
[경기 수준 실화냐]
[??? 이게 32강??]
[마지막에 휠윈드 도는거 존나 소름돋네]
[노르드! 퀸르드! 황르드!노르드! 퀸르드! 황르드!]
[정배들 정신이 들어?? 역배는 무적이고 노르드는 신이다]
[노르드눈나 나죽어ㅓㅓㅓ]
칼고와 노르드가 맞붙는 본선 경기의 3세트가 끝났다. 예상했던대로, 속도감이 넘치는 결전이었다. 전투의 순간 순간이 서로에게 줄타기나 다름 없었다.
육중한 대검은 일격이라도 허용하면 칼고를 전투불능 상태로 몰고 갔으며, 반대로 쌍검의 날카로운 연계는 접근만 할 수 있다면 단 번에 노르드의 목숨을 끊어냈다.
3세트까지 이어진 다전제에서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다.
분위기가 고조되는 것도 당연할 터.
그러나 전장에서 한발 앞서 간 광전사는, 대회의 들뜬 분위기와는 별개로 전투를 복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도박수를 받아내냐 받아내지 못하냐의 싸움이 된 셈인가.
3세트가 끝난 대기시간이다. 친절하게도 세트가 끝날 때마다 선수들에게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대회를 위해 만들어둔 빌드를 다시 점검하고 있었다. 세트가 바뀔 때마다 빌드 수정이 가능했으므로.
패배의 순간을 기억한다.
초반은 3세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주도권을 꽉 붙잡은 상태였다. 상대적으로 짧은 사거리를 가진 상대가 파고들 틈을 주지 않고, 사거리의 이점을 살려 접근을 막아내는 구도.
그러나 그게 겉으로 보이는 만큼 유리하지 않다는 건 서로가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리가 벌어졌다는 건 결국, 나도 유효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승부가 결정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종이 한장 차이로 대검의 일격을 피하고 반격한다는, 상대의 도박수가 제대로 먹혀 들어간 것이다.
그 차이일 뿐이었다. 노림수를 던진 것은 상대였다. 승패의 행방은 그게 성공하냐 실패하냐로 결정났고.
두 번의 세트를 먼저 따낸 와중에도, 그게 마음에 들지 않더라.
빌드. 빌드라.
적어도 게임의 마지막 순간은, 내가 결정하고 싶었다.
나는 빌드창으로 손을 옮겼다.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는 게임이다.
칼고는 양손에 들린 두 자루의 검을 바로 잡았다.
살을 내주면서 뼈를 취하는 광전사라.
전혀 아니었다.
전날 돌려본 노르드의 게임에서도 느낀 감상이었다. 얼핏 지나치게 저돌적이고 공격적으로 보이는 움직임에는, 모두 철처하게 합리적인 근거가 숨어 있었다.
승리라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과정들. 칼고가 판단하기에 노르드라는 유저의 가장 큰 특징은 광기가 아니라 침착함이었다. 그것도 상대하는 사람의 기를 죽이게 만드는.
오늘 노르드가 보여준 모습은 그가 영상에서 봤던 저돌적인 스타일의 플레이가 아니었다.
자신이 쌍검을 휘두를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무기의 사정거리 차이를 이용해 선을 긋는 플레이.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파훼하기도 힘들었다.
이미지와 달리 도박수를 던져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저 간격을 뚫고 공격을 시도할 엄두도 낼 수 없었으니까.
첫 세트의 기억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분명한 공격 타이밍을 도대체 몇 번이나 그냥 넘겼는지. 대회가 아니었다면 모두 과감하게 파고들었을 빈틈이었다. 그러나 그걸 실패하고 역으로 패배한 경험 때문에 망설임이 생겼다.
그는 유일한 승리의 순간을 떠올렸다.
그만큼, 주저하다 던진 도박수가 성공했을 때는 짜릿하기 그지 없었다.
다시 침착함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경기의 주도권을 뺐긴다고 해서 초조해 할 이유는 없었다. 결국 광전사의 대검도 자신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은 동일했다.
시도는 자신의 몫이다. 침착하게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기만 한다면, 아직 승리의 기회는 남아있을 터.
잠깐의 휴식이 끝났다. 네 번째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리고.
숨을 한번 내뱉은 칼고가 달리기 시작했다.
부웅-
무거운 질량의 쇳덩어리가 공기를 뭉개며 만드는 소리였다. 쌍검을 쥔 기사가 다시 한번 뒷걸음질쳤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한 광전사의 간격이다. 여유를 두고 피할 수 있으나, 파고들기는 어려운.
칼고는 거리를 벌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시금 품으로 대검을 잡아당긴 광전사다.
칼고는 천천히, 원을 그리며 광전사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4세트 내내 나타났던 전투의 양상이다. 아마 두 전사의 활동량 따위를 측정하면 우스꽝스러운 결과가 나오리라.
광전사의 빈틈을 만들기 위해 무던히 움직이는 칼고와는 다르게, 노르드는 제자리를 지킨 채 시선만 움직이고 있었다. 극명한 대비가 나타난다.
그러나 분명 다른 점도 있었다.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하던 이전 게임의 칼고와 달랐다. 쌍검을 든 기사는 거리를 유지하며 조심스레 광전사를 지켜볼 뿐이었다. 두 번의 패배 끝에 전략을 수정한 모양이었다.
그 정적인 대치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돌연, 제자리를 딛고 서 있던 광전사가 다리를 움직였다.
땅을 거세게 차는 소리가 침묵을 깼다. 서로의 간격을 빠른 속도로 좁히며 달려들었다. 동시에 허리 뒷편으로 크게 젖혀진 대검이 무서운 기세로 날을 번뜩였다.
기다렸다는 듯 칼고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지금까지 참을성 있는 쪽이 승기를 가져가는 구도였다. 주도권을 잃었던 탓에 매번 공격을 시도하는 쪽은 자신이었으나, 수정한 전략이 먹혀 들어간 모양이다. 칼고는 광전사가 공세를 취한 것이 오히려 반가웠다.
인파이트는 자신의 특기였으므로.
이번엔 주저하지 않았다. 칼고는 양손에 쥔 검을 비스듬히 겹쳐 든 채로 광전사가 달려드는 방향으로 마주 돌진했다.
챙-!
철과 철이 맞닿았다. 반쯤 광전사의 품으로 파고든 덕에 대검의 일격을 받아칠 수 있었다.
수 차례의 전투 중, 이렇게 비등한 상태로 무기를 맞댄 것은 이번이 처음이리라. 전투가 시작되기 전 칼고가 그려왔던 구도이기도 했다.
서로의 호흡이 느껴지는 지근거리에서의 전투.
서로가 무기에 힘을 더하며 밀어내는 도중이다. 먼저 움직인 쪽은 칼고였다. 순간적으로 쌍검에 더하던 힘을 줄이며, 미끄러지듯 몸을 돌렸다.
상대의 힘에 의해 몸이 밀려나는 와중에도 오른손의 검이 움직였다. 왼손의 검은 아직도 대검과 맞닿은 상태였다. 마음대로 검을 움직이기도 힘든 짧은 거리에서 능숙한 솜씨로 살을 도려냈다.
광전사의 피가 칼고의 검을 타고 흘러내렸다.
황급히 대검을 당긴 광전사에게 칼고가 달라붙었다. 한번 잡은 우세를 쉽게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왼손과 오른손이 교차로 움직이는 와중에도 두 검이 엉키지 않는다. 빠르고도 절묘한 움직임이었다.
현란한 궤적을 그리며 칼고의 공격이 이어졌다. 대검을 든 탓에 몸이 둔한 광전사는 쉽게 대응하지 못했다. 하나 둘, 몸에 상처가 늘어난다. 급소로 향하는 치명적인 일격을 막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걸까.
칼날이 그리는 날카로운 궤적을 향해 광전사가 억지로 파고 들었다.
그 모습에, 칼고의 머릿속에 묘한 기시감이 일어난다.
어제 봤던 노르드의 영상이었다. 자신과 같이 쌍수를 사용하는 상대에게 돌진하여, 수세를 뒤집고 단번에 승기를 붙잡던 광전사의 플레이.
칼고님이라면 달려드는 순간 죽였을텐데-였나.
찰나의 순간 휘두르던 쌍검을 제 품으로 당겼다. 흘린 피 만큼 광전사의 몸놀림이 빨라졌을 터. 최후의 발악이라며 우습게 봤다간 영상에서 봤던 전사처럼 허망하게 죽을지도 몰랐다.
양손에 쥔 검을 가위처럼 교차시켜 든 칼고가 광전사의 돌진에 대비했다. 이미 상처를 입은 호랑이다. 이번 공격을 막아내면, 다시 승기가 돌아온다.
그렇게 생각했다.
돌연, 광전사의 움직임이 뒤바뀌었다.
몸을 부딪혀오지 않는다. 칼고의 공세가 멈춘 틈을 타 그 자리에서 대검을 들어올렸다. 도끼로 장작을 내리치듯 머리 위에서 찍어내리는 일격이다.
쾅-!
미리 공격에 대비했던 칼고였다. 묵직한 일격에 자세가 틀어졌으나, 검을 비튼 상태로 대검을 받아내 조금이나마 충격을 흘려냈다.
돌진을 미끼로 주도권을 잡으려는 수작이었나. 그래도 달라질 건 없었다. 거리를 벌리지 못하는 이상 근접전은 쌍검을 사용하는 자신이 훨씬 더 유리할 터.
다시 공세로 전환하려던 칼고에게 대검이 쇄도했다.
"큭!"
챙-!
거리를 벌리려는 시도 따위는 없었다. 온전한 힘으로 대검을 휘두르기도 힘든 지근거리에서, 광전사는 연이어 공격을 시도했다. 칼고의 검과 부딪혀 충돌음을 낸 대검이 마치 튕겨나듯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졌다.
본래 움직임이 둔한 탓에 금방이라도 카운터를 당해야 할 발악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받아치기 힘들었다.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인가. 죽음을 눈 앞에 둔 광전사의 움직임이 훨씬 빨라졌다. 애초부터 이런 상황을 노린 건가. 섬뜩한 깨달음이 칼고의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대검을 받아치며 어금니를 악 물었다.
이대로 휘둘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허리춤을 향해 다가오는 대검을 간신히 쳐낸 칼고가 광전사를 향해 왼손의 검을 찔러 넣었다.
푹-
칼고의 좌수검이 광전사의 옆구리에 깊은 상흔을 남기며 지나갔다. 성공적인 반격이었다. 몸이 꿰뚫리는 차가운 감각에, 광전사도 조금은 주춤거릴 터.
그러나 피에 취한 광전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대검의 기세가 줄어들지 않았다. 힘겹게 일격을 받아내며 고개를 들어올린 순간, 칼고의 시선이 광전사와 교차한다.
실핏줄이 터진 탓일까. 붉게 충혈된 눈은 처음 봤을 때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칼고가 침착함이라고 확신했던, 냉정하고 차가운 눈.
왜 지금은 그것을 광기라고 느끼고 있는가.
그 뒤는, 그저 본능의 영역이다.
주도권을 잡기 위한 설계나 심리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의 핏방울이 피부에 튀기는 위치에서, 보다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기 위한 처절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칼고가 휘두른 검이 광전사의 왼쪽 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쇄도한 광전사의 대검이 칼고의 방어를 뚫고 흉부의 갑옷에 거친 흔적을 남겼다.
반쯤 무너진 자세를 무시하고 검을 휘두른다. 출혈이 심한 광전사의 공격을 막아내기만 하면 이긴다는, 안일한 생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한번이라도 더 검을 움직이지 않으면, 단 칼에 목숨을 잃는 건 바로 자신이 될 것이었으므로.
노을이 내려앉아 붉게 물든 평원으로 그보다 더 붉은 피가 쏟아져내렸다.
몇 분, 아니. 몇 초인가. 당사자들에겐 한없이 길게 느껴졌을 전투가 끝나고.
쓰러진 상대의 위로, 최후의 일격이 내리꽂혔다.
패자의 몸에 박힌 검이 마치 비석이라도 된 것처럼 우뚝 섰다.
피와 노을을 머금은 대검이 붉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