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46 - 때로는 그냥
<센세 16강 상대 정보글>
센세가 이 글을 읽을 것 같진 않지만, 게시판 상주중인 무지렁이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봐 적는다.
16강 상대는 킹랭크 네임드로 유명한 김오방임.
타 플랫폼 아마 대회 참가했을 때 기복 없이 잘한걸로 유명함. 닉 때문에 김오빠라고 찬양받음. 물론 그렇게 부른 대부분이 꼬추달린 새끼들ㅇㅇ
검방 유전데 좌수검 우방패를 사용함. 그게 패링이 잘된다고 인터뷰한적이있음. 표본이 적다보니까 패링 모션이 잘 안보일수도 있을듯?
플레이는 매우 균형이 잡혀있는 스타일. 대회 캐리한 경기 지켜보면 2 대 1 상황에서 패링이랑 견제 섞으면서 꽤 오래 드리블에 성공한 장면이 있음. 상대 플레이에 맞춰 대응하는 게 장기인듯함. 공격 배합도 좋은 것 같아. 사실 부족한 부분이 없음. 킹랭크 상주하는 유전데 단점이 있는 게 더 웃기겠지.
검방 유저답게 보고 대응하는 거에 특화된 느낌이 있음. 본선 1차전만 봐도 알겠지만 가드 올린 상태에서 방향전환하는게 엄청 빠르고 정확하다.
뭐 칼고 꺾고 올라온 센세가 조금이라도 더 승산이 높을 것 같긴 한데, 결전은 붙어봐야 아는거니까... 아무튼 센세의 승리를 기원한다.
antlr98:꽤 잘합니다. 중형 라운드 실드를 주로 쓰는데, 양손 무기랑 싸울 때 패링 가능한 공격을 판단하는 게 엄청 빨라요. 깔아두기도 잘 쓰는 편이구요. 까다로운 상대입니다.
-나랑달:킹랭크 현지인이신가보네; 자주 만나본듯?
-antlr98:아뇨 지금은 아니고 예전에 좀 만나본거에요. 저 사람도 퀸 상위~킹 왔다갔다하는 사람이라ㅎ
노르드발닦개:노르드는 신이고 광전사는 무적이다. 검방? 그런건 방패 째로 깨부수면 돼.
smatafuc:딱 보니까 좆굴씹굴이랑 할 때처럼 심리전 싸움될듯. 센세가 그런 싸움 질리가 있나?
-검방커신:부두술ㄴ; 검방으로 킹까지 달았으면 그냥 심리전은 최상위라고 봐야됨. 츠바이랑 검방이면 상성도 거의 반반이고... 까봐야 안다.
-화살한방울:검방 씹새들ㅋㅋ 칼들면 방패 못들게 해야됨. 땅개가 화살 막는게 말이되냐??
-검방커신:네다졸^^ 졸렬한 활쟁이년이 신성한 결전판에서 지랄 ㅋㅋ
-화살한방울:내가 단검들고 결전떠도 너는 이김ㅎ
-검방커신:방파라 시발련아
쪼르륵-
컵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맑게 울렸다. 잠깐 냉동실에 넣어둔다는 걸 깜박하고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녹이기 위해 한참을 내놨더니 이제야 좀 마실 수 있게 됐다. 페트병 외곽에 맺힌 물기가 손에 닿아 차가웠다.
커뮤니티는 인생의 낭비다.
...뭐, 애초부터 낭비로 가득한 인생이긴 했다. 아무튼 어젯밤은 시간 낭비의 연속이었다. 다른 커뮤니티를 찾을 필요도 없이, 내 저컴 게시판에서 새로 올라오는 글들을 읽는 것만으로 시간이 빨리도 사라지더라. 분석글이니 경기 평가니 하는 걸 보다 보니 금방 해가 떠올랐다.
꽤 수준 높은 분석이 있어서 놀랐다. 나이트폴 커뮤니티에서 올라온 분석을 그대로 퍼온 글이었다.
하기야 별의별 사람이 모여드는 커뮤니티다. 나이트폴에 인생을 갈아넣은 사람이 없는 것도 이상하겠지. 프로 게임단도 활성화되어 있으니 분석관 같은 자리라도 들어가면 좋을 텐데. 저런 걸 보고 재능 낭비라 하는 건가.
자신의 플레이를 진지하게 평가하는 걸 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대개 감탄으로 반응하는 시청자들과는 또 달랐다.
슬로우 모션으로 경기를 돌려보며 플레이 하나 하나의 의도를 캐묻는, 세밀한 분석. 내가 실제로 했던 생각과 일치하는 것도 많았다. 역시 깊게 보면 다른 게 보이는 건가 싶더라.
내 게시판이 불타올랐던 것처럼, 확실히 결전대회는 많은 주목을 받는 것 같았다. 그래봐야 나이트폴 커뮤니티 내에서의 관심에 불과하겠지만.
그게 어딘가. 방송인으로써는 기뻐해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컵을 들고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아침이 되어서야 잠든 통에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점심 먹을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배는 고프지 않았다. 수면 패턴이 망가지면 배꼽 시계도 맛이 가는지, 잠들기 전 그렇게 허기를 호소하던 배가 지금은 조용하다.
어중간하게 먹을 바에야 저녁 한 끼로 하루를 해결하는 게 편할지도 모르겠다.
메세지로 받은 대진표를 펼쳤다.
16강 상대가 정해졌다. 상대는 검과 방패를 사용하는 유저였다. 상당히 일반적인 무기다. 사실 32강에서 쌍검을 만난 게 더 의외였지. 그건 개체 수 자체는 많지만 수준 높은 유저를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무기였으니까.
잠깐 어제 있었던 경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떠올려도 위험한 순간이 많았던, 힘겨운 싸움. 이게 본선 무대라는 걸 알려준 제법 무게감 있는 신고식이었다.
당연하게도, 올라갈수록 난이도는 훨씬 높아지리라.
분석을 위해선 본선 영상을 돌려 봐야겠지.
플레이 분석이라는 건 귀찮다. 나름 승률을 높여본답시고 본선부터 시작한 일이었다. 프로 리그 시청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분석하는 게 즐겁지는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서, 관객의 눈으로 바라보는 전장은 재밌다. 배속을 낮춰두고 분석관의 시선으로 보는 전투는... 뭐, 사람에 따라선 이런 걸 좋아하는 괴짜도 있겠지.
내게는 하기 싫은 숙제에 가까웠다.
혹시나해서 확인해본 엘튜브 채널에는 아직 하이라이트 영상만 올라왔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풀영상은 다시보기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김오방의 하이라이트는 길이가 다소 짧은 편이다. 검방이란 무기의 특색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패링 연발이 아니면 화려한 맛은 없는 무기니까.
상대방의 무기는 창인가. 길이가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츠바이와 공통점을 찾기 힘든 무기. 아쉬움은 있었으나 어쩌겠는가. 사실 나와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표본을 바라는 게 양심이 없는 일이라는 건 잘 알았다.
게임의 내용이 일방적이다.
이건 실력 차이가 난다고 표현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긴 사거리를 이용해 급소를 찌르는 창의 일격이 모조리 차단된다. 창을 쓰는 유저의 공격 배합이 나름 나쁘지 않아보였는데도 그랬다.
하반신을 쓸어오는 창대를 흘리고, 상체를 찌르는 창 끝은 방패로 쳐낸다. 훌륭한 방어는 곧 공격의 시발점으로 작용한다. 공격이 빗나가며 자세를 무너뜨린 창병에게, 재빠르게 접근한 김오방의 검이 떨어진다.
1세트만 보면 굳이 스코어를 확인하지 않아도 알겠다.
이건 3 대 0으로 끝났겠군.
...공격을 읽는 눈이 너무 정확한데. 벌써부터 골이 아파오는 느낌이다.
전부 보고 막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걸 심리전이라고 쳐도 성가시기는 마찬가지였다. 창을 상대로도 저 정도인데, 움직임이 훨씬 크고 느린 대검은 어떨까. 아마 전부 보고 대처하겠지.
쌍검을 든 칼고와는 달랐다. 그건 방어라는 선택지를 고를 수 없는 공격적인 무기였다. 회피와 반격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지에서, 양극을 오고가는 줄타기. 확실히 곡예라 부를 법 하다. 괜히 벌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지.
방패. 저 성가신 방패가 문제였다.
뇌를 비우고 강공격을 연타하면, 대형 방패가 아닌 이상 정면에서 박살낼 수 있기는 했으나.
대검을 크게 들어올리는데 가드나 올리고 앉아있지는 않을 게 뻔한데.
어제의 마지막 세트처럼, 대주다가 한번에 뒤집는 빌드를 가져갈까...
머리로 궁상을 떠는 일이었다. 랭크에서는 이런 과정이 즉석에서 가능하지 않나. 서로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만나, 경험으로 다져진 구도를 떠올리며 덤벼드는 것이다. 그럼 가만히 앉아 상상 속에서 끝나지 않는 가위바위보를 할 필요도 없겠지. 대회라는 건 생각보다 귀찮은 일인 것이다.
지이잉-
진동소리가 반갑게 느껴지기는 또 오랜만이다.
풀리지 않는 문제는 사람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저딴 문제를 붙잡고 있느니 무슨 답장을 보낼까 고민하는 게 낫지.
혜민인가? 아니면 스벅의 메세지일지도 몰랐다. 일어나자마자 어제 받은 문자에 답장을 했으니 지금쯤이면 확인을 하고도 남았겠지.
<주호>
나 친구들한테 누나 커밍아웃해도됨?
예상외로 주호였다.
커밍아웃? 니네 누나 사실 남자라고?
아니, 아니지. 진정해라. 이건 아마... 방송에 관련된 일이겠지.
되겠냐?
'그럼 너를 죽일 거야.'
답장은 꽤나 빨랐다.
<주호>
ㅠㅠ... 애들 대회얘기하는데 입이 근질근질한데
뭔, 고딩들이 학교에서 인터넷방송 이야기를 한다고?
말세다 말세. 이 나라가 망할 때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이가 없었다. 나 때 고등학생들은 반 친구들과 진지하게 탱크가 사기라느니, 마인이 사기라느니 하는 생산적인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생각해보니 거기서 거기였다.
반 친구들과 나이트폴 이야기인가...
자기 누나가 대회에 출연하고 있다고? 동생의 말마따나 나 같아도 입이 근질근질 했을 것이다. 물론 내게 누나 같은 건 없었지만.
저렇게 내 의사를 물어보는 문자라도 보내온 걸 보면 주호의 성격도 알 만했다. 바로 발설하지 않고 문자를 보내다니. 참 성실한 친구다.
그래도 구체적인 신상 정보를 이곳저곳에 함부로 흘리고 다니고 싶진 않았다. 동생 친구들이 별 거 아닐 것 같지만, 건너건너 따지면 전세계인이 친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굳이 어딘가로 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 필요 따위는 없겠지. 얻을 건 주호가 느낄 아주 짧은 순간의 우월감 뿐일텐데.
여기선, 못을 박아두자.
'말하면... 혜민이한테... 이를거임...'
이게 또 치트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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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엑."
드물게도 빨리 도착한 제 누이의 답장을 보고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소리였다.
소름이 끼치는 말이었다. 최근 자신의 언니와 관련된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혜민이 아닌가. 문자를 무시하고 친구들에게 자랑이라도 했다간 어떤 반응이 튀어나올지는 뻔한 일이었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어쩌겠는가. 뭐, 따지고 보면 참을 수 없을 만큼 애타는 일도 아니었고.
시작은 쉬는 시간에 몰래 엘튜브를 보던 정환의 입에서부터였다.
뭘 보는 건가 싶었는데. 어제 올라온 스트리머 칼고의 영상이라나. 저결에서 탈락해서 올린, 자신이 참가한 대회의 일인칭 영상이었다.
본래 대회 도중 금지된 스트리밍과 영상 업로드는, 참가자가 탈락하면 곧바로 공개가 가능했다. 방송인은 본인의 패배에서도 엘튜브 각을 보는 걸까. 그 짧은 사이에 벌써 영상 업로드를 마친 모양이다.
저결 대회의 흥행과 맞물려, 칼고가 올린 영상은 실시간 인기 영상에 올라왔다. 조회수가 급격하게 뛰어오른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일인칭 화면이기에 느껴지는 전투의 현장감이 일품인 영상이었다. 거기에, 상대로 등장한 광전사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더해졌다. 정환의 자리에 몰려든 친구들의 대화 주제가 결전 대회로 넘어간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많은 남정네들의 입에서, 제 누이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광경이란. 아니, 진짜 이름은 아니었지만.
주호의 입은 간지러운 걸 넘어서 부들부들 떨렸던 것이다. '아, 사실 이 노르드라는 쌉고수가 내 누나야.' 라는 한마디를 집어삼키기가 얼마나 힘들었던가.
안될 걸 알면서도 친구들 몰래 누나에게 문자를 보낸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물론 답장은 그의 예상대로였다.
될 리가 없지.
친구들은 아직도 같은 주제로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아니, 잘하긴 하는데 무상은 절대 못이긴다니까? 프로가 장난이냐? 무상은 프로 중에서도 유망주야, 유망주. 노르드 노르드하는데 내가 볼때 칼고가 거품이야. 올웨폰하다가 실력 좆박은거지. 노르드는 다음 경기에서 김오방한테 뚝배기 따일거라고."
이 새끼가 근데.
"뒤질래?"
그깟 김오방인지 뭔지가 뭐라고, 열변을 토하는 제 친구놈에게 못참고 내뱉은 한마디였다.
맥락 없이 끼어든 탓에 분위기가 썰렁해졌으나.
주호에게는 후회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