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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화 〉47 - 미친년은 아니야 (47/243)



〈 47화 〉47 - 미친년은 아니야

나이트폴에서 '상성'이라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유저들도 많았다.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비단 나이트폴에만 적용되는 말인 것도 아니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대전액션 게임의 경우에는 대부분 적용될  있다.

상성이 있다. 공략법이 있다. 제작자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설계 상으로 결정된 넘을 수 없는 간극.

예컨대 어떤 격투 게임에서, A라는 캐릭터로는 B라는 캐릭터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판정이 우월한 특정 기술만 반복해서 사용하라는 것이다. 저 캐릭터의 기술폭으로는 절대 저 단순한 반복을 파훼할 수 없다고.

유불리는 분명히 존재한다.

  있는   많다든가, 판정이 좋다든가 하는 것들이 맞물려 만들어지는 것이다. 불리한 쪽은 필연적으로 제한된 선택지를 가지고 싸움에 임하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게 절대 이길  없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당연하지만, 절대라는 건 있을 수가 없는 법이다.




나는  앞에서 방패를 들어올린 견고한 기사를 바라봤다.

틈이 보이지 않는다. 빈틈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도 그랬다. 어딘가를 공격하는 모션을 취하면, 귀신같은 속도로 대응하여 자세를 바꾼다. 저 둥그런 방패가 내 대검에 껌 같이 따라 붙는다는 뜻이지.

이론  무적이라는 건, 방패를 든 게이새끼들한테나 허용되는 말이 아닐까-하고.

나도 언젠가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우스운 일이다. 누가 나에게 넌 방패를 들면 안된다는 제약이라도 걸었나. 그저 이상한 아집으로, 남자라면 묵직함이 있어야 된다고 중얼거리며 대검을 들어올렸던 것 뿐인데.

돌파할 수 없는 벽을 마주하고는, 칭얼거리며 불평을 내뱉는 꼴이란. 추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무적이란 건 있을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대검을 크게 뒤로 당겼다.

명백한 강공격의 전조다. 방패를 의식해 짧고 빠르게 가한 공격에도 쉽게 반응하던 상대방이다. 이렇게 빈틈이 큰 움직임에 대응하지 못할 리는 없겠지.

반응을 유도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대응할지.

내가 대검을 들어올린 순간이다. 즉시 방어를 풀어헤친 상대가, 좌수의 검으로 빠르게 나를 찔러왔다.

일반적으로 검방에 사용되는 검보다 조금 더 짧았다. 이런 식의 운영을 염두해두었을 터.

이미 공격에 들어간 내 몸이, 적이 휘두른 일격을 그대로 허용한다. 상대방도 빠르게 움직인 탓에 힘이 실리진 않았다. 내 갑옷의 측면에 스친 검은 분명 치명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쾅-

내리친 대검의 일격이 방패와 마주한다. 강하게 내지른 일격이다. 방패와 함께 기사의 몸이 흔들리지만, 자세가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흔들리는 몸을 억지로 추스리지 않고 한발 물러난 적이 위치를 다시 잡았다. 도돌이표. 익숙한 대치구도가 만들어졌다.

그 짧은 사이에 검을 다시 거두고는 방패를 들어올린 것이다.  공격은 허투루 돌아갔다. 방패의 내구도나 조금 깠을까.

반면 상대는 내게 상처를 입혔다. 분명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누적된 피해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몇 차례나 반복된 패턴이다. 노골적인 방어의 움직임. 방어를 뚫기 위해 공격을 가하면 그 빈틈을 뚫고 카운터가 들어온다. 중갑을 뚫고 살을 저며낼 만큼 날카로운 공격은 없었다. 그러나 분명 일방적인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은  쪽이었다.

게임의 양상이 이렇게 흘러갈 것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걸 알고도 마음 편히 넘길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이래서 싫다. 방패를 든 놈들이.

거리가 벌어진 상태다. 자연스레 방패를 들어올린 기사는 내 눈치를 보며 굳건한 태세를 유지했다. 이번 경기는 철저히 수비적으로 임하리라 준비하고 온 모양이다. 매치가 시작한 이래로 먼저 칼을 움직이는 일이 없었다.

그래, 승부수를 던지는  내가 되겠지.

상처가 쌓이는 것에 초조함을 느낀다면 어떻게 광전사를 플레이할 수 있을까. 불안감은 없었다.
짧은 대치 중, 내 머릿속은 어떻게 저 방어를 뚫을지로 가득찼다. 설계가 필요한 순간이다.

 망설임 없이 돌진하는 걸 선택했다.

돌진하는 기세를 담은 강공격이다. 거리가 있는 상태에서 들어오는 일격이니 카운터를 노리기는 힘들 것이다. 방패로 받아내거나, 회피하는 선택을  터.

보고 대응하는 것에 도가  상대다. 한수 한수를 교환하려 하면 안 된다. 적어도 두수는 먼저 읽어야겠지.

대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나를 보고, 방패를 마주 드는 상대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나는 곧장 입력된 동작을 취소한다.

치켜올렸던 대검을 다시 내린다. 그대로 달려가는 기세를 살린 채 적을 들이받았다. 들어올린 방패로 차징을 받아낸 기사의 자세가 무너진다.

즉시 대검의 횡베기가 이어진다. 대검으로 할  있는, 가장 빠른 공격이다. 균형을 잃은 상대에게 바로 이어진 추격타다. 가드를 선택할 수는 없을 터.

그럼, 선택지는 하나 뿐이겠지.

부웅-

타점이 어긋난 방패가 애꿎은 공기만을 뭉갠다.
빗나간 패링이다. 분명 공격할 것처럼 보였던 대검과 마주하지 못했다. 내가 다시 한번 움직임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자세에서, 상황을 타개하고자 패링을 선택하겠지.

유도한 바였다. 빠른게 장기인 약공격만으로 유효타를 낼 수는 없으니까. 더  빈틈을 끌어내야만 했다. 그걸 위한  한번의 캔슬이다.

허공을 가르는 패링만큼 빈틈이 노출되는 움직임도 드물다.




이미 한껏 뒤로 돌아간 대검이 그제서야 날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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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형?"
"...잘하긴 하네. 이게 여성 유저라고?"

GB게이밍의 연습실이다. 선수들의 요청에 따라 PC방처럼 늘어선 컴퓨터의 본체에서 보라빛이 반짝인다. 쉬는 시간인지, 나란히 늘어선 여섯 개의 자리  대부분이 비어있었다.

말소리가 들려온 곳은 가장 안쪽에 배치된 자리였다. 컴퓨터  게이밍 체어에 앉아있는 앳된 인상의 남성 뒤로,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남성이 함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스틴 결전 대회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모션 캔슬  하고 그냥 때렸어도 유효타였는데. 일부러 타이밍 주고 헛패링 유도한 게... 무슨 배짱이냐?"
"제가 잘한다고 했잖아요. 뭐 동생 말을 그렇게  믿어요?"
"얌마, 니 전적을 생각해야지. 저번에는 데굴데굴보고도 잘한다고 했잖아. 신뢰가 생기겠냐고."
"그것도 결국 제 말이 맞다고 인정했잖아요."
"뭘 인정해. 좆같이 한다고 했잖아."
"그 정도면 극찬 아니에요? 그리고 데굴데굴도  사람이 잡고 올라온 거예요."


무상의 말에 찬혁이 눈쌀을 찌푸렸다.

확실히 좆같기는 했다. 대부분의 나이트폴 유저가 그렇듯이 그도 타워 실드를 사용하는 거북이들을 혐오했다.

다른 무기들은 연계기 활용이 좋다, 패링 타이밍이 좋다는  장점으로 내비쳐야 할 움직임이 대형 방패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역겨움으로 승화됐다.

무상의 말마따나, 역겨움의 정도가 대형 방패를 사용하는 유저의 숙련도와 비례한다면 데굴데굴은 훌륭한 플레이어였다.

그걸, 츠바이로 꺾고 올라왔다면.


찬혁은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1세트의 하이라이트가 나오고 있었다. 깔끔하게 대검을 받아내는 방패의 움직임이 인상적이다. 조금씩 숨통을 조여가는 구도였다. 누구나 검방 유저의 우위를 확신할만한.

그만큼, 게임을 뒤집은 노르드의 한수는 더 극적이었다.

의자에 앉아 빠져들듯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는 무상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간 똑같은 화제의 대화를 몇 번이나 나누었던가. 연습이 끝난 쉬는 시간이나, 같은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시간이나. 대화를 나눌 때에면 반드시 노르드라는 유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처음으로 참가한 대회이니 그러려니 했으나, 그것도 한두 번이다. 질리지도 않고 똑같은 주제를 꺼내오는 통에 이젠 팀원들도 쓴소리를 내뱉는 상태였다.

찬혁은 백기를 들고 무상과 함께 저결대회를 시청하기로 결정했다. 도대체 얼마나 잘난 유저길래 이리도 막내의 관심을 독차지하는지.

...뭐, 이해가 안 가는 수준은 아니었다.

"저 사람이 결승 올라오겠네."
"그쵸? 저 첫경기 보고 바로 알았다니까요. 사실 예선 하이라이트 때부터-"

으, 듣기 싫어.

찬혁은 조잘거리는 무상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저스틴 결전대회. 이제 1군을 바라보는 팀 막내의 데뷔전으로 결정된 무대였다. 팀에 합류하기 이전부터 상위 랭크에서 일대일 실력을 인정받던 무상이었다.

찬혁과 팀 동료들은 높은 확률로 무상의 우승을 점쳤다. 저렇게 보여도   결전 서열 1위를 자랑하는 놈이었으니.

저번 시즌 리그에 합류한 TDC의 신인 선수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할 수 있는 대회이기도 했다. 일대일 대회이니 만큼  혼자만 관심을 독점하기에 좋은 구도가 아닌가.

무상도 관심이 많았는지, 대회가 참가 신청을 받는 시점부터 이미 들뜬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감독으로부터 대회 참가가 허용되자마자 신나게 날뛰며 팀원들에게 자랑을 해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하다.

'노르드라...'

그의 기억에는 없는 닉네임이다.

몇 시즌   랭크에서 활동중인 찬혁이다. 머릿속을 뒤져봐도 매치가 되는 유저가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부계정일 수도 있으니 닉네임을 모르겠는 건 납득할  있다. 그러나, 저렇게 독특한 빌드를 사용하는 유저라면 이름을 날려야 정상이다.

결전 대회에 저런 빌드를 들고 온 것도 여간 미친놈이 아닌데.

아, 여자니까 미친년인가.

어느새 2세트가 시작하기 직전이다. 해설진과 채팅창이 유난히 흥분 상태인 게 눈에 들어왔다. 노르드의 빌드가 변화한 탓이다.

생사의 갈림길, 사자의 춤, 폭주.

감탄사를 흘리는 무상의 옆에서, 찬혁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미친... 미친년이네 저거."

그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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