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51 - 맑은 물에 한 방울
<혜민>
오늘 8강 맞지? 8시 시작이니까 저녁 일찍 먹어. 늦게 먹다가 체하면 안 되잖아. 소화 잘 되는 걸로 챙겨 먹구, 또 대충 때우지 말고. 아니다. 그냥 내가 학교 끝나고 언니 집 찾아가서-
'괜찮아, 저녁 오므라이스 해먹을려고 재료도 다 사다놨어.
걱정안해도돼~ ^^'
안 와도 된다는 말을 곱게도 빚어 보낸다. 이것도 기술인지,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저번 음주 합방 이후로 툭하면 원룸에 찾아오겠다고 말하는 혜민이다. 심지어 주말에 한번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가기 귀찮아 한껏 담아온 소주가 냉장고에 남아있어서, 또 잔소리를 들었다. 무슨 자취방에 엄마가 찾아온 것도 아니고... 말이 잔소리지 싸늘하게 굳은 혜민의 얼굴을 마주한 상태라면 그건 정신적 고문에 가까웠다.
그게 걱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아니까 뭐라 불만을 토하기도 힘들더라. 저번처럼 같이 살겠다고 안하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라면에 계란을 풀었다. 뭐? 오므라이스?
계란만 들어가면 다 오므라이스지.
본선 8강이 코앞이다. 방송을 하지 않으니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밀어두었던 본선 경기를 모두 챙겨보기에도 충분했다.
굳이 설레발을 치며 결승전 상대방을 추측해보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대회 참가자 중 한명으로써 가지는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말해야 할까.
단순히 나이트폴 유저 중 한명으로써도 재밌는 경기가 많았다. 시간을 버리기 위해 엘튜브를 볼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지. 컴퓨터 책상 앞 조촐하게 차려놓은 밥상과 함께 보는 대회... 나름 훌륭한 밥 반찬 노릇을 하더라.
무상이라는 참가자가 단연 돋보였다. 저런 상대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 만으로도 내 대진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 거다. 유명 프로 팀의 2군 선수라고 설명하는 해설진의 발언 부터가 무겁게 다가왔다.
굳이 프로와 아마추어의 간격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을까. 게임을 업으로 삼는다는 건 단순한 겜창을 넘어선 영역에 있었다. 다행인 건 이게 그나마 결전 대회라는 점일 것이다.
온갖 전략적인 수가 튀어나오는 팀게임에 비하면 차라리 결전이 가능성이 높았다. 프로들이 쌓아올린 팀합을 넘어설 필요는 없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기는 했다. 내겐 당장 눈 앞에 닥친 8강전이 더 중요했으니.
4강으로 올라갈 가능성도 확신할 수 없는데 대진표 반대편에 프로가 있다고 걱정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다고.
당연히도 지금은 직면한 것에 집중해야 될 차례였다.
8강전의 상대의 닉네임은 군나르.
2미터가 넘는 글레이브를 사용하는 킹 랭크의 플레이어다.
본선 무대라는 게 늘 그렇듯, 쉬울 리가 없는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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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회색 갑옷에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왔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들에 긁힌 듯 난자된 모습이다.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땅을 딛고 선 기사의 모습은 초연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초목들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멈춰선 기사의 형상이 두드러지게 다가왔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에도 기사는 움직이지 않고 전방을 바라볼 뿐이었다.
기사와 함께, 굳건히 서서 하늘로 뻗은 글레이브가 예리하게 빛났다. 기사의 키를 가볍게 넘어선 모습이다.
기다란 장대 부분을 지나 머리 부분에 날카로운 칼날이 달린 형태였다. 칼날의 뒤로는, 역방향의 날이 갈고리처럼 튀어나왔다. 투박한 형상은 그 갈고리가 그저 예식을 위한 장식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누구든, 기사의 외형에서 백전노장의 노련함을 읽어내리라.
모든 걸 붉은 색으로 뒤덮는 노을 빛에도 투박한 회색빛은 물들지 않았다. 그동안 미동도 하지 않던 기사가 왼손을 뻗어 글레이브의 날을 쓸었다.
전투의 시작이 곧 다가옴을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그게 정답이라고 대답하듯이.
붉게 물든 지평선 건너편에서, 광전사가 모습을 보였다.
두 전사가 살기를 담아 무기를 휘두르는 순간에도, 철이 맞닿는 충돌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부우웅-
아래에서 위로, 공기를 뭉개듯 상반신을 노려오는 대검을 가벼운 스탭으로 피해내고.
곧바로 발목을 베어낼 것처럼 낮게 쓸어오는 날카로운 글레이브를 한걸음 물러나는 것으로 빗겨낸다.
전장을 울리는 강렬한 소음 따위는 없이, 한번의 죽음이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휘두른 글레이브를 회수하지 않고 그대로 회전한 기사가 연이어 공격을 이어나갔다. 원심력을 그대로 담아낸 글레이브가 어느새 허리춤까지 올라왔다. 직격한다면, 그대로 사람을 두동강낼 것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광전사는 물러나지 않았다.
발목을 향한 공격을 피해냄과 동시에 앞으로 돌진했다. 단번에 기사와 간격을 좁혔다. 대검을 붙잡은 오른손이 가슴까지 올라왔다. 날을 앞으로 세워 기사를 향해 찔러넣는 듯한 자세였다. 가공할 만한 힘이다.
들어올린 대검의 검신을 왼손으로 지탱할 때쯤, 회전을 마친 글레이브가 그대로 대검과 충돌했다.
쾅-!
빠르게 간격을 좁힌 덕분에 날이 아니라 자루와 부딪힌 대검이다. 광전사는 흔들릴뿐 무너지지 않았다. 글레이브의 자루와 맞닿은 대검을 그대로 붙잡고, 지탱한 왼손에 힘을 주며 미끄러지듯 기사를 향해 찔러넣는다.
한순간에 날카로운 대검의 첨단에 노출된 기사가 황급히 뒷걸음질 치며 몸을 뒤틀었다. 간신히 축을 돌리는데 성공했다. 섬뜩한 대검이 옆구리에 커다란 흔적을 남기며 지나갔다.
쉼호흡을 하고 다시 거리를 벌리려는 기사를, 광전사는 놓아주지 않는다.
어느새 광전사의 오른쪽 어깨에 걸쳐진 대검이 다시 날을 번뜩였다. 이번엔 위에서 아래로, 머리를 쪼개듯 내리치는 일격이었다.
비틀거리는 상태로 강격을 받아내지는 못할 터. 기사는 불안정한 자세로 뒤로 물러섰다. 계속해서 흉흉한 대검이 쇄도한다. 간발의 차로 스쳐지나간 대검이 흠집 가득한 갑옷에 또 하나의 상흔을 추가했다. 이대로면, 무너질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세를 뒤집기 위한 발판을 만들어야 했다.
물러서기만 하던 기사가 갑작스레 앞으로 뛰쳐나갔다. 광전사의 품으로 달려드는 모양새였다.
가까운 간격에서 대검을 쳐내고, 카운터를 이용해 상대를 밀어내기 위한 의도였다. 호흡 때문에 강공격 사이에 약공격을 섞어 넣는, 광전사의 패턴을 읽어낸 절묘한 플레이.
그러나 예상했던 광전사의 공격은 다가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돌연, 맹렬한 공세를 멈춘 광전사가 달려드는 기사에게 맞서듯 돌진했다.
병장기보다 박투가 더 용이할 지근거리였다. 기사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가까웠다. 대검을 쳐내기 위해 글레이브를 붙잡은 두 손이 할 일을 잃고 방황했다. 그때 기사의 어깨춤으로 향한 광전사의 왼손이 그대로 몸을 당겨왔다.
달려온 방향으로 강하게 당겨진 기사의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쏠렸다.
순간적으로, 광전사와 기사가 교차되며 지나간다.
균형을 바로잡은 기사가 뒤돌아서기 직전이다.
광전사의 대검은 이미 기사의 머리를 향해 날을 번뜩이고 있었다.
처형장의 길로틴이 떨어졌다.
노을을 대신해 붉은 핏물이 들판의 풀을 물들였다.
"노르드 선수가 1세트를 가져갑니다! 역시 첫 교전에서 연계기를 노린 군나르 선수의 플레이가 욕심이었던 걸까요?"
"그건 너무 결과론적인 해석이 아닐까 싶네요. 끝 사거리에서 펼쳐지는 글레이브의 연격은 파훼하기가 워낙 힘든 탓에 리스크 없는 플레이로 유명하니까요. 대부분의 유저들이 거리를 벌려 대응하는 걸 선호하고, 그걸로 주도권을 잡는 게 글레이브 운영의 정석입니다. 노르드 선수가 보여준 파훼법은 사실 리스크가 가득한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파고 들어 글레이브의 날을 피한다 해도, 창대 부분의 타격을 제때 흘려내지 못하면 타격을 입고 넉백 판정에 휘말리기 마련이니까요. 여기선 노르드 선수의 과감한 판단과 결단이 대단했다고 말씀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역시 공격성이 돋보이는 선수네요!"
해설을 듣고 있던 칼고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노르드의 승리가 기분 좋게 느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공격성' 운운하는 해설의 생각과는 다르게, 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결단을 내린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판단하고 움직였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치에게는 저게 자연스러운 플레이였겠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채팅창을 바라본다.
[와ㅋㅋ 이겼다고 좋아하는거봐라]
[노르드님 역시 잘하시네ㄷㄷ]
[입꼬리 못숨기죠?? 호감이 묻어나오죠??]
[칼고님ㅋㅋㅋ 넘좋아하셔]
[노르드님 멋졍...]
[칼고님은 못하는 플레이네요 ㄷㄷ]
[칼고였으면 이미 삼대떡으로 게임 터뜨렸을듯..노르드 수준ㅋㅋ]
자연스레 찌푸려지는 눈쌀을 억지로 억누른다.
어쩌다 자신의 클린한 채팅창이 이 모양이 되었는가.
처음엔 기존 채팅에 어울리듯 열심히 가면을 쓰더니, 지금에 와서는 대놓고 티를 내는 꼴이다. 칼고는 굳이 닉네임에 써있지 않더라도 저게 어디에서 찾아온 시청자인지를 구분할 수 있었다.
노르드, 죄다 노르드의 난민들이었다.
합방 이후로 눈에 띄게 시청자가 늘어났다. 평범하게 나이트폴을 플레이할 때도 묘하게 노르드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더니, 서서히 채팅창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주더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같은 저스틴 플랫폼을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방송마다 채팅창의 분위기나 밈은 다른 법이다. 노르드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녀가 풀어놓은 미꾸라지들이 칼고의 채팅 문화를 더럽혀 놓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칼고 방송의 시청자들은 자극이 강한 매콤한 맛에 빨리도 익숙해졌다. 칼고가 보기에 이미 절반 이상은 다 물들어버린 상태였다.
음주 상태로 합방을 해놓고, 대회를 핑계로 본인의 방송은 키지도 않는다니. 이건 대놓고 자신의 방송 시청자들한테 저기로 놀러가라는 뜻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노르드는 그러고도 일말의 악의도 보이지 않았다. 방송이 끝난 이후에도 낚시나 해보라며 피셔맨이라는 괴상한 게임을 선물해준 것은 경악할만한 행위였다.
그가 보기에 저 인간은 태생적인 악질이 분명했다. 어울리면 자연스레 휘말려버리는, 본인에게는 악의가 없으니 욕하기도 애매한 그런 인간.
저것들을 강퇴할 명분도 없고... 빌어먹을.
칼고는 그냥 대회로 시선을 돌렸다.
이중적인 마음이 동시에 생긴다.
자신을 탈락시켰으니 최대한 높은 곳까지 올라가 명예로운 패배를 시켜달라는 생각부터, 저 악랄한 여자가 빨리 떨어졌으면 하는 생각까지.
인간의 마음은 합리적이지 않은 법이다. 그로써도 본인이 어떤 걸 더 바라고 있는지 확신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관전만 하는 것이다. 이미 물들어버린 자신의 채팅창을 허탈하게 쳐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