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3화 〉53 - 도와줘 (53/243)



〈 53화 〉53 - 도와줘

"인터뷰요?"

"네. 4강전부터는 승자 인터뷰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세트 별로 하는 건 아니구요. 결승 진출하시면 하게 될 거예요. 베타코트에서 진행될 텐데, 채널 주소는 따로 보내드릴 거구요."

아, 승자 인터뷰.

"다른 건  없나요?"

"네, 대회는 말씀드린 대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시작 30분 전에 자리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는  드문 일이다. 드문 일은 대개 경계심을 돋구는 법이고. 그러니 내가 기분 좋게 핸드폰을 들어올렸을 리가 없었다.

전화를 걸어올 사람도 없지 않은가. 최근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은 혜민이 뿐이니, 간만에 느낀 불쾌감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연락한 건 대회 주최측이었다. 4강 진출자들에게는 베타코드가 아니라 전화로 정보를 전달하는 모양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가벼운 일이라 다행이었다.

승자 인터뷰.

내가 정말 4강까지 올라오긴 했구나.

당연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일이다.

이제와 긴장감이 찾아온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온라인 대회이기 때문일까. 대회 공식 방송을 꺼버리면 모든 관중들이 일제히 사라지니, 솔직히 말하면 그리 현실감이 느껴지지는 않더라.

아직도  머릿속에서 대회라는  경기장에서 진행된다는 이미지가 남아있었다. 왜, 경기 시작  하나 둘 셋을 외치고 다같이 응원하는 팀이나 선수의 이름을 외치는-

너무 오래됐나.

인터뷰는 하기 힘들  같은데. 결승전에 진출한 내 모습을 상상하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뭔가 있어선 안될 자리에 서있는 듯한 기분.

결전 대회는 여전히 시원시원한 속도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상대는 물론이고, 4강전 매치업이 이미 모두 확정이 났다. 이 속도라면 결승전이 끝나는 것도 금방이겠지.

그러니 대회를 준비하는 것 외의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모니터 속, 클레이모어를 휘두르는 전사의 모습을 보며 나는 고민에 빠지는 것이다.


내 4강 상대였다. 예선전을 포함해서 대검을 사용하는 상대는 처음이다. 예전 같았으면 동질감이라도 느꼈을 것 같은데, 플레이하는 걸 지켜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더라.

모션을 캔슬하고 발을 휘적휘적. 대검을 들고 한다는 게...
경박하기 짝이 없다. 저런 잔바리한테 지고 싶지 않아.

무기의 간격이라도 재보는 게 좋을까.

나도 모르게 베타코드로 손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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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Nord:도와줘 칼고에몽.

...이게 뭐지.

마우스가 바탕화면의 빈 공간에서 방황했다. 닉네임을 잘못 봤나.

잠깐 생각이 멈춘 칼고가 키보드로 손을 옮겼다.

칼고:또 한잔 하셨어요?

Nord:^^??
Nord:피셔맨 하셨나요?

아, 또  소리.

합방 이후, 서로에게 영상을 보내는 과정에서 메세지를 나눌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왔던 말이다.

'피셔맨 하셨나요?' 이건  무슨 해괴한 집착인가. 선물 받은 게임이니 한번 플레이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노르드의 저 반복된 권유에 내심 반발심이 생기는 것이다.

결국 칼고는 아직 피셔맨을 설치하지도 않았다.

칼고:ㅎㅎ;

Nord:ㅡ,,ㅡ
Nord: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왜 저 여자는 이리도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지. 부탁이라는 한마디에도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잠깐 망설인 칼고가 답장을 보냈다.


칼고:들어는 볼게요.

Nord:저 대회 연습 좀 도와주실  있나 해서요.

칼고:4강이요? 위고님이 상대였나

Nord:네 클레이모어예요.

이건 또, 의외의 부탁이라고 해야 할까.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4강 경기를 앞둔 전날이다. 위고 수준의 숙련도를 가진 상대를 요구한다기 보다, 같은 무기를 맞대며 준비를 마무리하는 단계에 가깝겠지. 요컨대 노르드는 가벼운 스파링 상대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의외인 점은, 그걸 굳이 자신에게 부탁했다는 것일까.

이런  보통 길드원에게 부탁하는- 아, 한달  뉴비라는 컨셉이었나, 저 사람.

생각에 빠져 잠깐 대답을 망설였다. 그게 답답했는지, 노르드가 먼저 메세지를 덧붙인다.

Nord:도와주시면 피셔맨 dlc 선물드릴게요.
Nord:신규 낚싯대도 있음 이거 쩔어요.

...

칼고:그건 됐구요; 그냥 도와드릴게요.


"아, 아. 들리세요?"

"네. 잘 들려요. 방송 진짜 키셔도 되는데."

"그래도 대회 준비하는 건데 방송하면 좀 그렇죠. 오늘 어차피 휴방 날이기도 하고... 영상 촬영만 해둘게요. 아마 대회 끝난 다음에 편집해서 올라가든가  거에요."

칼고는 스스로를 염치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방송 각을 본답시고 내일 대회 4강전을 치르는 사람의 연습을 그대로 노출시킬 생각은 없었다.

노르드 본인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그건 그의 상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몰래 준비한 전략이나 빌드 따위가 밝혀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4강이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칼고는 묵묵히 빌드를 확인했다. 노르드의 4강전 상대인, 위고가 대회에 제출한 기본 빌드.

일반 랭크에서 사용되는 클레이모어 빌드와 다른 점이 눈에 들어온다. 신속한 정비 특성을 중심으로 모션의 딜레이를 줄이기 위한 특성에 투자를 많이 했다. 기발하다거나 예상을 벗어난 수준은 아니었다.

동작이 느린 대검이니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봐야겠지.

발차기와 대쉬를 자주 섞으며 모션 딜레이를 최대한으로 줄이려는, 위고의 플레이를 생각하면 더더욱 와닿는 특성이다.

무기는 양손검 중에서도 꽤나 대중적인 클레이모어. 손잡이를 포함한 전체 길이가 170cm에 육박하는, 표준보다 긴 세팅이었다. 이 정도면 노르드가 사용하는 츠바이핸더와 비교했을 때도 밀리지 않았다.

칼고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대검을 사용하는 숙련도에 있어서는 노르드나 위고 같은 대가들에 비해 확연히 밀린다고 인정했다.

위고의 플레이를 제대로 재현하기는 힘들 터였다.

손을 푸는 정도는 될까.

"일단 위고님 빌드 그대로 가져왔는데. 뭐 바꿔드릴  있나요?"

"아뇨. 그대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간격 잡는 거 중점으로 갈려구요."

간격이라.

상대할 때도 느꼈지만 노르드라는 유저는 무기마다 존재하는 사거리에 굉장히 충실했다. 하기야, 패링이니 연계기니 하는 고급 기술에 눈이 멀어서 그렇지 나이트폴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간격일지도 몰랐다. 자신만 하더라도 그 철저한 거리 조절에 패배했으니까.

문득 자신을 떨어뜨리고 올라간 상대방을 돕고 있다는 사실에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승부욕이 강한 그로써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분한 마음에 대회도 보지 않고 개인 방송에 몰두했을 텐데.

어쩌면 자신도, 노르드라는 예상 밖의 존재가 대회의 정상에 서는 걸 기대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노르드가 임의대로 설정한 일대일 매치였다. 붉은 평원은 불어오는 바람도 없이 고요했다.
리스폰 위치를 조정해둔 것인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노르드는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말했던 것처럼 특별히 전략적인 수를 준비한 것 같지는 않았다.

"논스톱으로 실전처럼 갈까요?"

"네.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간결한 의사소통을 끝으로, 두 사람이 동시에 대검을 휘둘렀다.





"...그거 대회에서 쓰실 거예요?"

"1세트만요. 너무 노골적이라 의식하기 싫어도 해야  걸요."

"그건 맞는데- 한번 삐끗하면 골로 가는  똑같잖아요. 그냥 약공격 유도하다가 한방 노리는 게 낫지 않나."

"2세트까지 생각하면 이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상대 대처랑 상관 없이 제 플레이에 달려 있기도 하고. 저는 이게 더 마음이 편하네요."

"눈치 채면 아마 캔슬 엄청 섞을 겁니다. 본선 영상 보셨겠지만 그 사람 원래부터 공격 배합 난잡하기로 유명해요. 손보다 발이 빠르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

"발차기는 흘리면 되죠."

얼씨구.

잠깐 대검이 맞닿은 상태에서 나눈 대화였다. 태연하게 터무니 없는 말을 내뱉는 노르드에게 심술이 뻗쳤다.

바로 뒤로 몸을 빼는 척 대치 구도를 깨뜨렸다. 무기에 힘을 준 탓에 균형이 앞으로 쏠린 상대에게, 대검을 내리치는 척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노르드라면 당연히 반응하겠지.

예상한 대로. 균형을 잡으며 대검을 바로 잡는 광전사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미 선입력한 커맨드에 따라 칼고는 치켜들었던 대검을 자신의 오른쪽 어깨춤으로 걸쳐 내렸다. 그러고는 대검을 막기 위해 무기를 들어올린 광전사에게 발을 내질렀다.

복부를 향해 흉흉하게 내지른 발차기가, 애꿎은 공기를 후려치며 지나갔다.

...흘렸다, 정말로.

"뭐... 읽었어요?"

"발차기는 흘리면 된다니까요."

그게 그렇게 쉬우면 씨벌 위고가 4강에 올라왔겠냐고.

턱 끝까지 차오른 욕설을 간신히 집어삼킨 칼고가 말을 이었다.

"그러다 한대라도 맞아서 넉백되면 바로 대검에 머리 찍힌다니까요? 매치 끝날때까지 발차기 흘릴 건 아니잖아요."

"흘리거나 슈퍼아머 판정으로 씹으면 되잖아요."

"노르드님 빌드에 슈퍼아머 판정이 어딨는데요."

"이거 내려치기하려고 대검 들어올릴 때 기본으로 있는 건데..."

"씨- 그걸 노리고 쓴다구요? 차라리 특성 세 개 돌려서 카운터에 투자하고 하세요. 그거 노리다가 엇박자 당하면 그대로 세트 하나 날리는 건데."

"...그럼 저도 엇박자로 보고 쓰면 되는데."

"무슨 초딩도 아니고 계속 억지를 부립니까."

"억지 아니라구요. 나이도 칼고님보다 제가 훨씬 많고."

"뭐요? 목소리만 들어도 어려보이는데- 노르드님 몇 살인데요?"

"저... 서, 스물 둘이요."

"하, 저 스물 여섯입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간만에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한 걸까. 칼고의 입에서 전형적인 꼰대의 레파토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직 서른 둘. 졸지에 이십 대 중반의 동생 뻘에게 직장 상사의 편린을 느낀 노르드는 머리를 부여 잡았다.


나이가 어려져서 손해를 보는 일도 생기는 구나. 어디다 억울함을 토해낼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대회 4강,  하루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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