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54 -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일부러 계속 붙는 거라구요?"
"네.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구요. 세트 끝나고 떠올리게 하려면 그만큼 노골적으로 해야 되는데, 대치 구도로 시간 끌리면 경기 중에 눈치챌 수도 있어요."
"눈치고 나발이고. 인파이트로 들어가면 피곤해지는 건 노르드님도 똑같을 거 같은데요. 무조건 판정 우월한 발차기로 계속 간 볼 거예요. 몇 번은 반응한다 쳐도 결국 이득보는 건 상대 쪽이죠. 그냥 저랑 했을 때처럼 거리 내주고 카운터 보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쓰읍... 대검 감수성이 너무 부족하시네."
"그딴 감수성 필요 없는데요."
"아니, 간 볼 거면 누가 대검 해요? 차라리 부러지고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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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히는 쪽은 부러진다.
다시 한번, 각반을 두른 다리가 광전사의 복부를 스치듯 지나갔다. 발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튼 광전사가 그대로 대검을 휘둘렀다.
흉흉하게 쇄도하는 대검에도 마주선 상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물소의 뿔처럼 좌우로 솟아오른 투구를 쓴 전사였다. 오히려 한걸음 전진하며 어깨에 걸친 대검을 내리찍었다. 묵직한 철덩어리가 굉음을 내며 충돌한다.
쾅-!
충격이 서로의 몸을 뒤흔들었다. 내리친 덕에 중력의 도움을 받은 클레이모어가 힘 싸움에서 우위에 섰다. 자신과 맞서는 육중한 대검을 밀어내며, 광전사에게 날을 번뜩였다.
거기에 위협을 느꼈을까. 순간적으로 무기를 잡은 손에서 힘을 뺀 광전사가 대검을 품으로 잡아당기며 뒤로 물러섰다.
공세를 잡은 전사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광전사가 물러섬과 동시에, 오른발로 땅을 강하게 박차며 전진한다.
상대를 잃고 땅으로 내려앉은 대검을 양손으로 붙잡아 들어올렸다. 이번엔 역으로, 아래에서 위로 적의 상반신을 가로지르는 궤적이었다.
그 순간이다.
물러서던 광전사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상반신으로 올라오는 클레이모어를 자신의 대검으로 찍어누르며 접근했다. 올려치는 타이밍을 노린 정확한 패링이다.
철과 철이 마찰하며 불꽃을 튀기는 와중에, 한걸음 더 전진한 광전사의 왼손이 뿔 달린 투구를 향해 쇄도한다.
가시 달린 건틀릿이 머리를 가격하기 직전, 양손으로 쥔 전사의 대검이 광전사의 대검을 밀어올렸다. 대치하던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서로의 몸이 교차되며 지나간다. 광전사가 내지른 주먹이 엇나가 투구의 뿔을 가격했다.
충격에 의해 몸이 비틀거리는 와중, 대검을 바로잡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서로의 선택이 엇갈렸다. 대검을 어깨춤으로 잡아당기며 내려찍기를 준비하는 광전사와 달리, 뿔 투구를 쓴 전사는 곧장 발을 뻗어왔다.
광전사를 걷어차 균형을 무너뜨린 직후 결정타를 날리려는 의도였다.
전사의 발이 정확히 복부를 가격했다. 그 찰나, 어깨춤의 대검을 머리까지 들어올린 광전사는 흔들리지 않았다.
전사의 발을 그대로 받아내며, 한껏 힘이 실린 일격을 내리찍는다.
육중한 대검이 투구의 오른쪽 뿔과 함께 어깨뼈를 짖뭉개며 상반신을 가로질렀다. 사방으로 핏물과 살점이 비산했다. 한 차례 대검을 제 품으로 잡아당긴 광전사가 곧장 적의 가슴을 향해 쇠 말뚝을 꽂아넣는다.
퍼억-
뼈와 살이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용맹한 전사가 결국 무릎을 꿇었다.
"씨발..."
좀 치네.
모니터의 흑백 화면이 평소보다 길게 느껴졌다. 위고에게도 익숙한 방식의 처형이었다.
흉부에 대검을 박아넣는 피니쉬. 그 호쾌함 때문에 그도 즐겨 사용하는 모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불쾌한 마무리다.
위고는 빠르게 결판난 1세트를 다시 복기했다. 속전속결은 예견돼 있던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답답하게 무기나 몇 번 투닥거리며 대치하려는 생각으로 선택한 무기가 아니었다.
정면으로부터 적을 박살내는 강렬함, 투핸디드란 그런 것이었으니.
같은 무기군 대결에서 밀리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나이트폴 경력만 몇 년이던가. 그 중 대부분이 양손검과 함께였다.
거기다 노르드의 빌드를 보면 상성 상 우위를 가져가는 건 자신이었다. 캔슬에 용이한 특성에 투자하여 일대일 매치에서 강점을 갖는 자신의 빌드와 달리, 상대는 결전에 특화되지도 않은 빌드였으니.
방심을 하지도 않았건만.
과감한 카운터에 그대로 낚였다. 우선권이 중요했던 상황에서 강공격을 선택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마 발차기를 읽고 노린 공격이겠지. 노림수에 완벽히 당했다. 순수하게 실력에서 밀려 패배한 것이다.
한번의 패배로 의식해야 될 게 너무나 많아졌다.
첫 충돌부터 노골적으로 패링을 시도해오더니, 발차기를 노린 카운터까지. 이제 무작정 모션을 끊으며 발차기를 연타하기도 힘들었다.
주로 사용하던 패턴 하나에 제약이 걸린 셈이다.
이제, 변화를 줘야 하는 쪽은 자신이었으나-
쉽게 굽힐 거였으면 애초에 대검을 들지 않았겠지.
위고는 그저 이를 악물었다.
두 번째 전장이다.
위고는 제 피를 한번 머금은 붉은 땅을 즈려밟고 섰다.
익숙한 전장에서 이전과 같은 구도로 달려오는 광전사가 보였다. 기시감이 피어오른다. 가슴을 꿰뚫었던 츠바이핸더가 눈에 아른거렸다.
이번엔, 피를 먹는 건 자신의 검이 되리라.
다시 검을 맞대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가 간격에 들어온 순간이다. 이전처럼 곧장 대검을 내리치는 광전사와 달리, 패배를 맞본 위고는 회피를 선택했다.
익숙한 동작. 어깨춤에서부터 간결하게 상대를 내리찍는 일격이다. 뒤로 물러서지 않고, 우측으로 스탭을 밟은 위고가 대검을 가볍게 피해냈다.
곧장 다리를 뻗는다.
퍽-
빈틈을 포착한 발차기가 정타로 들어갔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복부를 타격당한 광전사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위고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손잡이를 꽉 붙잡은 오른손과 달리, 위고의 왼손은 기다란 검신의 중간을 붙잡았다. 휘두르는 반경은 좁아지되 이어지는 공격은 무섭게 빨랐다.
발에 차여 물러난 광전사에게 대검을 찔러 넣었다.
빈틈을 찔린 탓에 온전히 피해내지 못했다. 짧게 잡은 위고의 클레이모어가 적의 허리춤을 훑고 지나갔다. 살점을 가르지는 못했으나, 갑옷이 우그러지는 타격을 입혔다. 광전사의 입에서 얕은 침음성이 흘러나온다.
연이어 추격이 가능하지 않을까. 명백한 유효타를 성공시킨 위고가 양손으로 손잡이를 바로 잡았다.
찔러 넣었던 대검을 후방으로 잡아당긴다. 그대로 횡베기를 이어나가려는 모습이다.
찰나의 순간, 위고의 등줄기를 타고 한줄기의 소름이 스쳐 지나가고.
곧장 공격을 취소한 위고가 한걸음 물러나 광전사의 간격에서 벗어났다.
어느새 자세를 바로 잡은 광전사가 허리춤에서부터 츠바이핸더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반격을 당할 구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히, 공격을 이어나갔으면 위험에 처한 것은 자신이었으리라.
아마 패링을 노렸겠지.
벌어진 거리에서 위고도 다시 대검을 어깨춤으로 걸쳐 올렸다. 왼손과 두발이 용이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자세였다.
이번에도 먼저 움직인 쪽은 광전사였다. 양손으로 붙잡은 대검을 땅으로 늘어뜨린 채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째에 휘두를 준비를 마쳤다. 한껏 뒤로 젖혀진 대검이 붉은 빛을 반사하며 제 존재감을 뽐냈다. 좌우 공간을 모두 휩쓸 만큼 예비 동작이 큰 움직임이었다.
마냥 지켜보지 않고 맞서 접근한 위고가 어깨에 걸쳐둔 대검을 빠르게 내리그었다. 광전사의 대검이 다가오기 전이었다.
공격의 전조가 거짓이었다는 듯, 자연스레 대검을 다시 내린 광전사가 옆으로 몸을 틀었다. 불과 한 뼘 차이로 대검을 흘려 보냈다. 첫 교전에서 위고가 보여준 회피 동작과 흡사했다.
적의 다음 움직임을 막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을 뻗으려던 위고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물러선 위고의 눈에 대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광전사의 모습이 비쳤다.
노림수가 실패했음에도 광전사는 무심히 대검을 내릴 뿐이었다. 자연스레, 대검에 꿰뚫렸던 섬뜩한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과거의 기억 따위에 발목을 잡힐 수는 없었다. 독기를 가득 품은 전사가 다시 땅을 박찼다.
무거운 철과 철이 충돌하며 발생한 소음이 붉은 평야에 울려퍼졌다.
서로 한번씩 회피를 내준 탓이다. 당했던 패턴에 다시 당하는 미숙함은 두 전사와 거리가 멀었다. 수를 교환한 이후로, 대검의 궤적은 쉽게 피해내지 못할 정도로 정교해졌다.
피할 수 없게 공간 자체를 점유해오는 대검에 맞설 수 있는 건 같은 대검 뿐이었으니.
상하좌우 사방에서 검과 검이 맞닿았다.
서로의 간격에 들어온 채로, 둘 중 누구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중간 중간 미처 막아내지 못한 검격이 곳곳에 상처를 남겼다. 강철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음 사이로 피와 살점이 더해졌다.
붉은 노을이 짙어질수록, 핏발 선 광전사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그에 호응하듯 대검이 가속한다.
허리춤을 쓸어오는 일격. 바로 반응한 위고의 대검이 그에 맞섰다. 또 한번 굉음이 퍼져나감과 동시에, 어느새 접근한 광전사가 왼손으로 위고를 잡아끌었다.
순간적으로 광전사의 움직임을 놓친 탓이다. 균형을 잃은 위고의 자세가 무너졌다. 피를 먹은 대검이 무서운 기세로 쫓아왔다. 비틀거리는 상태로 간신히 일격을 막아낸 위고에게 쉴 틈을 내주지 않는다.
쏟아지는 연격.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위고의 몸이 눈에 띄게 휘청거렸다. 한번 움직임을 놓친 순간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미친듯이 대검을 휘두르는 광전사의 몸 곳곳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격렬한 움직임에 핏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마치 광전사를 중심으로 핏빛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또 한번. 검신을 부여잡고 짧게 후려친 일격이다. 그걸 간신히 받아친 위고가 이를 악물고 발을 뻗었다. 참고 참다, 스태미나가 다 떨어져가는 최후의 순간에 내뻗은 발차기였다.
미친 것처럼 대검을 내리치던 광전사가, 거짓말 같이 공격을 멈추곤 몸을 비틀었다.
자연스럽게 발을 흘려낸 것이다.
허탈한 웃음이 위고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다시 한 번, 그의 머리 위로 무자비한 대검이 떨어졌다.
"아, 그러니까 흘리면 된다고."
화면 밖에서 혜진이 읊조리듯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