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6화 〉56 - 숨지 말고 싸워라 (56/243)



〈 56화 〉56 - 숨지 말고 싸워라

무상은 게임을 좋아했다.

프로게이머에게 게임을 좋아하냐 묻는 게 얼마나 어색한 일일까. 프로 중 누군가는 피를 쏟을 만큼 노력한 끝에 게임에 대한 모든 애정을 잃어버렸을지 모르지만, 그건 이제 프로 세계의 게임을 접하기 시작한 무상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반대라고 봐도 되겠지.

게임이 업이 되어버린 지금도 무상은 게임을 좋아했다.

이제는 친한 형이 되어버린 팀의 베테랑 선수가, 밤새 게임에 몰두하는 무상을 보고 질린 눈초리를 보내올 만큼.

화질이 깨져버린 과거 나이트폴 리그의 명경기를 몇 번이나 다시 찾아볼 만큼.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서 개최되는, 결전 대회에 참가하고 대부분의 경기를 시청할 만큼.

애정하는 만큼 몰두한 결과일까.
그의 실력은 놀랍도록 빠르게 발전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한 재능이 있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었다.

게임에 있어서, 무상은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남들이 어려워하는 조작이 그의 손에서 상상한 대로 펼쳐졌다. 남들이 벽을 느낀다는 구간이 그에게는 잘 트인 대로와 다를 바 없었다. 남들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상성도 무상의 앞에선 뒤집힌 결과로 나타났다.

무상이 나이트폴을 접하고 킹 랭크에 도달하기 까지는  1년이 걸리지 않았다.

프로의 길에 들어선 건, 필연이었겠지.

무상은 모니터 너머 거대한 대검을 거머쥔 광전사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나이트폴 유저는 시기의 대상이 아니었다.

질투라는  같은 트랙 위를 달리는 상대에게 향하는 감정이다. 하늘을 나는 새가 지상에서 치열하게 속도를 경쟁하는 네발 짐승을 바라보며, 열등감을 느낄 일은 없는 것이다.

자신이 참가하는 결전 대회를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경기를 펼치고, 누가 결승에 올라오더라도- 결국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 될 거라는 확신.

확신이 깨진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게임이 시작되기 직전이다. 이번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출발하는 모양이다. 시야에 들어온 광전사의 모습이 뚜렷했다. 역방향으로 난  개의 뿔이 인상적이다. 회색 빛의 빛바랜 갑옷에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왔다. 커다란 덩치에 버금가는 거대한 대검이 붉게 빛났다.

뚫어질듯 쳐다보는 무상의 시선에도 광전사는 태연히 검신을 훑고 있을 뿐이었다.

대회를 지켜볼 때면 항상 귓가에 걸려 있던 무상의 입꼬리가 제자리를 찾아간지 오래였다. 눈에 띄게 굳은 표정이다. 같은 팀 소속의 찬혁이 봤다면 심각한 문제라도 생겼나 물어봤을 것이다.

공식 대회 채널에서 경기 시작을 알리는 웅장한 배경음이 흘러나왔다.

세트 스코어 1  0.

광전사의 승리에서 이어지는, 두 번째 세트였다.



부웅-

베어낼 상대를 포착하지 못한 대검이 허공을 스치고 지나갔다. 매끄럽게 회피에 성공한 무상의 눈이 번뜩였다. 또 한 번의 빈틈이다.

머리로 판단을 내리기도 전, 자연스레 움직인 양손이 검의 손잡이를 부여잡고 들어올렸다. 칼 끝이 광전사의 가슴을 향했다.

한 발자국 걸어가 검을 뻗으면, 닿을 수밖에 없는 빈틈.

언제나 무상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확신이다. 그는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결단을 내렸다.

가볍게 나아간 다리가 땅을 밀어냈다. 광전사와의 거리가 한 호흡에 좁혀졌다. 시야에 비친 광전사는 흉부로 향하는 칼날을 막아내기 위해 황급히 대검을 회수하는 모습이었다.

이미  읽기를 마친 무상이 공격을 멈추고 자세를 바꿨다.

대검과 비교했을  짧은 형태의 아밍소드다. 검을 쥔 양손이 자연스럽게 내려갔다. 광전사를 향하던 칼 끝이 순식간에 땅을 바라본다. 밑으로 내리깐 검을 뒤로 당겼다. 그 즉시, 상체를 함께 낮춘 무상이 적의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일련의 과정이 광전사가 제 품으로 대검을 잡아당긴 순간에 이루어졌다. 움직임 사이 사이의 모든 동작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눈으로 보고 대응하기 힘들 만큼.

챙-

그 일격을, 광전사는 다시 한 번 받아냈다.

어느샌가 내리깐 대검의 검신이 다리를 대신해 무상의 검을 막아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이 튕겨져 나갔다. 얕은 패링. 조금만 더 정확했으면 자세가 무너지는 건 무상이 될 뻔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파생 동작을 지워낸다. 무상은 뒤로 물러섰다. 분명 자신이 유리한 근접거리였음에도.

연계 공격의 첫 수가 막히는 장면에서 1세트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이어지는 자신의 공격을 거듭 막아내고, 페이크를 섞었음에도 정확히 카운터를 노려오던  기묘한 대검이.

오랫동안 믿어왔던 확신이 깨지는 순간. 밀려오는 당혹감은 곧 불신으로 변화한다.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공격이 저 광전사를 베어낼  있을지를.

대체 어떻게 모든 수를 읽어내는 건지.

구도가 낯설게 느껴졌다.


본래 무상이 거리를 좁힌 순간 수 싸움과 심리전에서 우위를 가져가는 건 그여야만 했다. 그걸 위한 빌드였다. 상대의 움직임을 온전히 파악하기도 힘든 지근거리에서, 다양한 파생 동작을 전부 보고 대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하물며 동작이 느린 츠바이핸더라면. 대처하기 위해서는 모든 공격 수를 읽어내던가, 아니면 말그대로 보는 즉시 반응하는- 정도를 넘어선 반응속도를 가지고 대응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쪽이나 고려할 필요가 없는 변수였을 터.

불현듯 느껴본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었다.

광전사는 정신을 추스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저돌적으로 달려든다. 거대한 무기에 힘을 한껏 담아 휘두르는 모션이다. 공격에 거리낌이 없었다. 빈틈이 만들어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내가, 반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지-.

무상의 얼굴이 굳었다.

부웅-

허리춤을 향한 횡베기가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이전과 같았다. 회피를 상정하지 않는 것 같은 강공격. 딜레이가 큰 탓에 파고들기 쉬운, 허술한 공격이다.

이젠 인정해야 했다. 저건 일부러 내어준 틈이다. 그 방법이 무엇이든, 노르드는 무상의 장기인 연계기를 모두 받아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걸 애써 부인해왔던 건, 그 못난 자존심 때문이었겠지.

노골적인 빈틈을 향해 무상이 다시금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검을 들어올리고, 칼 끝이 광전사를 향해 찔러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빠르게 쇄도한 무상의 검이 광전사의 왼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지막 순간 몸을 뒤튼 탓에 목표했던 곳을 관통하지는 못했다.

이어지는 연계 동작 따위는 없었다. 칼을 찌른 직후 무상은 광전사의 간격에서 바로 물러났다. 살갗을 스친 칼날에 작은 핏방울이 맺힌  했다. 아주 작은 성과였다.

그깟 자존심 때문에 승리하지 못한다면, 포기하면 그만이 아닌가. 연계기가 통하지 않는다면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면 그만이다. 히트  런. 움직임이 둔한 상대의 빈틈을 노려서 치고 빠지면 된다.

고집을 버려라. 결국 중요한  이기는  뿐이니까.

무상이 이를 악물었다.

몸을 스치고 지나간 검날이 허공에 붉은 잔상을 남겼다. 피를 흘린 광전사가 분에 찬듯 대검을 휘둘렀다. 투박한 검신이 아직까지도 회백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피를 먹지 못한 것이다.

광전사를 베어내고 거리를 벌린 무상이 검신의 홈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털어냈다. 이전보다 조금 더 멀리 떨어졌다. 광전사의 폭주를 의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몸 곳곳에서 피를 흘리는 광전사와 달리, 흙먼지가 달라 붙었을 뿐이다. 무상은 노출된 머리와 팔을 가볍게 뒤흔들었다.

몇 분째의 공방인가. 둔한 움직임을 노리고 치고 빠지며 여러 상흔을 남겼다. 마치 커다란 짐승을 사냥하는 과정과 같았다.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사냥감의 피를 빼서 죽이는.

지친 사냥감이 최후의 발악을 시도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대검을 들고 피를 흘리며  있는 광전사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돌았다. 미묘한 거리였다. 전력으로 달려들면 대검의  끝이 닿을까. 숙련된 전사도 확신하기가 힘들만한 거리.

몇 번이고 반복된 장면이다. 자랑하는 연계를 포기한 검사는, 무섭도록 집요했다. 굳어진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아마 목표한 사냥감의 숨통을 끊어놓기 전까지는 풀리지 않겠지.

광전사의 몸을 타고 핏물이 흘러내렸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흘러내리는 것과 같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조용한 독촉이다.

또 다시 움직임을 강요받는다.

광전사가 땅을 박찼다. 붉은 평야 위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한층  빠른 움직임으로 무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대검의 사거리를 이용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무상이 뒤로 물러설 것을 예상했기 때문인가.

어깨춤에 걸쳐진 대검이 날을 번뜩였다. 뒤로 빠지는 무상의 움직임 보다 앞으로 달려드는 광전사가  빨랐다.

검의 궤적에 들어온 순간이다.

무상이 대검을 흘려내기 위해 측면으로 스탭을 밟았다. 페이크 모션을 의식해, 대검의 끝이 움직이는 것까지 확인하고 시도한 회피였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흘려낸 무상이 오른손에 쥔 검을 들어올렸다. 반격을 위한 움직임이었다.

그때 대검을 내리쳤던 광전사가 그대로 무상에게 돌진했다.

몸과 몸이 충돌한다. 달려드는 기세와 중량에 의해 중심을 잃은 무상이 후방으로 쓰러졌다. 검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땅을 짚었다. 빠르게 균형을 회복했다. 갑작스런 기습에도 여전히 냉정함을 잃지 않은 모습이다.

제대로 된 차징이 아니었다. 공격을 내지른 상태로, 반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 억지로 선택한 것이다. 균형을 잃은 건 피차 마찬가지일 터. 다시 자세를 갖추는 건 무장이 가벼운 무상이 될 확률이 높았다. 광전사의 선택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악수에 가까웠다.

판단을 마친 무상이 다시 일어선 순간이다.

정면에서, 광전사가 다시 돌진했다.

쾅-!

자세를 잡지도 않았다. 엉성하게 대검을 들어올린 채,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전진했다. 간신히 타이밍 맞게 들어올린 검이 대검과 맞닿았다.

충돌한 건 무기 뿐만이 아니다. 엉망진창으로 밀고 들어온 탓에 몸 곳곳이 엉키듯 부딪혔다. 중량에 밀려난 무상이 간신히 균형을 바로 잡았다. 넘어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했기 때문인지. 광전사의 몸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더 짙게 느껴졌다.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핏발이 가득 선, 짐승의 눈동자.

광전사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지금까지처럼 뒤로 물러나선  된다. 이미 빈사 상태에 돌입했다. 출혈로 얌전히 죽어주기를 기다리는 건 하책이었다. 본선에서 죽음을 목전에  광전사가 얼마나 많은 상대를 베어넘겼나.

받아쳐야 했다. 기력을 모두 토해낸 광전사가 쓰러질 때까지.

대검에 실린 힘이 점점 더 강해졌다. 맞서고 있던 검이 밀려나 대검이 몸에 닿기 전. 무상이 먼저 힘을 빼고 물러났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 광전사가 날뛰기 시작한다.

육중한 대검이 공간을 가르며 휘몰아쳤다. 회피나 카운터 따위를 고려하지 않는 움직임이다. 그러나 무상도 감히 역공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빈틈을 찾아 칼을 찔러넣는 순간, 광전사의 대검도 목을 노려오리라.

숨 고를 시간 따위는 없었다.

좌측 상단. 상반신을 대각선으로 내리치는 일격이다. 정면에서 받아치면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양손으로 붙잡은 검으로 막아서되 정확한 타이밍으로 흘려내야 한다.

챙-!

우측 중단. 기세가 꺾이지 않는다. 몸을 양단할 것 같은 강렬한 횡베기. 검을 세운 무상이 충격에 대비한다.


잠깐의 정적에 숨이 막혔다.

챙-!

뒤늦게 부딪힌 검 사이에서 불똥이 튀는  했다. 엇박자. 폭주하는 와중에도 공격은 변칙적이었다. 대검을 곧장 휘두르지 않고  걸음 전진하면서 공격했다. 타이밍은 물론이고 타점도 변화했다. 조금만 늦게 반응했으면 흘려내는데 실패한 무상이 검을 놓쳤으리라.

좌측. 다시 좌측. 우측. 이번엔 다리인가?

어설프게 판단하려는 생각을 멈췄다. 생각보다 몸이 반응하는 게 빨랐다. 시야의 끝에서 회백색이 번쩍거리는 것에 따라, 대검이 공기를 가르고 다가오는 소리에 따라. 맹렬한 난타 속에서 검과 함께 몸이 깎여나갔다. 대검이 쇄도하는 방향에 따라 갈대처럼 몸이 휘청거렸다.


마치 광풍에 맞서는 듯 했다. 비산하는 핏방울과 검격 속에서, 홀로 바람을 견디는 검이 비명을 질렀다.

숨을 들이마쉬고 내쉬는 것 조차 버겁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목을 조여왔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점차 죽음이 다가오는 것 같은 환시가 나타날 쯤이었다.

광풍이 멎었다.

힘을 잃고 쓰러지는 짐승을 보며, 무상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고단한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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