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58 - 명예를 위해
전략이고 뭐고, 전투 전에 짜올리는 거창한 설계는 사실 대회에서나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전략적인 수가 게임의 구도를 뒤바꿀 수 있었으니까. 다전제에서 머리 쓰는 일의 중요성을 굳이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
분석과 연구는 대개 훌륭한 성적과 이어지는 법이다. 괜히 경기를 앞두고 힘들게 머리를 굴려가며 전략을 짜는 게 아니었다. 승리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 내가 어찌저지 결승까지 올라온 것도 그런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트폴 결전의 본질은, 책상 앞에서 연필을 굴리는 책사들의 수 싸움이 아니라- 칼과 칼을 맞대는 전사들의 싸움이었기에.
우승자를 결정하는 최종전은 결국 검 끝에서 결정나야만 했다. 지금도 상대의 빌드니 전략이니 따위를 고뇌하는 머릿속에서가 아니라.
내 못난 에고라고 말해도 좋다. 이건 굽힐 수 없었다.
마지막 세트가 될지도 모르는 경기였다. 나이트폴 메인 화면을 켜놓고, 나는 왠지 모르게 옛 생각에 잠겼다. 오래된 기억이었다. 이제 막, 나이트폴을 처음 접했을 때.
낭만과 명예가 살아있던 무렵.
그렇지. 남자라면 정정당당히 검을 맞대라고 외치던 때였다.
...이제, 남자는 아니었지만.
무상은 괜스레 키보드를 두드렸다.
대회를 참가한다고 팀원들이 자리를 비워준 덕에 연습실은 비어있었다. 평소보다 조용한 연습실에서, 컴퓨터 본체에서 돌아가는 쿨러의 소리만 울려퍼졌다.
머리가 복잡했다.
본선 무대에서 늘상 길다고 생각했던 대기 시간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머릿속이 해답 없는 문제들로 가득했다. 빨리 정답을 제시해야 하는데. 광전사의 마지막 카운터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반복해서 재생될 뿐이었다.
어떻게 파훼해야 하는가.
기동성과 다양한 파생기가 특징인 무상의 빌드는 유연하지 못했다. 결승전까지의 본선 게임에서 빌드를 바꾸지 않았던 까닭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에 따라 특성을 수정하는 유형의 빌드가 아니었다. 2세트에서 보여준 것처럼, 인 게임에서의 플레이 스타일 변화로 게임을 풀어나가야 했다.
지금까지 그걸 단점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음에도.
난잡한 머리는 쉽게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곧 다음 경기가 시작하니 준비하라는 진행자의 말에 깜짝 놀랐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승부를 포기하지는 않았으되, 정신적으로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겠지. 그는 팀 동료들이 말하는 '멘탈이 흔들린다'라는 말을, 이제서야 실감했다. 지금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다시 전장에 나왔다. 이제는 슬슬 두려운 존재로 변해가는 광전사를 마주하기 위해.
게임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신호에 맞춰 무상이 뛰기 시작했다.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난제를 마주해, 우선 부딪히고 보자는 심정으로 달려나갔을 뿐이다.
돌연.
신호를 듣고도 제자리에 서 있던 광전사가 대검을 들어올렸다. 명치 부근에서 대검의 손잡이를 부여잡고, 칼 끝을 하늘로 치켜올리는 모양새였다. 유난히 검신이 기다란 탓에 하늘로 쭉 뻗은 대검의 모습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유명한 자세였다.
나이트폴의 오리지날 시절, 게임의 타이틀 화면을 장식한- 하늘을 향해 명예를 맹세하던 기사의 자세.
상징적인 자세이기도 했다.
아직 공식적인 랭크 게임이 나오기도 전, 유저들이 만든 공방에서 일대일 결투를 신청하기 위해 사용하던 모션이었으니까.
오래전 일이지만 본 적이 있었다. 영상과 영상을 타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세월의 차이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화질 속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장면이 있었다. 유저와 유저가 마주한 채 검을 들어올리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전투에 앞서 예의를 표하는 것이다.
이 순간.
저 자세를 취한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광전사를 향해 무상이 발걸음을 멈췄다. 속도를 줄이고는, 자연스레 천천히 걸어갔다.
어느새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무상이 천천히 접근하는 와중에도 광전사는 검을 내리지 않았다. 열 발자국 정도였다. 서로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되, 칼을 휘둘러도 닿지 않을 거리.
익숙치 않은 동작에 묘한 감흥이 일어났다. 전략 따위를 고민하던 머리가 한순간에 깨끗해졌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허탈하면서도 시원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무상은 광전사가 그런 것처럼, 양손으로 검을 붙잡고 하늘을 향해 치켜올렸다.
게임 시스템과는 하등 상관없으나, 그렇기에 무거운 맹세를 하는 것이었다.
명예로운 전사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명예로운 전사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 명예로운 전사는 적을 조롱하지 않는다. 명예로운 전사는-.
영문을 서툴게 번역한, 오래된 번역문이 잠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로컬 룰을 그대로 가져온 거라며 유명했던 글이었다. 그 구겨진 화질 속에서 멋있는 연출인 것처럼 결투를 장식하는 자막이었다. 마지막 문장이 뭐였지. 아.
모든 건, 명예로운 결투를 위해 For Honor.
동시에 검을 내린 두 전사가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승부가 나기 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명예로운 결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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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트의 퍼포먼스에 대해선, 저희 해설진들도 흥분에 차서 여러 말을 나눴는데요. 혹시 구체적인 의도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상대인 무상... 선수가 너무 잘 하셔서요. 결승전은 완전히 전략 싸움이 됐습니다. 사실 빌드 선택으로 결정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닌데... 저는 개인적으로 나이트폴 결전의 매력은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생각 없이 칼을 맞대고 승부를 가리는, 옛날 방식의 결투가 떠오르더라구요. 그래서 그 시절- 아니. 제가 직접 해봤던 건 아니고. 영상으로 좀 봤거든요. 그게 인상적이어서 한 번 시도해봤습니다. 감사하게도 무상 선수가 바로 호응해주셔서 좋은 그림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무상 선수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네요."
"정말, 지켜보는 저희도 옛날 생각이 나는 장면이었어요. 원래 따로 결전 매칭도 없던 시절엔 일반 공방에서 눈만 마주쳐도 검을 치켜올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대회에서 그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시간이 많이 흘러서 나이트폴은 접었지만, 대회는 챙겨보시는 과거 게이머 분들도 그 장면을 보면서 심장이 조금은 빨라졌을 겁니다. 저도 그 시절 추억이 떠올랐으니까요.
아, 추억 생각에 사족이 길어졌네요. 하하.
다음 질문입니다. 결승전에서 승리하신 상대가 현재 프로 선수로 활동 중인 무상 선수입니다. 프로 선수를 상대로 우승, 그것도 아주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시면서 승리하셨어요. 저 뿐만아니라 많은 분들이 노르드 님의 프로 전향에 대해 궁금해 하고 계십니다. 의향을 여쭤 봐도 될까요?"
"어... 죄송합니다. 제가 그,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는데요. 아직은 여기에 전념하고 싶어서요. 그리고 결전 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프로 리그에서 쉽게 활약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팀 게임으로 넘어가면 전 프로 선수들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 한다고 생각해요. 프로 전향 계획은 아직 없습니다."
"아, 이번 대회로 늘어난 노르드 선수의 많은 팬 분들이 아쉬워하시겠네요. 그래도 개인 방송으로 활동을 계속한다고 하시니, 너무 안타까워 하지는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다음 질문은-"
"-끝으로, 응원해주신 팬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아, 방송 활동을 이어가실 테니까, 향후 계획이나 방송 홍보를 하셔도 좋습니다. 우승자니까 그 정도는 다들 웃으면서 들어주실 거예요."
"...아, 먼저- 대회 참가하고 지금까지 응원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 제 게시판에 올린 글들 많이 읽어보고 있습니다. 정보글이나 분석글도 큰 도움이 됐네요. 개인적으로 응원을 보내준... 가족들에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구요.
예전에 약속했던 대로, 이제 대회가 끝났으니까요. 방송도 정상적으로 계속 킬 거예요. 조만간 나이트폴 킹을 향해 달려가는 방송을 하지 않을까 싶네요. 시즌이 끝나기 전에는 달성하는 게 목표입니다.
음... 그리고... 아, 칼고 방송 많이 사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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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d11 님이 방송을 시작하셨습니다.
[????]
[아니 새벽에 바로 킨다고???]
[씨1발 이게 무슨일이야]
[믿고있었다구!!!! 젠장!!!!!]
[황르드! 황르드! 황르드! 황르드! 황르드! 황르드!]
[내가 누구? 저결대회 우승자 노르드의 시청자. 내가 누구? 저결대회 우승자 노르드의 시청자. 내가 누구? 저결대회 우승자 노르드의 시청자.]
[센세ㅠㅠㅠㅠ기다렸어요ㅠㅠㅠㅠ]
아직 방송 화면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새벽 세 시. 세상이 잠드는 시간이었다.
아무런 조짐도 없이 켜진 노르드의 방송이다. 그런데도 채팅창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적막한 방송과 미친듯이 올라가는 채팅창의 대비가 극적이었다.
지속되는 정적에 안달난 시청자들이 채팅창을 도배로 가득 채울 무렵, 그제서야 방송을 킨 당사자가 입을 열었다.
"아,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마치 라디오를 시작하는 DJ처럼, 조곤조곤 읊조리는 목소리였다.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가 일으킨 파장은 커다랬다. 과부하가 온듯 잠깐 정지된 채팅창이 인지하기 힘들 정로도 빠르게 올라갔다.
새벽 늦은 시각이라 시청자가 많지 않음에도 그랬다. 정작 입을 열었던 당사자는 정신 없이 채팅창을 보고 있는 걸까. 이어지는 멘트가 없었다.
드문드문 채팅창을 채우는 채팅 중에는 목소리에 대한 경악 섞인 반응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회를 보고 유입된 시청자일 것이다.
하기야, 칼고와의 합방을 제외하면 몇 주만의 생방송이었다. 이 새벽에 방문한 시청자들 사이에도 노르드의 방송을 처음 보는 사람이 다수 존재하겠지.
다시 찾아온 적막을 타고, 조용히 물소리가 흘렀다.
[물소리?]
[아, 씨빨]
유입과 원주민의 반응이 기묘하게 교차되고.
드디어 전환된 방송 화면은, 누군가에겐 익숙할 저수지를 송출했다.
별이 가득한 밤이었다. 새벽 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무리가 깨끗한 하천에도 담겼다. 하늘과 땅을 반으로 접은 데칼코마니 같았다.
"잠이 안 와서요. 이제 방송을 킬 수 있으니까, 여러분들 생각이 나서... 새벽 낚시가 또 운치가 있잖아요."
<노르드발닦개 님이 1,000원 후원!>
-여러분 생각이 아니라 낚시 생각이 낫겠지. 씨이발 내가 뭘 기대한거지
어딘가 어눌한 남성의 전자음이 시청자들의 생각을 대변했다.
대회를 우승한 당일, 새벽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