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60 - 호들갑 떨지마
메일함을 가득 채운... 무수한 메일들.
내 저스틴 계정과 연동된 이메일이다.
칼고의 말을 듣고 아차 싶었다. 그동안 생방송 채팅창이나 저컴 게시판에나 신경을 썼지 메일을 확인한 적은 없었다.
사실 아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따로 공지를 한 것도 아니고, 소통의 창구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 꼴이다.
읽지 않은 메일이 수두룩했다. 그것 자체는 익숙한 일이다. 업무가 아닌 이상에야 나는 옛날부터 메일을 이용한 일이 없었다. 가끔 확인할 때면 광고판이 되어버린 메일함을 보고 뒤로가기를 누르곤 했지. 그쯤 쌓이면 삭제를 하는 것도 귀찮은 법이다.
그런데 이건 그렇게 오래 묵은 계정이 아니었다. 불과 한 달 정도의 수명을 가진 신생아란 말이다.
이 수북히 쌓인 메일들에도 아직 온기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미련한 내가 감당해야 할 무게였다.
몇백 통이나 되는 메일을 일일히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개중에서 영양가 있어 보이는 메일은 한 줌 정도나 될까. 여는 게 망설여지는 메일도 종종 보였다. 지극히 사적인 내용을 담은 메일 같은-.
본인 일기장을 나한테 찢어서 보내는 꼴 아닌가. 일일히 답장을 해줄 수도 없는데. 아니, 일기 정도면 양반이다.
자신의 신체 사진, 과도한 집착, 부족한 방송 시간에 대한 강렬한 비난, 노골적인 섹스어필. 아주 가관이다.
팬의 애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들이다. 저게 나한테 쓴 글이라는 게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더라. 직접적으로 욕설을 보내면 고소의 위험이 있으니 다른 방면으로 멘탈을 공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래된 메일부터 차근차근 넘기다보면, 왜 방송을 안키냐는 성화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모습도 보였다. 대회 중에 이걸 봤으면 방송을 켰을지도 모르겠다.
핸드드립 커피를 한 방울, 두 방울 떨어뜨리는 것처럼 천천히 메일을 걸러냈다.
대회 상금 지급 관련 공지, 저스틴에서 직접 보낸 후원 관련 통보, 엘튜브에서 날아온 채널 관련 안내문, 엘튜브 MCN 소속 권유... 중요한건 이 정도일까.
MCN...? 내가 방송을 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권유가 들어오는지.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무심코 지나간 중요한 메일이 없을까 하고 다시 목록을 뒤적거리던 때였다.
뭔가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냥냥코로'.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다.
<팬튜브 운영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언니 사랑해요. 방송 잘 보고 있어요.
목소리너무좋으세요귀에속삭이는그느낌이너무...
...제목과 미리보기 내용의 갭이 엄청 나다. 이거 일종의 제목 낚시인가?
호기심이 튀어나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르지 말고 넘어가자는 선택지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메일을 열었다.
...
ltube.com/channel/UC6XGYgh72ouioKSF
생방송을 녹화해서 클립 형식으로 올리고 있어요. 언니 엘튜브에 올라가지 않는 영상들만 소스로 사용했는데, 혹시라도 불편하시면 바로 영상 전부 내릴게요.
본선 대회 너무 잘 봤어요. 엘튜브 영상도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르겠네요. 녹화뜬 영상을 돌려보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전부...
...
연애편지냐.
구구절절한 고백문 사이에서, 유달리 감정이 덜 섞인 문단이 하나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의 중요성이 내 속에 팍하고 꽂히는 것이다.
자연스레 링크에 손이 갔다.
들어가자마자 나이트폴을 연상시키는 고성이 펼쳐지고, 깔끔한 폰트가 그 위에 타이틀을 표시했다.
Nord clips.
딱 봐도 잘 꾸며진 채널이었다.
나이트폴 하이라이트 영상과 피셔맨 영상이 다른 재생목록으로 구분되어 있다. 메인을 장식한 나이트폴 영상의 조회수가 눈에 들어왔다. 40만. 업로드 기간을 생각하면 매우 높은 수치였다.
누가 공식 채널이야 이거.
나보다 훨씬 잘하는데.
화는 나지 않았다. 수익 창출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냥냥코로의 구구절절한 말 때문이 아니었다. 순전히, 내가 업로드한 영상들보다 월등히 깔끔하고 재밌었으니까. 재료가 똑같은데 결과물이 차원이 다른 수준 아닌가. 요리사의 역량 차이라는 게 현저히 눈에 띄는 것이다.
조회수는 참 객관적인 지표였다.
그냥 이 사람이 편집자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답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내용을 써야 할까. 갑자기 편집자 하지 않겠냐고 권유를 하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 대답을 듣지도 않았는데 나는 이미 다음 단계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계약 조건 따위는 어떻게 정해야 될지, 하고.
메일을 받은 건 일주일 전이다. 한창 대회를 준비하던 때였다.
조금 부끄럽더라. 이제야 답장을 보내는 게 염치가 없는 것 같아서.
나는 한동안, 머리를 싸매고 답장을 적었다.
대답은 무섭도록 빨리 돌아왔다.
문장에 묻어나는 감정이 너무나 격해서... 읽고 넘기기가 부담스럽더라.
열렬한 승낙의 표현이었다.
###
Nord:저 편집자 구한거같아요.
칼고:????
칼고:벌써??
Nord:네 오늘 만나기로 했음 ^0^
칼고 님이 메세지를 입력하고 있어요...
칼고:아니 잠깐만
칼고:직접 만난다고요?
칼고: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하고??
Nord:같이 일할 사람인데 꼭 만나봐야죠
칼고:그게 문제가 아니라 씹
칼고:어디서 어떻게 구한건데요
Nord:메일로 팬튜브 운영한다고 연락하셨는데
Nord:영상 퀄도 좋고 관리도 잘하는 것 같아서요
Nord:칼고님은 수익분배 어떻게 하시나요
칼고:아니 수익분배고 나발이고 팬튜브 운영하는 사람이 누군지알고 만나냐고
칼고:사생이거나 스토커면 어쩔건데
칼고:ㅈ니짜 생각이있냐??
Nord:?? 걱정도 심하시네
Nord:호들갑 ㄴ
칼고:진짜 절대 나가지마라 여자 스트리머한테 달라붙는 벌레새끼들 얼마나 많은데
칼고:뉴스 안봤어요?? 먼저 베코로 연락해보고 신중하게 해야지 신상이라도 대충 파악하고 만나던가
칼고:친구라도 데리고 가야지 여자가 무슨 조심성이 이렇게 없어
칼고:답장 안하고 뭐해ㅐ
Nord:이미 나왔음;
Nord:걱정마세요 이따 후기 들려드림
Nord:ㅡㅠㅡ
칼고:아니 미친ㄴ년아
###
탁-
베타코드 알람을 끄고 스마트폰을 탁자 위로 올려두었다.
나만큼이나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무슨 미취학 아동도 아니고, 뭐가 그리 걱정인지. 아무리 여자라지만 얼굴 공개도 안한 사람한테 열성팬이 들어붙을 리가 있을까.
애초에 내가 먼저 요청한 만남이었다. 이렇게 빨리 성사될 줄은 몰랐지만. 새로고침 한 번이었나. 답장도 빠르고 내용도 즉답이었다. 무슨 메일이 아니라 문자를 주고받는 줄 알았다.
내겐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같이 동업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편집 능력을 떠나서 서로의 실물도 모른 채 함께 일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사람과 마주하는 걸 꺼리더라도 이것마저 제쳐둘 수는 없었다. 신뢰 관계라는 건 적어도 얼굴을 대면한 상태에서나 만들어질 수 있을 테니.
순간적으로 혹해서 굴러가게 된 꼴이지만, 오히려 잘 됐다. 늦든 빠르든 편집자를 구한다면 만남은 가졌어야 했다. 둘다 서울에 거주하는 건 참 다행이었다. 기약 없는 약속을 잡을 필요는 없게 됐으니까.
상대방이 전적으로 내 의견에 동의한 덕에, 약속은 금방 성사됐다.
그래서- 나는 간만에 제대로 된 외출을 나선 것이다.
종로의 한 카페였다. 서로의 집을 대충 이어서 찾은 중간지점이다. 포털에 검색을 하면 바로 나오는 곳으로 골랐다. 지하철역과 가까운 덕에 찾는데에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다.
현대풍으로 건축된 한옥카페였다. 평일 오후의 애매한 시간대를 고른게 유효했나 보다. 서울치고는 적은 인파를 지나, 대로를 따라 걸으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도심지의 한옥은 나름의 운치를 뽐냈다. 의도한 건지 카페 내부에서는 뭔가 고풍스러운 느낌의 팝송이 흘러나왔다. 언밸런스하다고 해야 할까. 서양과 동양이 뒤섞인 듯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대충 커피 한 잔을 시켜두고 자리를 잡았다. 대로변이 보이는 창가 자리다. 언제나의 습관처럼 일찍 나온 탓에 약속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벽걸이 시계를 쳐다보다 보면, 그제서야 낯선 만남에 대한 부담감이 살며시 고개를 들이미는 것이다.
영 불편한 기다림이 될 것 같았다.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머릿속에서 어색한 첫만남의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때였다. 가만히 앉아앉아서 상대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내 얼굴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문자라도 보내둘까.
'혹시... 도착했으면... 연락주세요'
지이잉-
...무슨 반응이 이리 빠른지.
이 사람 나이트폴도 잘하는 거 아니야?
<편집자님(예정)>
도착했어요
뭐, 30분 전인데? 나랑 비슷한 성격인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카페엔 손님이 많지 않았다. 방금 문이 열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인데. 누구일까.
'저 창가에... 앉아있어요... 청바지에 베이지색 가디건이에요.'
문자를 보낸 직후였다.
드르륵, 하고 목제 의자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들리고. 왠지모를 오한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키가 크고, 가느다란 여성이었다.
170은 가볍게 넘을 것 같은 큰 키. 굽혔던 허리를 피고 나니 생각보다 더 컸다. 일어나는 움직임에 따라 어깨춤에서 정리된 검은색 단발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쭉 뻗은 키처럼 기다란 팔과 다리는 너무 얇았다. 긴 목의 절반을 가리는 검은색 터틀넥에 짙은 남색의 스키니진. 몸에 달라붙는 의상 탓에, 말랐다기 보다는 앙상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몸매가 더 도드라졌다. 안 그래도 큰 키가 얇은 몸의 굴곡 때문인지 더 길게 느껴졌다.
...각다귀를 떠올렸다면 매우 실례겠지.
뭔가 급하게 일어난 여성이 고개를 창가 쪽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꽤나 커다란 알을 가진 둥근 안경 너머로 여성의 눈동자가 나를 뚫어지듯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에, 갑자기 칼고의 메세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호... 호들갑 떨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