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62 시작은 어두운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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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신 다음날 최악의 경우는 무엇일까.
과하게 집어먹은 안주와 술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복통을 호소하며 잠을 설쳤을 때.
취기가 머물고 간 머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지끈거리는 두통 속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을 때.
의외로 훌륭한 컨디션으로 일어났으나, 아차하는 마음으로 시계를 본 순간. 회사에 늦어버린 자신을 발견했을 때 끔찍한 일 투성이다. 술이란 백해무익한 것이다.
그럼에도 매번 술을 입에서 떼놓지 않는 것.
나는 술을 좋아했다. 분에 넘치는 양의 알콜이 몸에 들어가, 정신이 몽롱해지는 그 순간. 그게 일종의 마비와 같다는 걸 알면서도 나른함에 취해버리는 것이다.
자기관리를 철저히 배제했던 20대 시절이 떠올랐다. 자취방에 홀로 쳐박혀 고독했을 때였다. 그럴 때면 소주 두 병을 안주도 없이 들이키고는 했다.
쓸데없이 큰 돈을 주고 구입한 스피커로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틀어놓고, 앉은 채로 연달아 소주를 집어넣으면 금새 정신이 붕 하고 떠오른다.
그때 바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꼬나무는 것이다. 입술로 필터를 살며시 짓누르며. 담배 연기가 음악과 함께 스며든다.
그럼 음악이 귀가 아니라 몸에서 흐른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닌데 악기와 악기의 소리가 분리되어 몸 안에서 울려퍼진다. 그것만한 낭만이 없다고, 한동안은 작은 냉장고에 소주병이 비는 날이 없었던 것이다.
내 빛바랜 청춘의 기억이다.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아침 8시. 한창 사람들이 활동을 시작할 아침이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도 느꼈지만, 어떻게 되먹은 방인지 빛이 거의 차단된 모습이다. 채광 커튼인가. 창문 쪽 커튼 사이의 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나왔다.
부재중 전화, 부재중 문자, 베타코드 메세지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감사하면서도 무거운 일이다.
감정이란 건 향하는 방향으로 쌓이는 법이다. 굳이 일일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쌓여있는 문자와 이름이 내 마음 속에 차곡차곡... 미어터지게 쌓였다.
걱정을 끼쳐버렸다.
답장을 보내기 이전에 나 자신을 추스리는 게 우선이다. 취기가 남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주연은 먼저 일어나 어딜 나간 모양이다. 좁은 원룸 안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원룸과 비슷한 형태의 방이었다. 창이 가려진 방은 어두웠다.
취한 상태로 처음 들어왔을 때는 마치 동굴에 들어가는 줄 알았다. 불을 켜기 전까지, 열린 문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빛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주인이 빛을 상당히 기피하는 모양이다. 맨 정신으로 보니 새삼스럽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방 안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자로 잰 듯 철저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컴퓨터 책상 밑으로 다 마신 생수병이 가지런히 정렬해 있는 모습이 하이라이트였다. 저렇게 나열해둘 정도면 그냥 버리는 게 좋을 텐데.
책장의 책들도, 스탠드형 옷걸이의 옷도.
결벽증이 있을까. 그러다 남의 방을 훑어보고 평가하는 내가 우스워 고개를 저었다.
차근차근, 전날의 기억을 되새긴다.
3차로 갔던 바는 꽤나 분위기가 좋았다. 어느 시점부터 대화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말이 많아지니 자연스레 술이 들어가는 속도도 줄어들었다. 바에 들어갔을 쯤에는 이미 막차 시간에 가까웠던 것 같다.
택시를 타면 된다는 내 말에, 본인의 집이 훨씬 가깝다며 먼저 권유해온 건 주연이었다.
나는 불알 친구도 집으로 초대하는 걸 망설이는 사람이었는데. 뭔 정신으로 초면인 상대의 초대를 그렇게 가볍게 수락했는지 모르겠다.
대화에 물꼬가 트이면서 흥이 올라가 그런걸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 사람과의 소통이 그리웠을지도 모르겠다. 혜민과 주호를 제외하면 현실에서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주연은 내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았나.
집에 오는 길에도 편의점에 들려 맥주를 구매했다. 잔뜩 흥에 차올라있었지. 그 상태로 캔맥주를 더 까고, 또 까고. 그리고
여기서 끊겼군.
필름이 나갈 정도로 마시면 대개 바로 잠이드는 경우가 많았다. 뭐,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사실 굳이 없는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지 않아도 충분히 타격이 컸다. 기억나는 것만 해도 맨 정신으로 못할 말이나 행동이 많았거든.
부끄러움에 사지를 쥐어짜고 있을 때였다.
띠링, 하고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딸각
주연이 들어왔다.
"일어났어요?"
"네, 네."
어제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어둑한 방 안에서 현관의 주황빛 조명을 받아서 그런 걸까. 안경 없이 드러난 맨 얼굴에서 날카로운 눈이 돋보였다. 검은색 무지 티셔츠와 검은 트레이닝 바지. 손에는 봉투를 들고 있었다. 왜 없나 했더니 편의점에 갔다온 모양이다.
"속은 좀 괜찮아요?"
"네. 신세를 졌네요. 잠까지 재워주시고."
"아뇨. 저는 좋았던걸요."
좋긴 뭐가 좋아. 저것도 팬심인가.
술기운에 붉어진 내 얼굴을 더 빨갛게 물들였던 건 지나치게 솔직한 주연의 칭찬이었다.
나는 칭찬에 취약했다. 아니,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눈 앞에서 칭찬 셰레가 쏘아지다 보면 기쁘다기 보다 난처하거나 부끄러워지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말문이 트인 주연의 칭찬 폭격은 내 작은 자존감이 담아내기엔 너무 버거웠다.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면 불에 닿은 오징어처럼 사지를 뒤틀었을 것이다.
장난아니게 창피했거든.
아무튼, 사람인 이상 그런 칭찬을 해주는 사람에게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아닌가. 쭉 늘어놓은 말을 듣다보면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심으로 내 방송을 좋아해주는 팬이 있구나, 하는 뿌듯한 마음과 함께.
냥냥코로가 컨셉이 아니라는 건... 조금 충격이었지만.
내가 일어난 걸 확인한 주연이 부스럭거리며 봉투를 정리했다. 생수, 라면. 저건 숙취해소제인가. 주연이 작은 병을 들고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거 드세요. 속 많이 쓰릴 텐데."
"아, 감사합니다."
목구멍을 타고 차가운 쓴맛이 흘러내려갔다. 거기에 맞춰 머리가 찌르르 울렸다. 두통. 술을 이것저것 섞어마신 탓이다. 오늘 하루는 고생하겠지.
나를 지켜보는 주연은 비교적 얼굴이 말끔했다. 분명 나와 같은 페이스로 주구장창 마셨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마실 때도 티가 전혀 안 났다. 주량이 괴물같은 사람이다. 마른 사람이 술을 잘마신다는 근거 없는 편견이 떠오를 만큼.
"그, 주연씨는 괜찮으세요?"
"네. 샤워를 했더니 괜찮아졌네요. 혜진씨도 씻으실래요?"
"아뇨아뇨. 집에 가서 씻으면 되는데요, 뭘."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거기까지는 내가 감당을 못하지.
언제 식은땀을 흘렸는지 목덜미가 조금 끈적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여기서 씻는다는 건 선을 넘는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혼자 사는 여자의 자취방에 들어온 것이다. 오랜만인데도 별로 의식되지 않았던 건 세 번째 다리가 없는 탓일까. 이런 걸 보면 신체가 무슨 영향을 주긴 한 것 같았다.
성욕이 육체의 산물이라면, 언젠간 나도 남자를 보며 욕정을 느낄지. 생각만해도 역겨웠으나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뭐라 정의내리기도 힘든 내 정신에 따라 지조를 지킬지. 정체성조차 애매모호한 내겐 여전히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툭.
"혜진씨?"
"아, 네."
"혹시 머리 아프세요? 두통약이라도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말도 없이 생각에 잠긴 내가 아파보였던 모양이다. 주연이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여전히 감정을 읽기 힘든 무표정이었지만, 아마 진심으로 걱정하며 건낸 말일 것이다.
한 번의 술자리가 뭐라고 이리도 거리감이 가까워졌는지. 내가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저 세수만 하고 올게요."
"양치하셔도 돼요. 왼쪽 선반에 보면 새 칫솔 있을 거예요."
"고마워요."
딸각
주연이 씻고 남은 흔적인지 화장실 타일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다. 샤워부스 안쪽엔 아직도 김이 서린 듯 했다. 노란색 슬리퍼를 끌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초췌한 모습이다. 술이 한바탕 훑고 지나간 몰골이었다. 눈 밑 다크서클이 평소보다 짙게 내려왔다. 퀭한 인상이다. 주연이 걱정 섞인 말을 건내오는 이유가 있었다. 이 정도면 술병이라도 낫나 싶었겠지.
자꾸 목덜미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이 거슬려 머리를 뒤로 넘겨버렸다. 기회가 되면 이 지나치게 긴 머리카락을 자르는 게 좋겠다. 언니는 긴 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혜민의 말이 걸림돌이었으나 어느 정도 선에서 정리하는 건 괜찮겠지.
혜민이처럼 깔끔한 느낌의 단발이면 좋을 것 같았다. 어, 자매소리 듣고 싶어서 잘랐다고 말하면 바로 넘어가겠지. 이쯤되면 동생 다루는 법 정도는 알게 되는 것이다.
자면서 땀을 많이 흘리기는 한 모양이다. 끈적한 목덜미가 계속해서 신경쓰였다. 방이 별로 덥지는 않았는데. 기억나지 않는 악몽이라도 꾼 것인가. 세안을 하는 김에 목도 함께 닦아내야겠다. 집에 갈 때까지의 임시방편은 되겠지.
대충 세안과 양치를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주연은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다.
뭔가 복잡한 인터페이스가 화면을 가득 메웠다. 가까이서 지켜보니 영상 편집 소프트웨어인 것 같았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프로그램이다.
"지금 작업하시는 거예요?"
"네. 원래 어제 올리려고 했던 영상이에요. 기왕 집까지 왔는데 보여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
화면 중앙에 잡힌 영상은 새벽녘의 하천을 비추고 있었다. 최근에 했던 피셔맨 방송이다. 루어 낚시를 한답시고 소프트 웜을 비싸게 구매했던 기억이 있다. 숙련도가 낮아 월척이 낚이지 않았다. 내내 허탕만 치는 탓에 시청자들도 지루해했었지.
키보드와 마우스를 오가는 주연의 손이 무던히도 움직였다. 이미 컷 편집은 끝마친 모양이다. 금새 자막이 깔리고 효과가 입혀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저게 내가 하던 일이 맞는 건지. 이래서 전문가를 쓰는가 싶더라.
문득 어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대회 영상은 언제 올리는 게 좋을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칼고님 영상 조회수가 잘 나오고 있으니까, 관련 영상으로 잡히려면 최대한 빨리"
본격적으로 취해서 아무 소리나 지껄이기 전까지는 생산적인 이야기가 오고 갔다. 당연히 채널 운영이 주된 화제였다. 구독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시기, 시청자를 붙잡아두기 위한 방법이라든지. 앞으로의 방향성 같은 중요한 것들.
편집자를 구했기 때문일까. 괜스레 급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막연하게만 생각하던 일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으니, 엘튜브를 성장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결국엔 컨텐츠가 필요한 것이다.
흠.
"배스 낚시 대회라든가."
"네?"
"제 방송 향후 컨텐츠요."
분주하게 움직이던 주연의 손이 멈췄다.
"...혜진씨, 피셔맨 전문 방송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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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전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영광스럽게도 제가 노르드님의 공식 편집자로 일하게 됐습니다.
채널 통합을 위해 지금 채널에 올라간 영상들을 노르드님의 채널로 이전하려 합니다. 이전 작업을 마치면, 이번 주 안으로 채널이 폐쇄될 예정입니다.
다음부터는 노르드 공식 채널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신. 노르드님이 밝힌 향후 컨텐츠 계획
1)나이트폴킹랭크 등반 (확정)
2)피셔맨배스 낚시 대회 (미정)
3)나이트폴시청자 교육 컨텐츠 (미정)
4)종합게임그때 그때 꼴리는거(정확히 이렇게 말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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