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64 원래 높은 곳일수록 험난하다
* * *
고성.
나이트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맵은 타오르듯 붉은 하늘이 돋보이는 붉은 평원이었다. 그러나 게임에 더 깊게 파고든 유저들은 그보다 고성 맵을 더 선호하고는 했다.
공성과 수성. 양쪽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병사들과 상호작용 가능한 다양한 오브젝트들. 고성 특유의 복잡한 구조와 지형지물은 게임을 보다 전략적으로 만들었다.
고성에서의 점령전은 붉은 평원의 섬멸전과 전혀 다른 구도로 이루어졌으니. 랭크가 올라갈수록, 복잡한 운영과 전략 싸움이 보는 이들의 눈과 머리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어지러운 전투의 현장에 있는 전사들은 그만큼의 집중을 강요받았다. 작은 빈틈이 패배로 직결될 수 있는 전장이다. 전면전보다 훨씬 복잡한 수 싸움이 오고 갔다.
랭크전 맵 중에서 유독 고성을 싫어하는 플레이어가 많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고성 혐오 유저 중 한명인 칼고는 지금, 고성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전열이 너무 빨리 밀렸네요..."
[상대 조합 파멸적이네]
[무슨 정문에만 5명이 밀고옴? 이쪽 메이지 의식 안하나]
[팀에 메이지 없어서 무리해서 러쉬한거 같은데 너무 쉽게 뚫렸넹...ㅠ]
[이렇게 쉽게 뚫린 이유는 뭘까요. 왜 아군 전열에는 3명밖에 없었던 걸까요.]
[어허. 범인찾기 멈춰!]
[범인이 지 이마에 범인이라쓰고 서있는데 뭘 멈춤]
이미 성문은 박살난지 오래였다.
상대 조합에 메이지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도 평소처럼 안일하게 대응했던 것이 패인이었다.
나이트폴은 전투에 들어가기 전 아군의 빌드를 확인하고 자신의 세팅을 수정할 수 있었다. 주로 하나의 빌드를 밀고 나가는 유저가 많은 저랭크와는 달리, 고랭크 구간에선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유연한 빌드 수정이 가능했다. 그리고 최근 점령전에서 메이지는 거의 필수 직종이었고. 메이지가 없는 경우가 더 드문 것이다.
노르드가 뻔뻔하게 저런 몰상식한 빌드를 가져왔음에도 칼고가 게임을 진행했던 건 그런 이유가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어차피 게임마다 양쪽에 메이지 한 명씩은 있었으니, 상대 메이지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주는 역할로 생각하면 납득할만했다. 폭발력 가득한 광전사 빌드를 거르고 저런 극히 제한적인 역할의 빌드를 선택한 것에 대한 분노가 일었을 뿐이었다.
인정하기는 싫었으나 일 인분은 어떻게든 가능한 빌드.
아마 다른 팀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게임을 진행했겠지.
하필 적팀에 메이지가 없다니. 이건 무슨 날벼락인가.
노르드의 빌드를 체험해본 칼고는 저 세팅의 한계가 얼마나 명확한지를 잘 알았다. 실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벽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궁병이라도 암살할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겠지.
상대는 다소 극단적인 형태의 조합이었다. 궁병이 하나에 나머지는 전부 병장기를 손에 들었다. 몰려오는 적병 뒤로 다섯 명의 유저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아차 싶었다. 이건 뚫릴 수밖에 없겠는데.
안일한 배치였다. 적이 시작하자마자 정문에 들이박는 전략을 시도할거라 예상하고, 아군 메이지를 외성 쪽에 배치했다면. 포격 준비를 빨리 끝낸 마법사의 화력 지원을 받고 적의 도박적인 한수를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첫 공격을 성공적으로 받아쳤다면. 일방적으로 적군 병사를 줄이면서 다음 공격에 대비했을 텐데.
언제나 그렇듯 실패는 후회를 남기는 법이다.
성문이 빠르게 박살나면서 외성까지 점령당해 버렸다. 곧 내성에 공격이 들어올 것이다. 드디어 준비를 마친 아군 메이지가 전장에 합류하면 공세를 밀어낼 수 있겠지만, 이렇게나 빨리 외성을 먹힌 이상 금방 다음 공세가 이어지리라.
그걸 모두 막아내기에는 지켜야 할 시간이 너무나 많이 남았다.
MazeMage:예열 끝났는데 게임도 끝났네
고기구워주세요:상대 조합 ㅈㄴ 무식하네 어떻게 나무패는 새끼들이 두명임
MazeMage:무식한조합에 왜뚫림?
고기구워주세요:법사 시밸럼이 시즈모드를 뒤에 깔아서요
MazeMage:땅개새끼가 ㅋㅋ
랭크를 막론하고 게임이 기울면 전장은 채팅창으로 옮겨진다.
범인으로 가장 유력한 사람을 내버려두고, 눈 앞에서 덤벼드는 상대와 싸움이 붙은 모습이다. 사실 범인을 찾기보다 그냥 싸울 상대를 찾고 싶었겠지.
칼고에겐 비극이었다. 그러나 방송을 바라보는 시청자들에겐 이보다 더한 희극이 없을 것이다.
방송인이란 천상 광대였으므로.
적군이 밀려와, 아군 내성을 뚫고 게임을 끝내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또 한 번의 패배로 멘탈이 작살난 칼고에게는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
"아깝게 져버렸네요."
[??]
[아...깝게?]
[이사람 물음표 모으기 업적있음?]
[1/1/2. 노르드는 잘했다. 내리 4데스를 쳐박은 칼고의 잘못이다.]
[칼고 오열]
[마법사죽이기(마법사없음)]
정말 아까운 게임이었는데.
나라고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세팅으로 랭크를 돌린 게 아니었다. 마법사를 미워하기는 했지만, 게임을 지면서까지 고집을 부리면 그건 트롤링이겠지. 게이머로써 난 언제나처럼 승리 플랜을 가지고 게임에 임했다.
상대 조합에 마법사가 없는 경우도 고려를 하고 빌드를 선택했다는 뜻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점령전에서 마법사가 없다는 건 커다란 리스크를 동반했다. 공성이건 수성이건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다소 엉덩이가 무겁기는 했으나 마법사의 존재만으로 커다란 전략적 이점을 가질 수 있었다.
당장 마법사가 없으면 중반 이후 밀려드는 중립 병사들을 밀어내는데 체력과 스태미나를 대부분을 소모하고 패주하기 십상이었다. 위험에 노출되기 쉬운 붉은 평원과는 경우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만큼 마법사는 중요한 자원이었으니.
만약 상대 조합에 마법사가 없다면, 시간을 끄는 것 만으로도 승기를 잡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마법사죽이기' 빌드는 그런 잔바리 기술에 나름의 강점이 있었다. 전면전은 무리지만 궁병 역할을 수행하며 시간을 끄는 정도야 가능했다. 마냥 실업자가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물론 비교적 쓰레기 같기는 했지만.
결국 승패를 가른 건, 상대의 승부수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팀적인 미스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그러나 이런 장황한 설명을 시청자들에게 늘어놓은들 그건 변명에 불과했다. 내가 일 인분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게임인건 사실이기도 했고.
지금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다음 게임을 돌릴 때였다.
흠.
매칭을 시작하기 전이다. 전판 상대팀에 마법사가 없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그래도 보통 한 명 정도는 빌드를 바꿔줄만도 했을 텐데.
혹시 저격이 있어서 나와 매칭이 잡히면 빌드를 바꾸는 건가. 아니면, 메타 흡수가 빠른 고랭크 유저들이 벌써부터 내가 만든 훌륭한 빌드를 보고 흡수했을지도 모른다. 더러운 마법사들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있는 건지. 그건 좋은 신호였다.
그래도 칼고같은 희생자를 또 만들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자의식과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이번 판은 광전사로 플레이해야겠다.
화살한방울:노하
Otherwise_:센세가 니 친구냐?
이름없는별:노르드님 팬이에요...이번판 캐리하겠습니다 ^^7
눈에 익은 닉네임이 하나 둘씩 늘어날 때면, 보통 그 랭크에 정착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 구간에선 이미 친숙한 닉네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른 킹으로 도망쳐야 할 때였다.
아무튼 첫 번째 컨텐츠라고 내세운 게 킹을 달성하는 것이었으니. 빠르게 도달하지 못하면 편집자를 볼 면목이 없었다.
맵은 또 다시 고성. 이번엔 공격 측이다. 팀을 훑어보면 궁병 하나와 메이지 하나가 포함된 밸런스 잡힌 조합이다. 거북이도 있으니 전열도 매우 튼튼하겠지. 날뛰기 딱 좋은 구도였다.
[왜 마법사죽이기 안함]
[한번 실패했다고 배신?]
[뭔 배신이야 근본충만한 광전사로 돌아온건데]
[와씨바 진짜 얼마만에 노르드냐]
[선생님 기다리고있었습니다...]
게임이 시작되기 직전이다. 채팅창이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상대팀에 칼고있다는데?]
[gd보니까 진짜임ㅋㅋㅋㅋ]
[법죽으로 트롤하다 광전사하니까 바로 적팀ㅋㅋㅋㅋㅋ]
[달게받아라(잘못한거없음)]
...아무래도 이번엔 칼고가 적으로 매칭된 것 같았다.
전판의 패배가 마음에 걸렸다.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어도 큰 기여를 했으니까. 게임이 끝나갈 무렵의 채팅은 꽤나 한이 맺힌 것처럼 보였는데. 아무래도 점수가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봐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니, 누굴 적으로 만나든 최선을 다해야하는 것이다.
나는 마우스를 다시 잡았다.
###
'Nord11'
진짜다.
적군에 노르드가 있다는 시청자의 제보가 사실이었다. 키보드의 탭키를 눌러 정보창을 띄운 칼고의 얼굴이 굳었다.
두 번 연속, 이번에는 적팀이라.
비교적 유저 수가 적은 상위 랭크라고는 하나 이 정도면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저 인간이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한 목소리로 저격을 돌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한 쪽 모니터로 자신의 방송을 켜놓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꺼림칙하기 짝이 없다.
PVP게임을 하다 보면 종종 겪는 일이었다. 같은 팀일 때는 나와 같은 랭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처참하게 죽어나가던 트롤이, 상대편으로 가면 미친듯이 날뛰는 그런 경험.
그것만큼 개 같은 경험도 드물었다. 같은 팀일때 말다툼까지 했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자괴감마저 끓어오르는 것이다. 결국 패배의 원흉이 자신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
뭔가 지금이 그런 상황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심지어 이번 판에는 그 괴상망측한 빌드가 노리는 메이지도 있었다. 경계가 된다. 무슨 빌드를 하든 노르드라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만한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였기에.
차오르는 긴장감에 칼고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투가 시작됐다.
칼고는 쌍검을 쥐고 자진해서 전열로 나섰다. 패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아군을 믿을 수는 없었다. 이건 결국 자신의 실력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기분 나쁘게도 음침한 하늘이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태양이 구름으로 가려진 탓에 낮 시간인데도 어두웠다. 음울한 공기 사이로 나팔소리마저 뭉개지듯 가라앉았다.
지평선 너머에서 움직이는 적군이 마치 붉은 물결처럼 보였다.
선두에서 붉은 깃발을 휘두르는 병사의 옆.
어깨에 츠바이핸더를 걸치고, 당당하게 걸어오는 광전사와 눈이 마주쳤을 때.
칼고가 느낀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왕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