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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화 〉 80 ­ 도와주세요, 선생님 (80/243)

〈 80화 〉 80 ­ 도와주세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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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았다.

분명 익숙한 아밍 소드였다. 장식이 없는 한손검은 아주 단순했다. 간혹 특이한 형태로 개조해 게시판에 올라오곤 하는 커스텀 세팅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초보자들이 선택할만한 평범한 검. 나이트폴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만져봤을 무기였다.

마주한 지금 그 단순한 검이 우습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생소한 무기를 본 것처럼 어리둥절했다. 저게 내가 아는 무기가 맞나, 하는 의문과 함께.

목덜미에서 섬뜩하게 번뜩이던 검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전사의 허리춤이었다. 거칠고 투박한 손이 검 손잡이를 다시 잡았다. 매번 사람 몸뚱이만한 대검을 들고 다니기 때문일까. 대검의 절반도 안되는 한손검이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말도 안 되는 상념이다. 저건 불과 몇 초전만 하더라도 그의 목숨을 위협하던 무시무시한 병장기임이 분명했다.

사실 저게 정말 장난감이어도 바뀌는 건 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검을 맞대지도 못하고 두드려맞지 않았나. 장난감이면 얻어터지는 시간만 늘어나겠지. 머릿속에서 플라스틱 칼로 찜질당하는 개 한마리가 떠올랐다. 이젠 개한테서 동병상련을 느낄 지경인가.

그의 입가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많이 힘드세요?"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에 흘러들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떠는 와중에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이라 다행이지. 캠이라도 켰으면 꼴사납게 놀라는 장면이 전부 노출되었을 게 아닌가.

숨을 죽이고 마음을 추스린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두 번째 만남임에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저 인간은 사람을 위축되게 만드는 분위기를 두르고 있는 것이다. 함께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이 짜릿하면서도 부담스러웠다. 무서운 사람이야.

"아, 아뇨. 그냥 제가 좀 한심해서..."

정말 한심하게 중얼거렸다. 빈말로도 말주변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혀가 문제인지 뇌가 문제인지 계속 말을 더듬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채팅으로 교육을 했으면 하는 것이다. 굳어버린 혀와 달리 키보드를 치는 손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뭐가 한심해요, 배빵님. 게임을 형편 없이 못 한다고 버러지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조곤조곤하게 명치를 가격해온다.

그는 자신을 가르치고 있는 저 선생의 말이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드립이라는 게 있는 걸까. 무슨 말을 하나 저 평온한 억양이 변하지 않는 걸 보면 전부 진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가르치는 태도는 정중한 것이 굉장히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저렇게 훌륭한 교육을 조금도 흡수하지 못하는 꼴이란. 부드러운 톤으로 말해주는 이론들은 나이트에 불과한 그로써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이론과 실무는 그리 가깝지 않았다. 왜 안되는 걸까. 분명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다시 한번 해볼까요?"

"아, 네."

또 한 번의 실습이다.

마주선 광전사가 검을 들어올렸다. 대검이 아닌 작은 검을 들고 있는 모양새가 영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흘러나오는 위압감은 여전했다. 가깝지만 곧장 검이 와닿지는 않는 거리다. 아마 두 걸음. 대쉬를 생각하면 한순간에 좁혀질만한 좁은 공간이다.

그 짧은 거리에서, 광전사는 평범한 중단세를 하고 섰다. 앞선 경험 때문에 자연스레 몸이 위축됐다. 저번에도 분명 저런 정적인 자세였다. 발을 내뻗어 접근하는 순간 검이 사라지듯 흔들리며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던 것이다.

"갑니다."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한걸음 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광전사의 손이 어깨춤까지 올라갔다. 머리로부터 내리치려는 움직임일까. 아니면 강공격을 하는 척 페이크를 섞는 모션일지도 몰라. 우선 배운대로 방패를 들어올려야 했다. 방패는 항상 적의 무기를 따라 움직여라, 였지. 간신히 반응한 손이 방패를 높이 올려드는 찰나였다.

노르드의 몸이 측면으로 비틀렸다.

마치 어깨를 내세워 차징을 하듯, 광전사의 왼쪽 어깨가 그의 눈과 마주하는 상태였다. 어깨로 올라왔던 검도 어느새 내려갔다. 의도한 것처럼 뒤로 쳐진 검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분명 무기에 집중하라고 말했지. 검, 검을 찾아야 하는데. 이미 거리는 좁혀졌다. 검을 휘두르기에는 너무 좁은 공간일...

쾅!

"억!"

급격히 변한 움직임에 당황해서 반응하지 못했다. 검에 대응하기 위해 들어올린 방패에 육중한 질량이 때려 박혔다. 무기를 빗겨 막아내기 위한 작은 방패로는 그 무게를 받아낼 수 없었다. 게임 내에서 단말마와 함께 그의 캐릭터가 튕겨져 나갔다. 완전히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실전이었다면, 곧장 관짝으로 들어갈 결정적인 한방이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반응하라는 거야.

"방패는 따라왔네요."

"...아니, 선생님. 무기를 보라고 하셨으면서 갑자기 차징을 하시면­"

"몸도 무기잖아요."

"..."

저 평온한 말투. 말로도 이길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한 방을 먹여 당황하거나 놀란 모습을 보고 싶은데, 적어도 나이트폴 내에선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노르드의 방송을 꾸준히 애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인간이 놀라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무슨 돌부처도 아니고.

요 일주일 사이 급격히 점수를 올리면서 뭐라도 된 것 같았는데. 하기야 올챙이가 다리 하나 뻗었다고 달라진 게 있을까 싶었다. 저런 최상위 포식자에겐 하등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꿈틀거렸어요, 그래도."

두 번째 교육이니 느껴지는 게 있었다. 놀랍게도 저건 칭찬이었다. 곧장 이어진 뒷말이 첫 동작에 반응해 방패를 들어올렸던 판단에 대해 언급하는 걸 보면 확실했다.

아마 노르드는 나이트 랭크 유저를 지렁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방송적인 컨셉이었으면 좋겠건만, 지금껏 방송을 봤던 경험에 의하면 저건 진심이 가까워 보였다.

한창 방금 전투 구도를 설명하던 노르드가 말을 멈췄다.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고 놀랐다. 직접 대면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위축되는지. 마치 수업 중에 딴 생각을 하다 들킨 학생이 된 것 같았다. 괜스레 차가워진 왼팔을 오른손으로 비벼댔다.

"이해 못하신 거 같은데 다시 갈까요?"

정말 보고 있을지도 몰라.

목구멍까지 차오른 한숨을 이번에는 그냥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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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 이거 도방해도 되는지 물어볼까?"

[도둑이 허가를 구하네ㅋㅋㅋㅋㅋ]

[팀원들 불러서 매칭이나 돌려]

[아 똘주 못와서 안한다고 몇번을말해 ㅅㅂ련아]

[돌주 빼고하면 되잖아]

[도방 ㄱㄱ]

[스벅아 빡대가리면 걍 몸으로 부딪혀서 배워라..]

['교수님 저 도강좀 해도 될까요']

입 밖으로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플랫폼 대전이 몇 주 남지 않았다.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게 몇 달도 더 됐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원래 과제라는 건 가까이 오고 나서야 압박감을 실감하게 되는 법 아닌가. 6 대 6 팀 게임으로 진행되는 게임의 특성상, 이건 과제 중에서도 조별 과제와 흡사했다. 조별 과제가 코 앞으로 다가온 상황. 상의된 바는 거의 없었다. 이렇게 말하니 훨씬 끔찍하게 느껴지는데.

왜 주제에도 안 맞는 리더 역할을 맡아서는. 조장은 그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아니었다. 무임승차한 승객C 정도의 위치가 딱이지.

멤버를 구하는 과정만 하더라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주최측에서 연락을 돌리기는 했지만, 미처 구하지 못한 두 자리를 채우는 것 만으로도 그에겐 이미 무거운 짐이었다. 친분이 있는 나이트폴 스트리머 중에서도 적절한 랭크의 유저를 찾아야 했다.

이벤트전에 가까운 성격이라곤 하지만 결국 플랫폼 대전이 아닌가. 다년간의 방화범 경력으로, 불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포착하는 스벅은 이번 대회에서 진한 기름향을 맡았다. 곧 죽어도 플랫폼 대전이다. 게임의 수준 이전에, 소속감을 느끼고 과몰입하는 시청자들이 양손에 라이터를 거머쥐고 뛰어다닐 게 뻔했다. 멤버 밸런스를 맞추는 일부터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벤트전 경력이 많은 터라 나름대로 넓은 인맥을 가졌다고 생각했건만. 말을 건낸 스트리머들은 대부분 거절하기 일수였다. 타 인터넷 방송 플랫폼과의 나이트폴 대전. 이기면 영웅이 되고 지면 역적이 될 전개가 뻔히 그려지지 않는가. 하이리스크를 꺼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거절하겠지. 납득할만한 일이었다.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그 개같은 년을 초대한 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었다. 몇 년째 삐숍에서 방황 중인 비루한 실력이야 참 적절했지만, 그 외의 모든 것들이 팀 게임에 적절치 못했다.

상습 지각, 불성실한 태도, 미개한 오더 수행 능력, 똥구멍으로 쳐먹은 나이트폴 경력 등.

나락전문 스트리머로 캐릭터를 잡아버린 년이다. 저런 몰상식한 짓을 일삼는데도 방송 컨셉 내지는 캐릭터성으로 실드치며 넘어가버리지 않나. 스벅 자신도 불을 지르고는 종종 써먹었던 일이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게 그 거울 치료인가 싶기도 하고.

옆 동네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슬슬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나우플에선 이미 팀 게임 연습을 시작했다더라, 연습 코칭을 위해 전프로 선수가 코치로 붙었다더라, 비숍 랭크로 선출된 누구 누구가 생각보다 훨씬 잘한다더라... 밑도 끝도 없었다.

특유의 두꺼운 낯짝으로 무시하고 넘어가려해도, 팬카페나 엘튜브 채널로 소식을 들고오는 터라 그럴 수가 없었다. 홍보 좀 하겠다고 방송에서 몇 번인가 언급한 파급 효과가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빌어먹을 일이지.

저렇게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 같은 나우플에 비해, 저스틴 동무들의 현황은 어떠한가.

멤버를 발표하고 팀 연습을 위한 베타코드 채널까지 따로 팠다. 그게 몇 주 전의 일이다. 그런데 누구 하나 연습하자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스벅이 몇 번인가 팀 연습 계획을 짜려고 했으나 스케쥴 문제로 무산되기를 몇 번.

최근 단톡방에 올라온 글이라고는, 나락전문 계집애가 올린 채팅 하나뿐이었다. '짜장면 먹고 싶다'였나. 진짜 개같은 년.

애초에 룩 이하의 저랭크 방송인들을 대상으로 한 이벤트 대전이었다. 저스틴 대표로 선출된 스트리머 몇몇은 나이트폴 방송이 주력인 것도 아니었다. 본업이 따로 있는 이상 스케쥴 맞추기가 힘들기야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제는 연습을 시작할 때였다.

그렇게 야심차게 계획한 오늘의 팀 연습인데.

똘주 그 썅년 때문에.

갑자기 병원을 간다고 당일 예정된 합방을 취소하는 꼴이란. 나락 전문이라는 타이틀이 그것마저 방어해주지는 못했는지 게시판을 테러 당하는 꼴이 참 보기 좋았다. 한참 모자르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년은 좀 더 맞아야 되는데.

약속을 파토낸 돌주는 내일은 반드시 시간을 만들겠다며 단톡방에 눈물 흘리는 이모티콘을 도배했다. 그러는데 별 수가 있을까. 첫 팀 연습을 한 명 빼놓고 시작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저스틴 대표팀의 연습 시작일은 내일로 미뤄졌다. 내일이 모레가 되고 모레가 글피가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아무튼, 예정되어있던 일정이 붕 떠버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찝찝한 상태로 솔로 랭크를 돌리기도 애매했더. 그런 와중에 발견한 것이 노르드의 방송이었다.

무려, '교육 방송' 타이틀을 달고 있는.

"...우리 아직 코치 못 구했는데."

[???]

[센세가 잘도 해주겠다ㅋㅋㅋㅋ]

[아니 근데 가능성있지않냐? 스벅이 첫번째 제자잖아]

[제자 ㅇㅈㄹ 나같으면 과거부정할듯]

[응 이미 엘튜브에 박제영상있어]

[따지고 보면 스벅이 올린 영상때문에 노르드가 뜬건데ㅇㅇ 이건 무조건 도와줘야지]

[노­황이면 코치진 등빨좀 생기지]

채팅창을 훑어보던 스벅이 노르드에게 개인 메세지를 보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장문의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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