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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화 〉 84 ­ 그러게 말했잖아 (84/243)

〈 84화 〉 84 ­ 그러게 말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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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들었다.

섬뜩한 파공성이 귓가에 맴돌 즈음엔, 이미 화살이 적의 목을 꿰뚫은 다음이었다.

한껏 치솟은 상대의 양손을 보고 황급히 무기를 들어올린 돌쇠가 뒤늦게 그걸 확인했다. 목이 꿰뚫린 적은 그 자세로 절명한 듯했다.

힘이 풀린 손에서 묵직한 쇳덩어리가 먼저 떨어졌다. 피어오르는 모래먼지 사이로 인간이었던 것이 주저앉았다. 붉은 웅덩이가 땅을 적셨다.

돌쇠는 조용히 손을 내렸다.

[미쳤나 진짜]

[스나이핑인듯.. 아니 근데 어디 캠핑했는데 커버 범위가 이렇게 넓음? ㅋㅋㅋㅋ]

[정확도 타이밍 다 예술이네. 황르드 활도 잘쓰는구나]

[수준이 다르긴해]

전투 상황이 한창이라는 걸 알면서도 채팅창으로 눈이 갔다. 자신도 모르게 솟아난 경이감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잠시 쓰러진 적 시체 앞에서 채팅창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정면 셋. 돌쇠님 전열로 다시 붙어주세요. 백도어만 견제하고 라인 잡으면서 밀어낼 겁니다. 해빙기님은 쪼망님 위주로 보세요. 앞 라인 안 뚫리니까 우회하는 것만 마크하면 돼요."

오더가 떨어짐과 동시에 또 다시 킬 로그가 올라갔다. 스벅이 킬 포인트를 올리는 모습이다. 혹시나 하고 탭 키를 눌러 확인하면, 역시 노르드의 어시스트가 함께 올라갔다. 오더를 내리는 와중에 지원 사격이 들어간 것 같았다.

이쯤 되면 놀랄 일도 아니다.

돌쇠는 노르드의 말을 듣고 팀원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옮겼다. 이동 중에 살펴본 미니맵이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잠깐 대열에서 이탈한 자신을 제외하고 아군을 표시하는 푸른 빛의 원형이 모두 지근거리에 모여있는 형태였다.

고성. 그리고 점령전이라는 걸 감안하면 상상하기 힘든 대형이다. 준비를 마친 적 메이지가 포격을 시작하면, 단번에 전멸로 이어질 법한 밀집 대형.

보통 본대와 떨어져 대열을 형성하는 아군 메이지도 앞 라인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메이지가 아군 본대와 함께 내성에 들어서는 광경이라니, 금시초문이다.

이런 전열을 구성하는 데에 의문을 표한 팀원들에게 노르드가 전한 설명은 단순했다.

마법이 떨어지기 전에 돌파하면 그만이라고.

그리고 지금, 아군은 외성을 돌파했다.

"이 기세로 밀어서 쌍탑까지 먹고 갈 겁니다. 쪼망님은 거기서 진 칠 거예요. 앞 라인 잡으신 분들은 교전 브리핑 안 하셔도 됩니다. 해빙기님 시야에 적 들어오면 그것만 말해주세요."

파죽지세였다. 적 팀에 방플을 하는 저격 유저가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본대를 밀집시킨 상태로 성문을 지키는 적 전열과 부딪혀 한 번에 뚫어버린 상태였다. 방송을 보면서 전략을 읽어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아니, 어쩌면 알고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랭크 매치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을 전략이었다. 뭉쳐서 돌파를 시도해봤자 좁은 지형에 막혀 지지부진한 고착 상태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끌리다 보면, 준비를 마친 적 메이지의 화력에 밀집한 아군이 휩쓸려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숨에 돌파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낸 이 사람의 존재가 예외적이겠지.

킹 랭크 수준의 궁병은 활쟁이 같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메이지처럼 전략적인 존재에 가까웠다.

적이 공격을 하려는 순간. 패링에 당한 아군이 추가타를 맞기 직전. 방어에 전념한 상대의 사각에서 날아드는 화살.

적재적소에 날아드는 화살은 그 자체로 경이로웠다. 엄호사격의 반경이 아군 전체를 커버한다는 걸 알았을 때는, 더욱 더.

어쩌면 그걸 위해 대형을 좁혔을지도 모르겠다. 아군의 모든 전투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물론 돌쇠는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지원이 더해진 덕분에 상대의 정문을 돌파하는 시간이 지나치게 빨랐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뚫려버린 적 정문을 바라보다, 뒤늦게 상태창을 확인한 순간에야 그 원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의 모든 킬 포인트에 노르드의 어시스트가 붙었으니까.

전열에 합류한 돌쇠가 스벅을 도와 적 병사를 쳐냈다. 라인을 한 번에 뒤로 당긴 건지 상대 플레이어는 보이지 않았다. 방송을 보고 있는 게 확실하다면, 내성 진입로의 쌍둥이 탑 부근에서 승부수를 던져올지도 모르겠다.

네 명을 배치한 첫 교전에서 바로 박살난 것이다. 생각이 있다면 이번엔 전원이 모여들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 메이지의 존재유무가 중요했다. 아무튼, 나이트폴 유일의 전략 병기와 같은 존재였으니.

메이지를 단 한번도 플레이한 적 없는 돌쇠는 마법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룩을 달성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나이트폴 전문 스트리머가 아니었을 뿐더러, 게임을 이론적으로 플레이하는 유형도 아니었다. 대강의 것들은 본능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랭크전에서의 경험으로, 아마 이쯤 되면 마법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부족한 디테일은 노르드가 모조리 메꿨다.

"여기서 대열 바꾸겠습니다. 쪼망님이랑 해빙기님만 그대로 유지하세요. 스벅님은 우회로로 도시고, 나머지는 최대한 간격 넓혀주세요. 상대 메이지가 내성까지 들어간 거 아니면 금방 마법 떨어질 거예요. 인지하고 가죠."

첫 교전에서의 압도적인 승리 이후로 노르드의 오더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행하기 어려운 오더를 내리는 것도 아니었다.

게임의 방향성을 제시하되, 막상 전투에 들어가면 복잡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첫 전투에선 오히려 팀원들이 쏟아내는 쓸데없는 브리핑이 사운드를 가득 채웠다.

돌쇠는 그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가뜩이나 집중력을 요구하는 전투 구도에서 세밀한 지시가 들어온다고 지킬 수 있을리가 없으니까. 노르드도 괜한 방해를 하지 않으려는 생각 같았다. 교전 상황에서 나오는 팀원들의 실수를 어디선가 날아오는 화살이 보충할 뿐이었다.

흠잡을 곳이 없는 것이다. 팀 게임 경험이 많은, 베테랑 게이머가 연상될 만큼.

노르드의 명령대로 아군은 산개한 상태였다. 방송을 보고 있는 탓일까. 적의 마법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군 병사들이 적의 내성을 향해 진격하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만 전장을 가득 채웠다.

차분히 탑을 향해 다가가는 와중이다. 다급한 목소리로 스벅이 입을 열었다.

"헬프! 헬프! 우회로 쪽에 두 명 붙었어. 저 씹새들, 방플 존나 티 내네."

스벅이 향한 우회로는 병사들도 지나다니지 않는 일종의 골목길이었다. 내성과 외성을 연결해, 예상하지 못한 경로에서 튀어나와 적을 기습하는 등의 전략적인 수를 던질 때 사용되고는 했다.

아마 노르드의 목소리를 듣고 배치했을까. 적 플레이어 둘이 스벅을 끊어내기 위해 달려든 모양이다.

"저 뒤에 있어요. 천천히 뒷무빙 치면서 빠지는 척 하세요. 신호 드릴 테니까 창든 놈 포커싱하시면 돼요."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한 스벅과는 달리, 노르드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침착했다. 사실 게임이 시작한 이래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던 것 같았다. 돌쇠는 그 목소리에서 안정을 느꼈다. 스벅이 호들갑을 떤 저 상황이, 아무런 문제없이 해결되리라는 믿음.

"아니, 저 돌진하면 바로 죽을 거 같은데요? 쌤! 저 보고 계신 거 맞죠? 쟤네 킬 캐치가 장난아닌 조합­"

"셋, 둘, 하나... 갑니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스벅의 짧은 단말마 들려왔다. 무심한 재촉에 희망을 잃었나. 그냥 생각하지 않고 믿으면 될 텐데. 돌쇠는 스벅이 보이는 저런 반응이 의아했다. 선생님의 오더에 무슨 의문을 표하는지. 노르드는 신앙이지 않은가.

금방 노르드의 브리핑이 이어졌다.

"망치 다리 부상입니다. 그대로 창병 마무리하고 넘어가요. 스태만 조금 신경쓰세요. 대쉬에 강공 두 번 쳐서 한번 쉬고 가야 될 거예요."

스벅은 전투 상황에 집중하는지 말이 없었다. 팀원들은 떨어진 거리에서 점멸하는 듯 반짝이는 미니맵을 바라보며 상황을 유추할 뿐이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허망함이 담긴 스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게 왜 됨?"

얼추 정리가 된 모양이다. 역시. 그러게 의문을 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본대 쌍탑 쪽 붙으셨나요? 브리핑 부탁합니다."

"일단 입구 쪽에 두 명 확인했어요. 아마 정문 지키던 애들인 것 같은데요? 나머지는 안 보입니다."

"궁병은 탑 위에서 캠핑칠 확률 높으니까 의식하시구요. 적 법사는 입구 조이는 거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간격 유지하고 타이밍 맞춰서 들어가죠. 우회 타이밍 보고 신호 드리겠습니다."

[이게... 진짜 나이트폴? 내가 하던건 대체]

[광전사인줄 알았더니 관제탑이었네 씹ㅋㅋㅋㅋ]

[노르드님 쟁 뛰던 분이예요? 왜케 오더 잘하시지]

[황이나 갓 붙여라 으딜 갓르드님한테 감히]

[돌쇠 표정 너무 웃기네ㅋㅋㅋㅋ 중간부터 얼빠진 얼굴임]

[아ㅋㅋ 병정새끼들은 칼이나 휘두르라고ㅋㅋ 장군님이 오더하시니까]

[아니 똘주들어오면 역체감 어떡함?]

팀원들과 간격을 두고 섰다. 쌍둥이 탑을 눈 앞에 둔 상태였다. 첫 팀 연습이라 시청자가 늘었나. 평소보다 채팅창이 빨리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대부분이 노르드의 오더를 듣고 놀라는 눈치였다. 하기야, 이건 그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지금 방송을 하고 있는 스트리머 여섯 명의 시청자를 총합하면 얼마나 많은 시청자가 나올까. 돌쇠는 내심 그게 궁금했다. 몇 명의 시청자가 이 팀 게임을 지켜보면서 감탄사를 흘리고 있을지.

"궁병 위치 잡았네요. 제가 견제할 테니까 신경쓰지말고 돌입하세요. 셋, 둘, 하나..."

이윽고 노르드의 카운트가 시작됐다.

탑이 함락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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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르드! 황르드! 황르드!]

[선생님 오더 능력도 있으셨네요...]

[활 왜케 잘씀???]

[본캐 닉네임 ㅈㄴ궁금하네 진짜]

[쟁 한두판 갈긴 실력이 아닌데ㅋㅋ]

20분은 걸린 것 같다. 첫 교전을 완벽히 잡은 것치고는 시간이 꽤나 오래 끌렸다. 탑을 뚫고 나서 적 메이지의 발악에 발목에 붙잡힌 게 원인이었다. 아무래도 교전 중에 마법까지 의식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

더러운 직종을 만든 제작진의 탓이다. 메이지 죽어.

모니터에선 승리를 알리는 깃발이 흔들렸다. 오랜만에 보는 쟁 모드의 승리 화면에서 과거의 흔적이 묻어나왔다. 흔들리는 깃발 아래, 작게 표시된 확장팩의 상징 문구들. 이런 건 여기도 있구나. 기억나는 문장과 못 보던 문장들이 뒤섞인 걸 보고 있자니 오묘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베타코드는 승리를 자축하는지 떠들썩했다. 오더에 대한 칭찬이 낯부끄럽게 다가왔다. 채팅창으로 올라오는 활자 조합과는 달리 직접 귀로 듣는 칭찬에는 면역력이 없었다.

연습의 효과는 거의 없을 텐데. 상대가 방플을 하는 저격충이라는 걸 듣고 빨리 끝내기 위해 주도한 게임이다. 이런 게임에서 뭔가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손을 푸는 정도는 됐을까. 실력도 안되면서 어중간하게 아는 것만 많은 랭크의 유저들이다. 교전만 압도할 수 있으면 이기는 법은 간단하지.

재밌는 쇼 정도는 됐을지도.

결과창을 지나 나이트폴의 메인화면으로 다시 돌아왔다. 목이 조금 아팠다. 감기에 걸린 것처럼, 내부가 까칠 거리는 느낌.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한 모양이다. 메인 오더도 참 오랜만에 잡았으니까.

킹을 찍겠다고 칼고와 랭크를 달릴 때는, 별 말이 필요하지 않아서 좋았는데. 팀 코칭이라는 건 생각보다 머리 아픈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벅의 요청에 응하지도 않았을 거다.

아직도 시끄럽게 울리는 스트리머들의 음성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다.

칼고에몽이나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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