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86 빈 자리에서
* * *
"글레 하나 오른쪽으로 빠졌어요!"
"오른쪽? 오른쪽이 어딘데."
"형님 있는" "꺅! 성문 위에 적 궁병있어요! 빨리 견제 좀 해주세용!"
"적 메이지 포격 시작했어요. 템포 빠른 거 보니까 외성에다 깔았나 본데"
"아, 똘주야 내 쪽도 좀 봐달라고!"
아주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아비규환이다. 병장기가 얽히며 발생하는 충돌음, 병사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비명이 한데 어우러졌다. 그 속에 조용히 뼈와 살이 잘리는 절삭음이 섞여들었다. 대부분이 비명 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스러졌다.
위풍당당하게 펄럭이던 푸르고 붉은 깃발들이 전장의 광기 속에서 힘을 잃고 나뒹굴었다. 한 호흡을 내쉴 때마다 쓰러진 병사가 늘어났다. 그러면서도 진전이 없었다. 인간과 인간으로 만들어진 선이 교착 상태에 머물렀다. 물결처럼 조금씩 흔들릴 뿐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양분된 전장에서 파공성과 함께 화살비가 떨어졌다. 흐릿한 하늘에선 태양을 대신해 붉은 불덩이가 떠올랐다. 마치 불꽃놀이를 위해 쏘아진 폭죽 다발 같았다. 그러나 꽃을 피우는 장소는 하늘이 아닌 땅이었다. 전장의 소음에 또 다른 소리가 추가됐다.
이전보다 끔찍한, 비명소리였다.
가면 갈수록 혼란을 더해가는 전장의 상황과 비례하여, 음성 채널에서 오가는 브리핑도 함께 혼돈으로 치달았다.
외성에서의 대치만 벌써 십분째였다. 적 플레이어 한두 명을 베어냈다는 승전보가 들려오면 항상 팀원 한둘이 죽었다는 패전보가 따라왔다.
지지부진한 고착 상태. 고성에서 이런 구도에 미소짓는 건 언제나 수성 측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푸른 기를 휘날리는 플레이어들의 보이지 않는 사기가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외성 탑 쪽에서 불덩이가 하늘로 솟았을 때 그건 극에 달했다. 마주한 적군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 했다. 승기가 완전히 꺾이는 순간이다.
동시에 여럿이 입을 여는 바람에 누군가의 음성이 묻히기 일수였다. 자연스레 올라간 언성이 혼란을 가중시켰다. 전투 상황에 대한 보고가 아닌, 도움 요청에 가까운 외침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더이상 브리핑이라고 말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다들 도움을 요구할 뿐 해결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전장의 혼란에 휩쓸려버린 탓일까.
한 명의 죽음으로 뭉개진 전선이, 아군의 전멸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 몇 연패지?"
"오... 육, 육인가 그럴 거예요."
스벅의 대답에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플랫폼 대전에 참가하는 스트리머들은 모두 상당한 규모의 팬덤을 가지고 있는 방송인이다. 방송을 하는 스타일이나 지향하는 바는 제각기 달랐으나, 그래도 고정 시청자가 많다는 건 방송 능력이 어느 정도 검증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해빙기같이 방송 경력이 오래된 스트리머는 더욱 그랬다. 방송 중에 발생하는 어지간한 해프닝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대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도 다 같은 사람이고 게이머인지라.
가망도 없이 계속된 연패에, 무기력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대회 준비를 위한 진지한 팀 게임이었다면 더 심각하겠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어제 개인 사정으로 불참한 돌주가 합류하고 드디어 공식적인 첫 번째 팀 연습을 진행하는 날이었다.
지각을 자주하기로 유명한 돌주가 제 시간에 맞춰 도착했을 때, 뭔가 잘 풀린다는 생각이 들었건만. 매칭을 돌린 이래 지금까지 단 한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했다.
그래도 한두 판 까지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게임 내용도 나름 치열한 공방을 주고 받는 박빙의 승부였던 것이다. 몇 번인가 팀 게임 대회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팀원들의 주도로, 자체적인 피드백도 오고 갔다.
전투 상황에 돌입하면 말이 극단적으로 줄어든다든가, 진형을 잘못 구성해서 시야의 빈틈이 만들어졌다든가. 그럴싸했다. 실제로 팀 게임에서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다년간의 나이트폴 경력이 우습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패배가 축적되기 전까지는.
연패가 쌓일수록 생산적인 피드백이 줄어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격이 의심되는 팀을 연달아 두 번이나 만나며 대패했다. 언제 매칭을 돌리는지 숨기기기 위해 모두가 방송 화면을 가렸음에도 벌어진 일이었다. 이쯤 되면 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런 경우, 게임에 대한 피드백은 대개 일방적인 남탓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원거리 지원 없이 게임을 하는데 이길 수가 있겠냐고."
남성치고는 제법 높은 목소리가 포문을 열었다. 이번 게임 가장 높은 데스를 기록한 댈런이었다.
가죽 갑옷이라는 경장비에 창과 같이 사거리가 긴 장병기를 주로 활용했다. 빌드의 특성상 칼 같은 거리 유지가 생명인데, 게임 중반부터 진형이 망가지는 바람에 다대일 상황에 자주 노출된 것이다. 불합리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쌓인 데스가 많았다.
원거리 지원 없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말인지 너무도 명확했다. 원래부터 다소 직설적인 표현으로 유명한 그였으나, 그걸 감안해도 너무 노골적이었다.
"뭐? 열 번도 더 죽었는데 어떻게 남탓이 나오는지 모르겠네. 무슨 지원을 해? 보기도 전에 뒤져버리는데."
표적이 된 돌주가 바로 입을 열었다. 하이톤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묻어나왔다. 댈런과는 잦은 합방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험악해질 수도 있는 방송 분위기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내가 그냥 죽었냐? 아오 진짜. 니 지원이 너무 형편 없어서 라인이 박살났으니까 그렇지. 맨날 뒤에서 활만 쏘는 활쟁이가 뭘 알아요, 하여튼."
"지도 비숍이면서 무슨. 그리고 내 화면 봤어? 팔 빠져라 쏴댔는데 개소리 하지마."
"정확도 까봐. 얼마나 좆같이 못 쐈길래 그렇게 쏴댔으면서 어시가 이 모냥이냐? 누가 보면 잠수타고 온 줄 알겠어. 진짜 어제 게임이랑 너무 차이나서 눈물이 다 난다."
"응~. 뭔 지랄을 해도 너네팀 궁병 나야~. 너 이제 지원 안 해줄거야. 뒤 봐줘도 어차피 싸먹혀서 뒤지 잖아. 혼자 열심히 해봐."
"개같은 년이"
"씨발... 초딩들이냐?"
끝으로 갈수록 돌주의 목소리에 비음이 섞이는 게 노골적으로 상대를 비꼬는 듯했다. 그에 맞서 상대하는 댈런의 목청도 점점 커졌다. 중간 중간 대화의 수준을 한탄하는 스벅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녹아들었다.
평소 같으면 바로 중재에 나섰을 쪼망도 지금은 말이 없었다. 다른 스트리머들도 무언가에 집중하는지 말다툼에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다. 해빙기는 아예 베타코드의 음성을 줄여버리고 이전 경기의 리플레이를 시청하고 있었다.
내내 침묵하던 돌쇠가 스벅에게 말을 걸었다. 돌주와 댈런의 마이크 소리를 최대한 줄여둔 상태였다.
"노르드님하고 연락하셨나요? 오늘은 휴방하시는 것 같던데."
"응. 연락 했는데, 팀 게임 몇 번인가 봐준다고 하시더라. 근데 오늘은 안 오실거야. 첫 연습이라 코치 없이 우리끼리 맞춰보려고 그랬지. 방송 안 켰는데 부르는 것도 민폐고.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빌어서라도 모실 걸."
돌쇠가 침묵으로 동의를 표했다. 볼륨을 낮춰둔 탓인지 아직도 진행중인 두 머저리의 말다툼이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언성이 한 단계 더 높아졌는지 그 아득함을 뚫고 욕설이 새어나왔다. 그제서야 쪼망이 중재에 나섰다. 애들을 다루듯 조곤조곤 말하는 모습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금방이라도 연습이 중단될 것 같은 분위기에 돌쇠는 괜히 빌드 설정창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안에 첫 승리를 신고할 수 있을지. 착잡한 마음은 자연스레 어제의 기분 좋은 연승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아, 그땐 좋았었는데 하고.
그럼에도 찌푸려지는 얼굴을 막을 순 없었다. 아무튼 우리 궁병은 노르드가 아니라 똘주였으니까. 원래 현실은 비참한 법이다.
스벅이 몇 번인가 곱씹어 말한 욕설이, 그의 마음을 대신 표현하는 듯했다.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 같아 눈가를 문질렀다. 하루도 안 됐는데 노르드가 그리웠다.
###
Nord:님 팀 코칭할 생각없어요?
Nord:플랫폼 대전. 2주인가 남았다는데 (03:16)
칼고:시발 그거 물어볼라고 채팅을 그렇게침?
칼고:채팅 아주 염병을 내놓고 (03:38)
Nord:??? 채팅이 왜요.
Nord:잘못한거 없는데 @.@ (03:40)
칼고:꿀밤 한대 갈기고싶네
칼고:글고 코칭은 안해요. 미쳤다고 플랫폼대전 코칭해? 어그로들 엄청 몰릴텐데 (03:41)
Nord:왜요
Nord:왜요
Nord:왜요 (03:41)
칼고:안한다고; 그리고 그걸 왜 니가 물어봐요.
칼고:설마 코칭 맡았음? (03:42)
Nord:아니 정식은 아니고 몇번 도와주기로 했는데
Nord:팀 코칭은 너무 번거로워 (03:42)
칼고:그니까 그걸 왜 맡아.. 대충 팀겜 기본 알려주고 런하던가 (03:43)
Nord:스벅님한테 빚진거있어서 대충하기 좀 그럼; (03:43)
칼고:뭘 빚졌는데 (03:44)
Nord:엘튜브 홍보? (03:47)
칼고:그게 왜 빚이야; 스벅도 조회수 엄청 잘나왔더만. 걍 상부상조같은거지. (03:47)
Nord:전 0부터 시작했으니까 빚이죠. (03:57)
칼고:그럼 코치 해야지 어쩔거야. 그거 팀 지면 어그로들 코치 방송까지 날아와서 난리나요. (03:58)
Nord:그럼 방종하면 되잖아 (04:07)
칼고:;;
칼고:아니 근데 답장 딜레이 왜케 커 (04:09)
Nord:임진왜란 엔딩보느라 ㅎ; ㅈㅅ (04:11)
칼고:??? 방송안켰잖아
칼고:미친 방송에서 그렇게 해놓고 걍 혼자 엔딩본다고? (04:13)
###
엔딩 크레딧이 남기는 여운이 있다.
영화관을 떠올리자. 영화의 끝을 알리는 엔딩 씬과 함께, 영화관의 조명이 들어온다. 그럼 사람들은 하나 둘 짐을 챙기고는 자리를 뜨는 것이다. 조용했던 공간이 어수선한 잡음으로 가득찬다. 검은 스크린에서는 OST와 함께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나는 그걸 좋아했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이 나면서 전달되는 묘한 여운이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시간 낭비라 볼 수 있는 크레딧도 끝이라 생각하면 낭만이 생겼다. 영화의 끝은 마지막 장면이 아니라 크레딧을 보는 일이지.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 이 영화는 크레딧이 끝나고 나오는 쿠키 영상이 중요하다며 놓쳐선 안 된다고 기다리는 그런 게 아니라. 요즘 젊은 것들은 낭만이 없어졌어.
조용히 올라가는 크레딧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야기가 크레딧과 함께 스쳐 지나간다. 요약이나 정리 따위가 아니다. 되새김에 가까울까. 난 거기서 느껴지는 여운으로 영화를 평가하고는 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얼마나 재밌게 봤는지.
그건 게임도 마찬가지였으니.
피곤함에 감기는 눈을 억지로 치켜 떴다. 모니터에선 낡은 글씨체로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름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다. 간혹 외국인으로 추정되는 이름이 몇 개 지나가서 놀랐다. 이게 언제적 게임인데.
별로 대수롭지는 않은 엔딩이었다. 옛날 게임이 다 그렇지 않은가. 거창한 시네마틱이나 애니메이션을 넣을 수도 없으니, 간략한 텍스트와 이미지가 몇 개 지나갈 뿐이었다.
심지어 이 게임은 서사마저도 평이했던 것이다. 일본의 침략을 영웅적으로 막아내고, 백성들을 지키고 국가를 수호했다는 20세기적 감성이 가득 담긴 결말이다. 게임 진행에 막히는 구간도 없었으니 별로 큰 감흥이 일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조용한 여운이 남았다. 또 하나의 게임을 끝냈다는 조금의 성취감. 따지고 보면 엔딩이 있는 게임은 오랜만이었다. 일종의 업적이라고 해야 할까. 보이지 않는 트로피 하나를 추가한 기분이다. 게임 타이틀을 직접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이런 건 어딘가에 보관해두었다가 세월이 흐른 뒤 꺼내볼 때 밀려오는 추억이 가장 보람찬 법이다.
크레딧은 비교적 짧았다. 여전히 게임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요소인 배경음만 돋보였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크레딧이 올라가고, 마지막으로 거창하게 휘갈긴 타이틀 제목이 두둥하고 등장했다. 단순하지만 교과서적인 완결이다.
현재 시각은, 새벽... 6시 반.
이 정도면 아침인가? 시간 감각이 완전히 맛이 갔다.
베타코드에는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만큼이나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귀찮기 짝이 없다며 거절하는 칼고를 몇 번이나 설득해낸 결과물이었다. 그래도 플랫폼 대전하면 많은 시청자가 유입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리스크가 더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결국 원할 때 사용가능한 듀오 이용권을 몇 장 내주고서야 승낙을 받았다. 쓸 때마다 호스팅 넣고 도망가야지.
알람을 꺼둔 플랫폼 대전 채널에 뭔지 모를 메세지가 가득 올라왔다. 전부 읽어내기가 귀찮아 스크롤를 한번에 내려버렸다. 기록을 위한 건지 사이 사이에 쪼망이 올려둔 게임 기록이 이미지 파일로 올라와 있었다. 패, 패, 패, 패...
뭐야, 이건.
우는 시늉을 하며 매달리는 스벅의 전화를 받은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 *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