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87 역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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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타인의 입장을 완벽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건 일종의 상상에 불과했다. 좁은 식견과 경험으로 만들어낸, 타자라는 이름의 허상. 동정심에 민감히 반응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 내가 저 비극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뒷 라인, 뒷 라인 좀 봐주세요! 여기"
"아니, 어디서 뚫린 건데! 돌쇠야, 일단 네가 커버가라!"
"저 이대일 마크 중입니다!"
"뭐, 그럼 스벅이는 지금 뭐하는데!"
"저 죽었는데요." 》
셰익스피어도 울고 갈 비극이었다.
스벅의 다시보기를 훑어보는 중이다. 왜 저런 상황이 연출됐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실, 문제가 되는 요소를 하나 하나 꼽아보자면 쉬지 않고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분석이 여기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팀 게임은 그렇게 간략하게 요약할 수 없었다. 요소 요소가 모여 만들어낸 끔찍한 혼합물이라 해야 할까. 총체적 난국이니 무엇 하나를 중점적으로 짚어내기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비극이다.
분명 같이 게임을 했을 땐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모든 게임은 상대적이라지만, 이건 상대가 문제가 아니라 자체적인 괴멸이었다. 랭크를 떠나 기본적인 것도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후열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간격 유지, 진형, 맵 리딩, 브리핑...
저건 비숍 정도만 돼도 다 알고 있을 텐데. 실제로 그때는 다들 무난한 플레이를 보여줬다. 내가 빠졌다고 아는 것까지 까먹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세 번째 경기부터는 돌려 볼 필요도 없었다. 팀적으로 모두 멘탈이 무너진게 눈에 훤히 보인다. 확연히 줄어든 멘트가 그 증거였다.
팀에서 광대 역할을 맡았는지 스벅이 종종 내뱉는 헛소리만 간간히 들려왔다. 그 밖에는 툴툴거리는 여성의 목소리. 들어본 적 없는 걸 보니 저게 돌주라는 사람인가. 연이은 패배에 팀워크라는게 박살난 모양이다.
하기야, 저런 처참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대회를 위해 모인 것만 아니면 진작에 해체되었을 팀이었다.
스벅이 그렇게 매달려 온 것도 이제는 이해가 갔다.
오더. 팀 게임의 핵심이다. 전반적인 게임의 흐름을 읽고, 정확한 판단을 내려 팀을 승리로 이끄는. 일대일로 진행되는 결전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팀전은 단 한명의 무력이나 단순한 결투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이트폴은 오더를 주도하기 힘든 게임이기도 했다.
상대 플레이어를 마주하고 있을 때를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다. 당장 적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대응책을 생각하기도 바빴다. 그 와중에 게임의 전체적인 판을 읽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대부분의 유저들은 오더는 커녕 상대방의 위치나 상황을 체크하는 간단한 수준의 브리핑도 하지 못했다. 연습하지 않으면 게임을 하면서 말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집중하느라 아예 입을 열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따라서, 팀 게임에서 지휘관 역할을 수행하는 건 주로 후열이었다. 빌드의 특성상 적과 직접 마주하지 않는 직군들. 내 경험에 따르면 대부분이 궁병이었다.
메이지, 메이지? 그런 건 나는 잘 몰라.
필연적으로 적과 마주하여 적의 손끝에 모든 신경을 쏟아부어야 하는 전열과 달리, 후열에 선 궁병은 넓은 시야로 전장을 파악할 수 있다. 포지션을 잘못 선정하지 않는 이상 직접적인 위험에 노출되지도 않았다. 침착함을 가지고 게임을 풀어가기 가장 적합한 위치라는 소리다.
길드에서 급조한 팀으로 한창 쟁을 달릴 때에도 늘 오더는 궁병의 몫이었다. 랭크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전열의 입도 활발해졌지만, 메인 오더가 바뀌는 경우는 드물었다. 사격의 높은 정확도 때문에 궁병 역할을 덤터기 쓰는 일이 많았던 나는 자연스레 지휘관 역할에 익숙해졌다.
그건 숙련도가 필요한 작업이다. 눈에 보이는 전장 뿐 아니라, 브리핑으로 들려오는 각종 상황을 종합하여 팀의 방향성을 제시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손은 쉬지 않는 것이다. 전장을 읽는 만큼 지원이 필요한 곳도 빨리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널리 퍼진 편견만큼 날로 먹는 직군은 아니었다. 내가 활쟁이라는 멸칭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메이지? 그런 건 나는 모른다고.
처참할 정도로 망가진 전적의 원인을 단 하나로 축약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메인 오더의 부재가 커다란 축을 담당한다는 건 아무도 부정할 수 없겠지. 내가 대신했던 돌주라는 사람은 팀 게임 경험이 전무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군 보이스에서 가장 많이 들려야 할 그녀의 목소리가 반대로 가장 적게 들렸다.
전날 진행된 팀 연습을 다시보기로 지켜본 바로는 해빙기와 스벅이 주도해서 오더를 내리는 모양이다.
적절치 않았다. 극도로 치열한 전장의 한복판이다. 전투 상황에서 집중하느라 말이 극단적으로 줄어들고, 전투가 끝난 후에야 상황을 정리하고 오더를 내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더라고 말하기도 민망했다. 요약하면 대충 리스폰 시간을 맞춰 여섯 명이 한 번에 달려들자는 게 전부아닌가. 아무런 전략도 없이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꼴이다. 저러면 일반 랭크 게임과 다를 바가 없다. 개인기 하나를 믿고 적에게 전투를 거는, 무지성 격투 게임.
뭐라 지적하기도 애매하다. 전열에서 전투에 참가하면서 자연스럽게 오더를 내리려면, 맞붙은 상대를 압도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니면 게임 자체에 도가 튼... 적어도 퀸을 노려볼만한 소수의 유저들. 그것도 아니면 멀티태스킹이 너무나 능숙한 예외적인 사람이거나.
플랫폼 대전에 참가한 스트리머 중에서 저 세가지 경우에 하나라도 해당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궁병이 오더를 맡는 게 좋은 텐데.
문득 메모장에 정리해둔 간략한 설명이 떠올라 화면을 전환했다.
돌주, 궁병, 랭크는 비숍2...에서 4를 오고 감.
현재는 비숍4.
그냥 코치 안 한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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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d:여러분
스벅:헉 넵 선생님
돌쇠야:네.
Nord:전에 연습한거 돌려보면서 분석방송하려고하는데, 혹시 칼고님 모셔서 진행해도 될까요?
Nord:도와주신다고 하셔서.
스벅:헉@@ 괜찮습니다. 저희야 너무 좋죠
쪼망e:왕 칼고님 ㄷㄷ
돌쇠야:괜찮습니다.
Dallon:근데 볼게있을지 모르겠네요 ㅠ 트롤 한마리데리고 게임해서;;
돌돌주주:씌발럼 ㅋㅋ
해빙기70:욕은 하지마라.
돌돌주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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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같이 분석 하자고? 이미 한번 봤다며. 뭔 분석을 해, 저랭 게임인데."
"봤어요. 봤는데 오더를 누구한테 맡겨야 할지 모르겠어. 독단적으로 건드리기는 좀 애매해서."
칼고는 습관처럼 앞머리를 뒤로 넘겨올렸다.
스피커를 타고 울리는 노르드의 말이 의외였다. 게임도 돌려 보고. 꽤나 진지하게 코칭에 임하는 모양이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이런 모습은 생각하지 못했다. 엘튜브에 올렸던 영상처럼 대충 스벅을 두들기다, 조언 몇마디를 해주고 빠질 줄 알았지. 팀적인 코칭을 하더라도 정말 간략하게만 알려줄거라고 예상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노르드라는 인간은 그런 존재였으니까.
팀 전체를 보는 피드백은 일반 게임과 다른 영역의 문제였다. 프로 리그에서 괜히 감독과 코치가 존재하는 게 아니다.
스트리머들이 참여한 스트리머 대전이 고도로 발전된 프로 게임에 비교될 수준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팀 게임은 팀 게임이다. 신경 써야 되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알아둬야 하는 상식만 정리해도 그게 얼마나 많은지. 코칭이란 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인간은 메인 오더까지 고민하고 있다. 이 정도로 깊게 관여하면 사실상 정식 코치로 등록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대회가 시작되면 모르긴 몰라도 더럽게 많은 어그로들이 모여들지 않을까. 잠깐 그게 걱정되는 자신이 우스워 고개를 저었다.
누굴 걱정해. 불타오르면 바로 방종이나 하고 말겠지.
"나도 봐도 된다고? 이거 발 빼기 힘들 것 같아서 좀 무서운데."
"기왕 하는 거 푹 담그세요. 시청자 늘어나고 좋잖아요."
내뱉은 말이 우스웠다. 저게 매번 시청자 쳐내는 작업하는 년이 할 소린지.
에어컨을 틀어둔 탓인지 방송을 위해 담아온 커피가 빨리도 식었다. 칼고는 노르드와 잡담을 나누며 방송 세팅을 만지작거렸다.
같이 분석을 하자며 방송을 켜기도 전에 찾아왔다. 그로써는 예정에 없던 합방 컨텐츠가 생긴 셈이다. 툴툴대기는 했으나 불만이 크지는 않았다. 아무튼, 요 근래 피셔맨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성난 민심을 달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노르드와 함께하는 나이트폴 분석 방송이라면 거기에 최적이겠지.
코칭 부탁을 승낙하기는 했으나 이렇게나 빨리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팀원들도 없이 분석만 한다는 게 다행일까.
방송 세팅을 완료한 시점이다. 방송을 시작하기 전 칼고가 말했다.
"방송 언제 켤 거예요? 맞춰서 키게."
"응? 이미 켰는데요."
뭐?
홀린 것처럼 저스틴 메인에 들어가니 상단에 노르드의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정말 말도 안 하고 방송을 켰어, 저 인간. 언제부터 생방송 상태였던 거야.
칼고의 머릿속으로 노르드와 나눈 대화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말 실수를 하지는 않았는지. 모든 스트리머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는 방송을 켰을 때와 아닐 때의 경계를 뚜렷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생각도 못한 기습을 당했다.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음성 안 나오게 해놨어요. 지금 방송 켜시면 돼요."
"너 씨발 일부러 그러지?"
"왜 갑자기 욕을 하고 그래요."
"...안녕하세요."
[칼하]
[안녕하세욥!]
[갠톡해명해 갠톡해명해 갠톡해명해]
[다 식은 떡밥 돌리지마셈;]
[방제 머임? 분석방송?]
[목소리에 왜케 힘이 없음]
방송을 두 시간은 진행한 느낌이다.
순간적으로 달아오른 감정은 에어컨 바람에 식은 커피처럼 빨리 가라앉았다. 묘한 피로와 함께였다.
방송에 들어오자마자 제목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채팅이 올라왔다. 나이트폴로 설정해둔 카테고리는 그 덤이었다. 최근 종합 게임을 많이 했으나 그의 주력 컨텐츠는 나이트폴인 것이다. 기대감을 표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이거 화면공유 할 테니까 확인하세요."
방송에 대해 설명하려는 칼고보다 노르드의 말이 더 빨랐다.
[????]
[노르드랑 합방임?]
[? 노르드님 목소린데]
[ㅁㅇㅁㅇ]
[시작부터,,, 방송같이,,, 갠톡,,, 이건 사귀는거네,,]
[뭐야 씨1발]
이젠 채팅창의 발작을 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적응해 버린 걸까. 포인트는 저걸 자신의 방송이 아니라 노르드의 방송 채팅창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 불타는 채팅창에도 태연할 수 있었다. 그 방은 이런 게 일상이니까.
"네. 플랫폼 대전 조금 봐드리기로 했습니다. 아뇨, 정식 코치는 아니고... 잠깐 하는 거예요."
공지도 하지 않았다. 미리 카페에 글이라도 올렸다간 일이 크게 번질 게 뻔했다. 플랫폼 대전 저스틴 측에 칼고가 코치로 합류했다느니, 하는. 방송을 하는 이상 커뮤니티의 파급력을 의식할 수밖에 없던 탓이다. 그는 이번 일이 그렇게 커지지 않기를 바랬다.
팀에 소속되어 버리는 순간 책임과 부담이 짐으로 자리 잡는 법이다. 저결 대회와 시즌 말 랭크 등반을 거치며 귀찮은 일을 몇 번이나 넘긴 후였다. 지금은 방송적으로도 내실을 다질 때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임 없는 쾌락이 최고였다. 그렇게 과몰입이 심한 대회는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는 게 제맛이지.
노르드가 화면 공유를 시작했다. 본인도 금방 방송을 켠 참일 텐데, 별다른 멘트가 없는 모습이다. 노르드의 방송에 익숙한 칼고는 보지 않고도 그 채팅창을 상상할 수 있었다. 왠지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저 년의 피해자가 나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윽고 나이트폴의 전장이 펼쳐졌다. 칼고는 식은 커피를 마저 삼켰다. 아무튼 발을 걸친 이상 대충 살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흘러나오는 스트리머들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분석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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