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88 세상이 많이 변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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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잠깐 멈춰 봐요. 방금 누구 콜이야? 우회로 체크해야 된다고 한 거."
"해빙기님이요."
"상황 판단은 되는데... 조금 느린게 문제네."
잠깐 멈췄던 영상이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후열에서 시야를 확보하던 돌주로부터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측면에서 튀어나온 적이 기습해온 것으로 보였다. 적과 대치 중인 전열은 반응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우회로를 체크해야 한다는 해빙기의 말이 맞았다.
칼고의 말마따나, 옳았지만 느렸던 셈이다.
다소 느린 상황 판단은 결과가 나타난 후에야 과정을 추론한 탓에.
쇄도한 검격을 막아내지 못한 궁병이 적의 칼날에 목숨을 잃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화면 상단에 돌주가 죽었음을 알리는 킬 로고가 올라왔다. 기습을 당한 상황에 대한 돌주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사운드를 가득 채웠다.
칼고가 얼굴을 찌푸렸다.
"근데 애초에 확인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저 빌드 시야 넓잖아요. 포지션 잡기 전에 주변부터 봤어야지 뭐하는 거야. 붙었을 때 생존기도 못 쓰고 죽었고. 뚫린 건 뚫린 거고 이미 그렇게 된 마당에 후 상황에 대처해야지. 저렇게 무력하게 죽으면 게임 내주는 꼴인데."
내뱉는 말이 다소 직설적이었다. 칼고의 평소 방송 스타일과 같았다. 일반 랭크를 할 때도, 이치에 맞지 않는 플레이를 보면 즉각적으로 날카로운 피드백을 하고는 했던 것이다. 거리낌 없이 실수를 지적하는 멘트가 이어졌다.
그걸 게임 내 채팅으로 표현하는 일이 없었을 뿐이다. 그와 함께 게임을 했던 몇몇 유저들이 뒤늦게 방송을 확인할 때면, 자신을 향한 까칠한 지적을 보고 칼고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준 낮은 플레이에 대한 칼고의 말은 그만큼 날이 서 있었다.
그게 논란으로 번지는 일이 없었던 건, 남에게 들이미는 칼고의 엄격한 잣대가 그대로 자신에게 적용됐기 때문이겠지.
지금도 몇 분 안 되는 영상을 시청하면서 여러 차례 직언을 쏟아낸 뒤였다. 분석 방송이라는 제목에 평소보다 더 많이 모여든 시청자들이 하나 둘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흠; 비숍인데 너무 높은 기준으로 보는듯]
[맞는 말인데 저런 피드백이 의미가 있음? 어차피 실력이 버러지라 어쩔수없는건데ㅋㅋ 큰 틀을 고쳐줘야지]
[너무 똘주만 뭐라 그러네]
[겜이 어떻게 일방적으로 쳐맞기만 하네ㅋ]
[우리 스벅이 칭찬좀 해줘@@@]
[어휴 시애미새,끼들 다몰려왔구만]
팔로우한 시청자만 채팅이 가능하게 제한을 걸어놨음에도 이 모양이다.
특정 스트리머의 팬부터 시작해, 분석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채팅이 눈에 밟혔다. 일부러 팬의 탈을 쓰고 분탕짓을 하려는 시청자들도 뒤섞여 있을 게 뻔했다.
이런 그림이 어느 정도는 예상되었던 것이다. 저결 대회만큼 본격적인 형식의 대회는 아니었지만, 인기 있는 방송인이 대거 참가한 이상 플랫폼 대전의 규모는 커다랄 수밖에 없었다.
팀 게임인 것도 차이점이다. 개인전과는 달리 범인 찾기가 반드시 일어나는 구도였으니. 여러모로 분탕들이 뛰쳐 놀기엔 최적화된 환경이다. 평소보다 몇 천명이나 증가한 시청자 수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코칭을 한다는 건 여러모로 독이 든 성배였다.
방금 상황을 여러 차례 돌려보던 노르드가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적고 있는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전투 중이라 판단이 느린 것 같아요. 자주 나오는 장면인데, 해빙기님하고 스벅님이 주로 오더를 잡거든요? 이게 좀 걸려요. 게임 보는 눈은 두 분이 확실히 괜찮아요. 근데 전투 중에 오더하는 건 연습이 너무 많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돌주님이 메인 오더 연습을 하는게 맞는 거 같은데."
"그분 티어가 어디였지?"
"비숍 4."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구도 보는 건 단기간에 바꾸기 힘들잖아. 포변은 안돼요? 스벅님 후열도 될 텐데."
"고랭크 후열에 박아두는 게 아까워서."
[똘주가 오더ㅋㅋㅋㅋㅋㅋ 게임 10창날거 뻔히보임]
[야 차라리 똘주한테 방패들려주고 앞으로보내]
[ㅈㄹ마셈 돌주 결전하는거봤으면 절대 그런말 못하는데]
[화살싸개 빌드 바꾸면 폰이랑도 비빌듯ㅇㅇ]
[근데 그럼 쪼망이가 오더하면 되잖아]
[스벅 뒤로 보내는게 조금 아깝긴해]
[저번엔 다 고랭크라 스벅이 활들었는데 ㄲㅂ]
[어떻게 빌드스왑되는 사람이 둘밖에 없냐ㅋㅋㅋㅋ]
[저랭은 그게 정상이지]
칼고는 고개를 저었다. 전장은 이미 승기가 기울었다. 궁병이 허무하게 죽어나간 상황이다. 돌주의 피를 먹은 칼이 이어서 메이지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그걸 막아내기 위해 인원 배치를 바꾸는 과정에서 진형이 망가졌다.
애초에 구멍이 난 순간 대처가 불가능한 구도로 넘어갔다. 아무 지원없이 적군과 전투를 시작한 전열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하나 둘 쓰러지는 모습이다.
노르드가 난색을 표한 것도 이해가 갔다. 스벅이나 해빙기의 안정적인 오더를 위해 돌주를 전열로 올려보내는 것도 문제였다. 근접 빌드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낮은 탓에 앞 라인에 커다란 구멍이 생길 게 뻔했다.
그럼 오더를 가르칠까. 해봐야 알겠지만 칼고의 마음은 이미 부정으로 기울은 상태였다. 시즌 내내 비숍 저티어에서 머무는 사람이 단기간에 갑자기 바뀐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결국 선택과 집중의 문제였다. 결함이 있는 팀을 바꾸기 위해 어떤 선택이 가장 적합할지.
패색이 짙은 전장을 가볍게 훑어보던 칼고의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하나 스쳤다. 너무 자연스럽게 배제된 탓에 지금껏 떠오르지 않은 생각이다.
"아니, 근데 메이지하는 쪼망님은 왜 빼요? 후열에서 제일 여유로운 게 메이지인데."
"...메이지잖아요."
"뭐?"
"메이지한테 오더 맡기는 건 좀."
불현듯 '마법사죽이기'라는 엽기적인 빌드의 이름이 생각났다. 본인이 만든 빌드라고 했지.
...초창기부터 플레이한 나이트폴 틀딱 유저들 중에나 찾아볼 수 있다던, 메이지 혐오자가 여기에 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거 때문에 아예 메이지를 후보에서 뺐나.
"염병...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고 쪼망님한테 말해봐요. 랭크도 돌주님보다 높고 딱이네."
"메이지는 좀..."
"적당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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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벅: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벅: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돌쇠야:생각해보니까 저번 연습 때 메이지는 아예 언급도 안하셨던거같기도..
스벅:메이지 오더가 좀 그렇긴해~ 으딜 전장의 전 자도 모르는 책벌레들이 ㅉㅉ
쪼망e:
스벅:아 쪼망님 있었네
스벅:ㅈㅅㅈㅅ
Dallon:있는거 알았으면서; 인성수준...
스벅:아무튼 다 똘주탓임. 애초에 걔가 잘했으면 이런일 없었음ㅋㅋ
Dallon:그건 맞지.
돌돌주주:나 오더 할 수 있는뎅
돌돌주주:아직 배운적이 없어서 그래
돌돌주주:노르드님 저 가르쳐주세요!!
Dallon:지랄 ㅋ
쪼망e:돌주님보단 제가 잘할거같아요!
스벅:ㅆㅇ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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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고성 위주로 만지는 거죠? 불땅은 적당히 대형만 맞출 거 아니야. 어지간하면 체급 싸움으로 갈 테니까."
"네. 오더는 그... 쪼망님한테는 제가 알려드릴게요. 일단 가닥만 잡는 식으로."
"왜 머뭇거려? 그렇게 메이지가 싫어요?"
"음..."
[제발 메혐을 멈춰주세요]
[둘다 킹이니까 다르긴하다]
[손캠 켜주세요 136트]
[노칼영원해]
[메이지님들 방송 나가주세요^^ 여긴 상남자들만 볼 수 있는 방송입니다~]
[우결충들 대가리 깨부순다]
[손캠 켜주세요 137트]
[좆,병.신대회 도와주지 말고 임진 엔딩이나보쟈]
[왜 노르드 방송에 남자목소리가 나오는거야... 칼고 주거버려... 꺼져버려... 더럽히지 말아줘...]
[이 방송은 다 좋은데 채팅이 문제야]
[뭘 다좋아 ㅅㅂ련아 방장이 이렇게 만든건데]
이야기가 통하는 상대란 귀중한 법이다. 그런 점에서 칼고의 존재는 언제나 큰 도움이 됐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딜레이 없는 의사소통이 가능했으니까.
게임 분석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혼자 몇 번이나 다시보기를 했던 영향도 있었지만, 애초에 볼만한 게임이 몇 개 없었다. 단체로 멘탈이 박살나 일방적으로 밀려버린 후반부의 게임을 제외하면 더욱 그랬다. 한두 시간이면 모두 훑어볼 정도의 분량이다. 게임의 핵심적인 부분만 추리면 그것도 더 줄어들었고.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메인 오더였다. 팀 게임은 오더를 빨리 확립하고 가는 게 중요했다. 오더도 연습이 필요한 상황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지금, 연습의 효율을 위해 빠른 포지션 정립은 필수적이다.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돌주에게 오더 개념을 심어줘야 하는 건지, 기초 지식은 가지고 있는 스벅이나 해빙기에게 일임하되, 포지션을 바꿔야 할지...
메이지를 언급한 칼고의 발언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메이지가 메인 오더를 잡는다고? 방구석에 쳐박혀 마법진이나 그리고 앉아있는 샌님이 무슨 오더를 내려. 애초에 고려하지도 않았다.
오더를 내리려면 전투 상황을 보다 면밀히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넓은 시야로 상황을 읽어낼 수 있는 궁수 쪽 빌드와는 달리 메이지는 시야가 좁았다. 포격을 위해 타겟을 잡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관측 마법이 있기는 했으나, 그건 선행 준비가 필요한 마법이었다. 근데 무슨 오더를 하겠다고
"프로들도 메이지가 메인 오더 잡는 판에, 무슨 시대 착오적 사고야."
뭐라고...?
"왜요?"
[왜요 ㅇㅈㄹ]
[이 사람 왜케 틀딱마인드인가요]
[손캠 켜주세요 147트]
[메혐을 멈춰주세요 제발..]
[메이지충 칼고 쳐내]
[프로씬은 오더 다같이하지 않음? 메이지 전담은 아닌거같은데]
[gb는 전열도 오더함ㅇ 근데 메이지가 많이 하는 편이긴해 첫수로 옵저빙갈기는 팀도 있음]
예상치 못한 정보에 채팅을 보며 눈만 굴렸다. 프로리그가 활성화되있다는 소식에 몇 번인가 찾아본 적은 있지만, 오더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었다. 그렇구나. 요즘은 메이지가 오더를 한다고. 어쩌면 좀더 적극적으로 마법사죽이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개인 코치는 따로 구하기로 했어요? 일대일까지 다 봐주진 못할 거 같고."
"...아. 저희는 팀 게임 코칭만. 그건 아마 따로 구하시는 걸로 들었어요."
"다행이네. 팀 게임 보는 것만 해도 시간 엄청 쓸 걸요? 개인은 절대 못하지."
"스벅님은 칼고님한테 부탁할 거 같은데. 요즘 쌍검에 집착하는 거 같아서."
"대회에서 쌍검하겠다고? 제 정신인가?"
"칼고님도 저결 쌍검들고 나왔잖아요."
"그래서 너한테 졌잖아요."
"아하."
"...좀 열받네."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메모장을 채워 넣었다.
가르쳐줄 내용을 정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1부터 10까지의 내용이 있다면, 어느 선에서 잘라야 할까. 단기간에 전부를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적당한 타협이 필요했다.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선.조만간 상대팀의 전력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다.
쪼망의 플레이도 마음에 걸렸다. 게임이 초반부터 망가진 구도에서 메이지의 활약은 크게 제한된다. 수성이 아니라면 더더욱.지난 연습에서의 연패는 메이지의 존재감을 완전히 지워버렸다는 말이다.
초반에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맡으며 제법 말이 많았으나, 패배가 계속될수록 급격히 말이 줄어든 건 쪼망도 마찬가지였다. 비숍1. 애매한 구간이다. 사람에 따라 팀 게임에 대한 이해도도 천차만별이겠지. 어느 선에서 시작해야 할지도 문제였다.
간략하게 정리한 탓인지 극한으로 축약된 메모장의 내용을 보고 물음표를 도배하는 채팅이 늘어났다. 방송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훈수로 가득했다. 도움이 되는 말이 아무것도 없어. 나알못들이 너무 많았다. 분석을 마치는 대로 방종하는게 좋겠다.
오더를 쪼망으로 정한 이상, 다음 연습 때는 무조건 메이지의 화면을 중심으로 게임을 봐야할 터.
벌써부터 머리가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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