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89 원숭이가 아니라면
* * *
"언니! 엄마가 냉장고에 참외 깎아놨대! 방송하다 꺼내 먹어."
"으응, 유정이 너 먹어. 나 오늘 방송은 뭐 먹을 시간 없을 거야."
"그럼 지금이라도 먹어! 저번처럼 열 시간 동안 부스 쳐박혀서 엄마한테 혼나지 말고."
연이은 거부에도 그녀의 등을 떠미는 동생의 힘 때문에 결국 접시를 들고 부스에 들어왔다.
어느샌가 완력으로 여동생을 이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요즘 고등학생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아니면 휴학계를 내고 방송에만 전념한 탓일지도 모른다. 휴학이 연장되는 시간만큼, 그녀의 몸에서 근육이란 근육은 전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여기서 살만 붙으면 씹는 맛이 부드러운 순살 돼지로 거듭나겠지. 무심코 검지와 중지 사이로 붙잡은 볼살이 평소보다 두껍게 느껴졌다. 헬스를 시작해야 할지도.
방음 부스 안은 여전히 쾌적했다. 방송을 시작한 이래, 방 안에 웅크리는 시간이 길어진 딸을 걱정해서인지. 엄마의 등쌀에 못이겨 설치한 공기청정기가 주인의 방문을 반기듯 자동으로 켜졌다. 아직 새 것 티를 벗지 못한 기계가 말끔하게 광채를 뽐냈다.
사실 그녀는 청정기의 효과를 실감하지 못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비싼만큼 제 값을 하겠거니 생각했을 뿐이다. 애초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스스로의 유일한 장점은 튼튼한 몸뚱아리 하나였다. 고작 공기가 좀 탁해진다고 몸이 상할 일은 없을 텐데.
마우스를 몇 번인가 털어내고 의자에 앉았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다. 합방 약속이 잡힌 상태로 꾸물대며 느긋하게 준비를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상대였으니까. 그걸 다시 의식하자 가슴에서부터 뭔가 꾸물거리며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이러지 않았는데, 막상 방송 시간이 다가오니 긴장감이 찾아온 듯했다.
'으, 이럴 줄 알았으면 스벅님한테도 같이 하자고 할 걸!'
여러 걱정거리가 그녀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오디오를 어떻게 채워야 하지? 내가 너무 형편없어서 실망시키면 어떡해... 나이트폴만으로 대화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까? 메이지를 싫어하는 건 컨셉이겠지? 시청자들이 엄청 몰려올 텐데, 채팅창 관리는 어떻게 해야...
부풀어오른 생각이 한도를 넘어섰다. 가지고 들어온 참외에는 아직 입도 대지 못했다. 중요한 일, 커다란 일을 앞두면 그녀는 언제나 이런 상태에 빠지곤 했다.
생각에 과부하가 걸려 심신미약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 이럴 때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의도적으로 밝은 티를 내며 과장되게 행동하는 것이다. 긴장하지 않은 척, 태연하게.
사실 팀 연습 때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잘 나가는 스트리머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딴에는 방송을 키워보겠다고, 유입을 늘리겠다는 마음에 결단을 내리고 플랫폼 대전에 참가한 것이었는데.
단호하다고 생각한 결심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스벅처럼 자연스럽게, 해빙기처럼 노련하게, 아니면 돌주처럼 뻔뻔하게. 능숙하게 끼어들어 멘트를 칠 수가 없었다. 기가 눌려 잔뜩 위축된 모습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쳤던지.
흘끗거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정규 방송을 시작하는 시간까지는 30분이 남았다. 정각부터 합방이 예정되어 있으니, 미리 방송을 켜서 기다리고 있는게 편할지도 모르겠다. 아마 오늘 그녀를 가르칠 선생님도 시간에 맞춰 찾아오겠지.
아니, 어쩌면 방송을 미리 켜고 기다리고 계실지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황급히 저스틴 메인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아직 방송은 켜져 있지 않았다.
...다행이 맞을까? 먼저 방송을 키면 기다리던 시청자가 자신의 방송으로 몰릴지도 모르는데. 몇 번인가 선생님의 방송을 시청한 그녀는 그 방송의 채팅창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알았다.
스트리머로 활동하면서 채팅창이 주는 압박감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실감했다. 그래서 그녀는 노르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채팅창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는지.
그 독특한 사람은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시청자를 이끌면서도 전혀 휘둘리지 않았다. 마치, 채팅창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방송을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스트리머라면 응당, 많은 시청자가 모여드는 걸 기쁘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자신은 그러기는 커녕 미리 걱정이나 키우고 있다니. 소위 대기업이라 불리는 방송인이 되기에는 너무 부족한 게 아닌가 싶었다.
또, 자괴감이 몸집을 불렸다.
그래도 지금은 방송을 켜야 했다.
[쪼하!]
[ㅉㅎㅉㅎ]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이어폰을 타고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방송을 시작할 때면 항상 틀어두는 재생목록이다. 공지를 해둔 덕인지 시청자가 빨리도 들어왔다. 아마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음악 소리를 뚫고 나오는 제 목소리가 평소보다 신경쓰였다. 방송을 막 시작했을 무렵, 누군가 앵앵거린다며 비웃었던 목소리. 욕설도 섞여있지 않은 단순한 문장을 보고 얼마나 동요했던지. 그냥 학업에 전념하는 편이 좋았다고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극복했다고 생각한 지금도 간혹 그 채팅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이것도 긴장을 했다는 증거겠지.
그녀는 마우스를 붙잡지 않은 왼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검지와 중지로 입술의 양 끝을 밀어올렸다. 부드러운 볼살이 손가락에서 몽글거렸다.
스마일. 캠을 키기 전에 표정 관리를 해야지.
"짜잔~! 헤헤. 오늘은 선생님을 모셨으니까요. 학생 컨셉으로 코디를 해봤답니다. 예전에 입던 교복이에요!"
[쪼망 여고생 스킨 ㄷㄷ]
[와 그냥 고딩같은데?]
[잘 어울리시네요.]
[오늘 이쁘당]
[교복 퍄퍄]
[ ㅜㅑ 치는 새,끼들 밴좀 ㅎ]
돌아오는 반응이 좋았다.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한참을 놀리던 짖궂은 여동생의 장난을 감수할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입은 교복이 아직도 몸에 딱 맞았다는게, 그녀에게는 꽤나 기쁜 일이었다. 최근 살이 쪘다고 생각한 걸 착각이라고 넘길 수 있었으니까.
오른쪽 모니터에선 방송 송출화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익숙해질만도 한데, 여전히 캠 화면을 켤 때면 몇 번이나 자신의 모습을 다시 확인하게 됐다. 화장과 조명에 문제가 없는지. 옷을 잘못 입지는 않았는지. 채팅창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고 나서야 안심이 갔다.
그녀는 미리 베타코드 음성 채널에 들어갔다. 이번 합방은 선생과 학생의 관계로 맺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럼 학생이 된 입장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는게 당연하겠지. 이전과 달리 홀로 들어간 채널은 조용했다. 연패가 이어지자 숨 막힐 듯 가라앉았던 연습 때가 떠올랐다. 그것보다는 훨씬 괜찮은 상황이겠지.
약속한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계속 송출 화면으로 시선이 갔다. 애타는 마음과는 달리, 방송으로 나오는 제 모습은 전혀 긴장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게 조금이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아준다.
채팅창에 집중하니 긴장감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흘러나오는 음악이 멘트 사이의 정적을 부드럽게 채웠다. 그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방송이다. 더 많은 스트리머가 참가한 지난 연습도 무난하게 풀어나가지 않았나. 그때는 비록 캠을 키지도 않았고, 곧 있을 합방처럼 일대일 상황도 아니었지만...
"아. 안녕하세요. 쪼망님."
불현듯, 갑작스레.
속삭이듯 조용한 목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리던 음악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미 그녀의 귀에도 익숙한 미성이다.
쪼망은 순간 자신의 얼굴이 송출되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화들짝 놀라버렸다.
그건 기습이었다. 인식의 빈틈을 치고 들어오는.
"녜, 넷? 어, 언제... 안녕하세욧!"
[ㅋㅋㅋㅋㅋㅋㅋㅋ]
[ㄹㅇ 놀랐네 쪼망이ㅋㅋㅋ]
[수업시작했는데 선생님 들어온줄 모르고 떠들다 걸린 모습ㅇㅇ]
[커엽다]
[말더듬는거 찐텐ㅋㅋ]
분명 사람이 들어올 때 발생하는 알람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갑작스런 등장에도 놀랐지만,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말하는 탓에 크게 당황했다. 그제야 채팅창을 확인한 쪼망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시작부터 이게 무슨 망신인지.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해요! 들어오신 줄도 모르고 방송 멘트를... 알람 소리가 안 들려서요. 이게 왜 이러지. 설정은 만진 적도 없는데, 헤헤... 바, 방금 오셨나요? 아까 확인했더니 방송은 안 키셨더라구요! 방송 키셨나요?"
"아뇨. 오늘은 방송 안 켠다고 공지했어요. 쪼망님 방송에 나온다고 했으니까, 아마 그 쪽으로 몰리지 않을까요."
"아하...아. 네? 방금 뭐라고 하셨죠?"
돌아오는 대답은 없고, 키보드를 두들기는 타자 소리만 깔끔한 음질로 울려 퍼졌다.
저게 무슨 소린가.
[노르드 텐련아 방송켜 ㅅㅂ]
[유입받아라@@@@@]
[오늘부터 여기는 북구인들이 지배한다]
[ㅋㅋㅋㅋㅋㅋ 채팅 왜 난리남?]
[오 여기 방장은 듀라한이 아니구만]
[여기가 그 씹게이 메이지 방송인가요? 흠... 예쁘니까 봐드립니다.]
[관리자님 뭐하세요;]
[시청자 느는거봐 ㄷㄷ]
[미친놈들]
노르드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는 건 간단했다. 굳이 시청자 수를 확인하지 않아도, 무서운 기세로 올라가는 채팅창의 화력을 보면 어디선가 시청자 무리가 몰려왔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평소 자신의 방송에서 볼만한 광경이 아니었다. 채팅이 많다고 무슨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닐 텐데, 마치 난장판이 발생한 것처럼 요란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스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제 시간에 맞춰 찾아온 선생이 무슨 생각인지 짐작도 하기 힘들었다. 그냥 멍하니,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음... 시작 할까요? 화면 공유 켜드릴테니까 그거 보시면 됩니다."
"네? 네."
왜 방송을 켜지 않았는지 일언의 설명도 없었다. 베타코드의 화면 공유를 확인하면서, 쪼망의 머리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시청자가 적은 나를 몰아주려는 건가.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제대로 확인한 건 아니지만 아마 플랫폼 대전에 참가한 스트리머 중 가장 평균 시청자 수가 적은 건 자신일 것이다.
최소 천 명 단위의 시청자를 보유한 타 스트리머들과 달리, 그녀의 시청자는 몇 백명에서 간신히 천 명을 넘길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이상하다. 한마디의 언질도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청자를 몰아줄 거라고는.
단순히 방송을 켜기 귀찮아서... 이건 말이 안 되고.
노르드가 공유한 화면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화면이었다. 아직 뭔가를 준비하는 중일까. 호스팅에 준하는 시청자가 들어온 갑작스런 상황에 머리가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었다. 이대로 교육에 집중할 수 있을지. 구르며 커지는 눈덩이처럼 걱정이 걱정을 불러왔다.
딱.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
검기만 했던 화면에 변화가 생겼다. 화면 좌측 상단에서 작은 창으로 나타난 탓에 제대로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뭔가 하고 집중하고 들여다보면, 그제야 화면 전체를 채우며 확대됐다.
프레젠테이션이다.
그림판으로 대충 그린 듯한 잡스런... 나무 그림?
나무 위에는 프로그램에서 기본으로 제공되는 느낌의 원숭이들이 성의 없게 존재감을 뿜어댔다. 복사, 붙여넣기를 활용해 대충 만진 듯 똑같은 형태의 원숭이가 마치 나무에 열린 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난잡한 배경을 뒤로 하고, 중심부의 거대한 타이틀이 나타났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나이트폴 오더 Part.1'
복잡한 생각들을 모두 날려버리는, 임팩트있는 시각 자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