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95 뒤집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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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되는 열기가 있다.
몇 백번, 몇 천번을 경험한 전장이 다르게 보일 때. 전쟁을 준비하는 자리에서, 쉼호흡을 내쉬며 앉아 있는 쪼망의 머리는 새하얗게 표백되기 직전이었다. 처음 랭크 매칭을 돌렸을 그 때와 같았다. 실전을 위해 잔뜩 박아둔 이론들이 깨끗하게 지워지는 느낌. 긴장감이 몸을 억죄어왔다.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난 며칠 잠깐의 시간 동안 불타오르듯 점화한 자존감이, 곧 불어올 거센 바람의 전조를 느끼고 몸을 떨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시험을 앞둔 것처럼 머릿속으로 택틱을 정리했다. 하얗게 물든 도화지 속에 요약해둔 정보가 하나 둘 점멸하기 시작했다. 난잡하게 떠올린 팁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어지럽게 난립했다.
떨림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마우스를 붙잡은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려, 스펠 북을 체크하는 마우스 포인터가 흔들렸을 때. 그제서야 쪼망은 자신이 떨고 있음을 자각했다. 내뱉는 숨소리도 미묘하게 떨려오는 듯했다. 그렇게 왁자지껄하던 팀원들도 각자의 긴장을 추스리고 있는 걸까. 드물게도 음성 채널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암기 과목이 아니니까, 내가 상황을 보고 판단할 것...'
노르드가 몇 번이고 강조하던 말을 마지막으로 되새기고 있을 무렵.
웅장한 나팔소리와 함께, 적병이 발을 맞춰 진군하는 땅울림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쿵쿵대는 소리가 마치 거세게 뛰는 자신의 심장소리 같아서.
쪼망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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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지... 탐지 찍혔어요! 메이지 하나!"
"오케이. 그대로 옵저빙 박아. 연습한 포인트 알지?"
돌아오는 대답에는 힘이 잔뜩 담겨 있었다. 누가 봐도 긴장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다. 다급해서 포인트를 미스하는 실수만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는 혀 차는 소리를 낼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그러게 왜 되지도 않는 여캠 할당제를 만들어 놔서 이렇게 게임 수준을 낮추는지.
적색별은 조용히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회를 준비하는 내내 수십 번은 넘게 했던 생각이다. 이제와서 그 횟수가 한번 늘어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은 게임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메이지가 있다면, 그 이상한 빌드는 없다는 거겠지. 그렇게 뒤 없는 빌드는 존재만 알고 있다면 대처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마우스를 쥐고 흔드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전면전? 이번 세트는 가져갈 확률이 높을 것이다.
매의 눈 특성을 찍은 궁병의 시야는 넓은 전장을 선명하게 포착했다. 붉은 기를 휘날리며 진군하는 아군 병사들의 앞으로 낡은 성벽이 굳건한 존재감을 뽐냈다. 성벽 곳곳에서 붉은 물결에 대항하는 것처럼 푸른 깃발이 펄럭였다.
미니맵에 표시된 아군 플레이어가 제대로 대열을 갖춘 것을 확인하고, 그는 그제서야 발을 움직였다. 궁병 운영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무엇보다 죽음을 멀리 하는 것에 있었으니까.
전열과 병사를 방패 삼아 움직인다. 전장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그의 엄폐물이며 보호구였다. 첫 세트의 긴장감이 깔려 있는지, 드물게도 진군하는 팀원들의 입은 무겁게 닫혀 있었다. 적색별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평소처럼 쓸모없는 잡담이나 브리핑 따위를 듣지 않아도 됐으니까.
웨이브가 적 궁병의 사거리 내로 들어갔다. 성벽 위로 일련의 무리가 고개를 치켜 들고, 화살이 쾌청한 하늘을 뒤덮었다. 인위적인 비가 마른 하늘을 뒤덮었다.
플레이어가 쏘는 화살과는 달리, 단발의 위력은 대수롭지 않은 공격이다. 공성 측의 웨이브를 깎아내리는 데 의의를 가지는 일종의 방어기제. 그럼에도 팀원들은 병사들을 방패삼아 신중히 접근했다. 블루팀 병사들의 화살비 사이로, 적 플레이어의 치명적인 화살이 섞여들 수 있었기에.
마음 속으로 시간 초를 재던 적색별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지금쯤. 관측 마법이 완성될 타이밍이다.
"브리핑, 빨리."
"네, 네. 응... 정문에 세 명이에요! 망치, 방패, 창... 이렇게요."
세 명.
관측은 한정된 영역을 일정 시간 동안 확인 가능한, 정찰 마법이다. 팀 게임에서 적 전략을 확인하기에 최적화된 특성 때문에 자주 사용되는 마법. 마치 관전자 시야로 전장을 보는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특성 때문에 옵저빙(observing)이란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장점이 큰 만큼 한계도 명확했다. 캐스팅에 시간이 소모될뿐더러 밝혀진 시야는 마법을 캐스팅한 메이지만 확인이 가능했다. 거기에 관측을 하는 도중에는 다른 마법을 시전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니, 오래 지속 가능한 마법도 아니었다. 보통 지금처럼 게임이 시작한 직후 적의 배치를 확인하고 전략적인 수에 대응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 변수를 최대한 줄이기로 마음 먹은 나우플 팀에 있어서는 필수 불가결한 마법인 셈이다.
"왜 세 명 밖에... 아주야, 캔슬하고 탐지 다시 돌려. 적 메이치 위치 좀 확인해봐."
적 궁병이 없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성벽 위, 푸른 병사들의 무리에 섞여 적 플레이어를 노리는 플레이는 그도 자주 써먹고는 했으니까. 남은 두 명 중 하나가 메이지일 게 분명하다면, 남은 한명은?
전략 회의에서 몇 번이나 강조하던 망갈의 말이 떠올랐다. 어떤 전략이든 가능성을 열어놔야 한다, 특히... 메이지를 활용한 초반 전략을.
"어... 성, 성문 가까이에 있어요! 외성 안 쪽 정문이랑 가까운 곳에"
"이런 씹, 야! 다 취소하고 웨이브에 배리어나 펼쳐! 곧 있으면 마법 떨어진다!"
"네? 그치만 원래 다음은..."
"닥치고 빨리!"
언성을 높이고 나서야 말을 알아 듣는다. 적색별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최근 메타에서 주로 후방에 진을 설치하는 메이지는 아군 플레이어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최대한 안전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마법을 난사해 웨이브를 지워내는 게 주된 역할이었으니까.
상대가 굳이 전열에 힘을 빼면서까지, 인원 배치를 뒤집은 이유. 궁병의 저격에 취약한 아군 메이지를 지키기 위함이 분명했다. 아군 메이지가 탐지해낸 위치를 생각하면 저건 수성 측의 스타팅 위치에 가까웠다. 시작하자마자 그 위치에 진을 설치한 것이다.
첫 판부터 장난질을.
애초부터 팀 게임 운영의 기본 개념 탑재한 적색별에게, 코치로 들어온 망갈이 강조한 건 전략적 플레이를 읽고 대처하는 방법이었다. 그걸 위한 염탐이다.
망갈은 저스틴 팀의 연습 방송을 내내 지켜보면서 변수가 될 수 있는 전략적인 수를 모두 조사했다. 그리고 그건 대처법과 함께 적색별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방송을 켜지 않고 연습한 전략이 있을지라도, 시간이 제한적인 이상 그 완성도가 높을 리는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상황도 그랬다. 극단적으로 빠르게 자리 잡은 적 메이지. 평소보다 이른 타이밍에 마법이 떨어질 게 뻔했다. 탐지며 관측이며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메이지를 유틸적으로 돌린 대가가 그대로 돌아왔다. 아군 메이지가 마법에 대한 대비를 하기 전, 상대가 쏘아낸 불덩이가 웨이브를 강타하겠지. 첫 공격 타이밍이 무위로 돌아간 셈이다.
분명 망갈로부터 전달받은 전략에 포함되어 있었던 내용이다. 파악이 늦은 탓에 첫 웨이브에 큰 피해가 발생할 건 이미 확정된 사항이다. 지금은 후속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가 더 중요했다. 빠른 마법 시전에 당황해, 아군 라인을 뒤로 당기고 다음 웨이브를 기다리는 건 최악의 선택이다. 그럼 게임 내내 상대 메이지에게 우선권을 양보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피해를 받은 웨이브를 최대한 지켜내면서 전선을 밀어넣는 방법이 유효할 터. 우선 전열을 구성한 팀원들이 피해 받는 일은 없도록 해야 했다.
"상대 메이지 외성에다 진 쳤어요! 곧 마법 떨어지니까 일단 웨이브에서 떨어지세요. 한 턴 지나가면 다시 붙을 겁니다."
"뭐? 뭔 벌써 마법이 떨어져."
"일단 쌕별이 말대로 하죠. 쟤 망갈이랑 전략 회의도 엄청 했잖아."
그건 니들이 컨텐츠한다고 농땡이 피운거지. 게으른 새끼들.
상대가 던진 전략적인 수보다, 쓸데없이 시청자만 많은 저 버러지들에게 욕설을 꽂지 못하는 이 상황이 더 짜증났다. 저번 대회처럼 나이트폴에 진심인 BJ들만 모아서 참가하는 게 좋았다. 흥행을 신경쓴다고 덩치만 커다란 머저리들을 끌어들이는게 아니라.
여캠, 대기업... 연습 내내 그를 괴롭혔던 스트레스가 다시 그를 덮쳤다. 종합 컨텐츠, 대회 흥행? 그딴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대회에 나서면 상대를 쓰러뜨리고 승리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가 되어야 할 텐데.
목 언저리로 열기와 함께 찌르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그게 적색별의 짜증을 더욱 부추겼다. 감정과 함께 번지는 열기가 목덜미를 타고 흉부로 향했다. 악순환이었다.
참지 못하고 목을 거칠게 긁어내는 순간.
하늘에서 불덩이가 쏟아져내렸다.
"와, 씨이발! 진짜잖아. 뒤질 뻔했네. 뭐 저딴 날빌을 가져왔어?"
"야! 웨이브 타죽는다!"
"안전거리만 유지하고 너무 빼지마요! 살아남은 웨이브 최대한 지키면서 갈 겁니다. 지키다가 다음 웨이브 붙으면 배리어 받고 뚫을 거예요! 라인 유지하세요!"
소리 지르면서 내린 오더가 통한 모양이다. 미니맵에서 번쩍이며 허둥지둥거리던 아군이 다시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머저리들 투성이인 팀원이었으나, 꼴에 룩까지 달았다고 기본기는 갖추고 있는 것들이었다. 어디서 본 화려한 잔기술을 보여주며 제 시청자들을 기쁘게 하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겠지.
적색별은 조소를 삼키며 전장을 살폈다. 웨이브 한 가운데로 떨어진 폭격 때문에 전장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불이 머무른 장소를 피해 진형을 다시 잡는 모습이다.
그래. 이 정도 라인이면 나쁘지 않았다. 딜레이가 커다란 작열 마법을 사용했으니, 다음 폭격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으니 상대 메이지도 초조함을 느낄 것이다. 외성만 뚫을 수 있으면, 스타팅 위치에 진을 펼친 메이지가 직접적인 위험에 노출될 테니까. 병사가 보충되면 라인을 밀어 붙여서
생각을 정리하던 순간이다. 전장을 훑던 적색별의 시야가 기묘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수성을 위해 굳게 잠겨있던 고성의 정문이, 그 묵직한 몸을 느긋하게 움직이는 모습.
이윽고 문이 열렸을 때, 적 기수가 푸른 깃발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한때 고성 점령전 트롤링의 상징이라고도 불렸던 성문 개방이다. 아군이 이 악물고 지키고 있는 고성 정문을, 내부 오브젝트 조작으로 확 열어버리는 고의 트롤링. 그대로 성문 밖으로 뛰쳐 나가면 그 움직임에 반응해 수비에 열중하던 아군 병사들도 함께 뛰쳐나갔다. 수비 라인을 일시에 붕괴시키는 대형 트롤링으로 한동안 악명을 떨쳤지. 결국 패치를 통해 아군 다수가 동의해야 개방 가능한 시스템으로 수정된 바가 있었다.
성문이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한 적색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박살난 아군 진형, 줄어든 병사, 전면전에선 무용인 배리어를 캐스팅하고 있는 아군 메이지...
전장의 상황을 읽어내린 지금, 열린 성문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명확했다.
수비 병력을 이끌고 나온 적군이 아군에게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다. 뒤로 라인을 물리지 않고, 빠른 재정비를 위해 불바다 근처에서 대열을 정돈하던 아군에게.
"이런 씹... 전부 당장 대열 갖춰요! 블루 정문열고 뛰쳐나왔다고!"
당황 섞인 반문을 들으며 적색별은 생각을 정리했다.
성문에서 뛰쳐나오는 푸른 물결에 당황하며 뒤늦게 라인을 형성하는 아군의 모습이, 마치 적군의 기습적에 당한 오합지졸 같이 느껴졌다.
이제 누가 공격이고 누가 수비인가. 든든한 성을 배후로 둔 적군과 달리, 아군 근처에는 타오르는 작열과 넓은 평야가 있을 뿐이었다. 기대할 수 있는 건 타이머에 따라 리젠되는 아군 병사들 정도. 이제 시간을 끌어야하는 쪽은 이쪽이었다.
이 모든 게 처음부터 설계된 적의 잘 짜여진 전략 같아서.
적색별은, 이를 악 물었다.
끓어오른 열기가 그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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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세트 먹겠는데요?"
"...왜 잘하지? 긴장한 것 같았는데..."
"그게 승기 잡았을 때 나오는 반응이야?"
"쪼망님이 연기를 잘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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