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96 이기고 지는 것은
* * *
전장의 하늘은 맑았다.
쾌청한 하늘이 무엇 하나 숨기지 않고 말끔히 전장을 드러냈다.
전투 구도를 전체적으로 담아내기 위해서인지, 관전자 시야는 하늘 위로 멀찍이 당겨져 있었다. 성문에서 푸른 물결이 흘러 나와 전장을 뒤덮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클로즈업이 시작됐다. 가까워질수록 멀게만 느껴지던 전장의 현장감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이윽고 옵저버가 전장의 한복판을 비추었을 무렵.
작열하는 대지를 배경으로, 적과 청의 물결이 충돌했다.
푸른 물결의 최전방에서 해빙기와 돌쇠가 앞장섰다. 한손에 든 철퇴와 거대한 워해머가 적병의 머리통을 깨부쉈다. 무너져내리는 시체를 딛고 밀려드는 적병을 푸른 옷의 병사들이 맞받아친다. 전장의 소음으로 가득찬 공간을 흥분에 찬 해설자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아, 레드팀 병사들이 속절없이 밀려나고 있습니다! 작열에 직격하고 인원수가 너무 줄어들었거든요. 게다가 후방엔 아직도 불지옥이 깔려있는 상태입니다! 이거 너무 욕심을 부렸어요. 시간을 아끼겠다고 라인을 올린 채로 유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거든요!"》
대가라는 말이 적절하게 느껴졌다.
수성을 하던 저스틴 측이 갑작스레 병사를 끌고 공세로 나선 것처럼, 점령전에서 리젠되는 병사들에겐 아주 단순한 수준의 지시가 가능했다. 전진, 후퇴. 아니면 잠시 대기하라는 간단한 명령.
쪼망의 마법이 떨어진 직후, 나우플의 오더는 아군 병사들에게 마법이 직격한 곳 근처에서 대기하라고 명령을 내린 모양이다. 성벽에서 쏟아지는 화살의 최대 사거리를 넘어선 지점. 붉은 병사들은 그곳에서 다시 대열을 만들었다. 아예 물러나 다음 웨이브를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딜레이된다는 판단이었겠지.
아마 이전 연습 경기에서 비슷한 전략을 사용한 걸 보고 대처 방안을 모색해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장은 답지가 정해져있는 친절한 시험지가 아니었기에.
문제를 제시한 저스틴 측이, 이번에도 같은 패턴으로 문제를 출제했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오답의 대가는 크게 돌아왔다.
"웨이브 다 박살난다. 병사는 바로 묶어놨는데 저 쪽 팀원들은 너무 뒤로 빠졌어. 의견이 갈렸나?"
"사람은 인공지능처럼 오더에 즉각 반응하지는 않으니까요. 컴퓨터였으면 라인 맞췄을 텐데."
"...저쪽 오더도 애가 타겠어."
일반 병사들이 플레이어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최전선에서 밀어닥친 저스틴의 전열 삼인방은 인간 믹서기처럼 병사들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마법의 여파로 생겨난 인원의 공백 때문인지, 본래 밀집된 진형으로 돌파를 견뎌야 할 웨이브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뚫린 공간으로 블루팀의 병사들이 파고 들었다.
라인이 완전히 붕괴되기 직전에야 레드 진영의 플레이어들이 전열을 막아섰다.
대열을 형성한 건 네 명이었다. 이미 망가진 진형에서, 각개격파 당하는 걸 경계했는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모여든 모습이다.
인원을 돌려 전략적인 수를 꾀하기 보다 정면에서 막아서는 걸 택했나.
네 명의 플레이어가 나란히 늘어선 모습에 신나게 적진을 헤집던 저스틴의 전열도 움직임을 멈췄다. 방패를 든 해빙기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자, 전장 한복판에서 기묘한 대치 구도가 만들어졌다.
흘끗 시선을 돌려 미니맵을 확인했다. 관전자 시점에서 바라본 미니맵은 적과 청의 표식으로 훤히 드러나 있었다. 미니맵에 보이는 블루 진영의 인원 배치를 생각하면, 지금 이 대치 구도가 이해하지 못할 선택은 아니었으나... 일개 시청자의 입장에선 전장의 급박함을 지워버리는 몰상식한 판단에 불과했다.
"그냥 들이박지."
"저게 넌 줄 알아?"
툴툴대는 칼고와 달리, 방송감이 살아있는 해빙기는 방패를 들어올린 채로 달려들었다.
실드 배쉬. 스태미나를 무식하게 소모하는 대가로 공수 밸런스를 획득한 일격이 적 창병에게 쇄도했다. 대상은 스크럽이라는 닉네임의, 장병기를 주로 사용하는 비숍 플레이어였다.
스크럽은 방패를 향해 창을 내지르는 멍청한 판단을 하지 않았다. 육중한 방패와 정면에서 승부하기 보다, 뒤로 몸을 숨기는 쪽을 선택했다. 그가 몇 걸음 물러나며 생긴 빈 공간을 커다란 타워 실드가 막아섰다. 저건... 닉네임이 뭐더라. 아무튼 비숍이었던 것 같은데.
쾅
《"첫 백병전이 이런 곳에서 발생하네요! 해빙기 선수의 실드 배시를 율무 선수가 막아냅니다. 인원수의 차이가 있는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는 건, 아군 병사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겠죠! 대치 중인 두 선수 주변으로 양 팀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양팀 궁병의 위치는"》
아, 맞아. 율무였어. 나우플 팀에 두 명있는 여성 참가자 중 하나로 기억한다. 스벅의 뒷평가를 빌리자면, 구색 맞추기 참가자였나.
내가 분석한 바로는 수준 미달의 거북이 플레이어였다. 방패를 들어올리기만 할 뿐, 방패를 활용한 운영을 전혀 숙지하지 못한 초보 유저. 다른 빌드를 플레이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처음부터 고기 방패 역할로 낙점되었겠지.
저런 류의 거북이를 상대하는 가장 편한 방법은 그냥 무시하는 것이다.
방패를 맞대고 있던 해빙기가 강하게 율무를 밀쳐냈다. 가드를 올리고 있던 상태라 자세가 무너지거나 크게 밀려나진 않았다. 몇 걸음인가 뒤로 발을 뺀 율무를 그대로 무시하고, 해빙기는 곧장 우측으로 타겟을 바꿨다. 이전과 같다. 창을 들고 있는 스크럽.
의도가 노골적이다. 움직임이 둔하고 판단이 느린 율무는 방치. 남은 전열에서 가장 랭크가 낮은 스크럽을 빠르게 정리하겠다는 판단이다. 상대팀 플레이어의 랭크와 빌드를 모두 숙지하고 있기에 가능한, 약자멸시.
나우플 쪽도 그걸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휙
무기를 들어올리고 대치하고 있던 나우플의 두 유저가 동시에 움직였다. 각자 마주한 돌쇠와 댈런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다.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 돌격의 대상이 된 두 플레이어 모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래, 마주하던 상대를 경계하기는 했다. 그렇기에 사각에서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적 궁병의 존재를 잠깐 잊어버렸을 것이다. 이건 고랭크에서조차 매번 신경쓰기는 힘든 문제였으니까.
잠깐의 시간차를 두고 돌쇠와 댈런을 향해 화살이 한 발씩 날아들었다. 눈 앞의 상대에게 대응하기 위해 움직이는 찰나를 노린 예리한 사격이다. 연사를 활용했음에도 정확도가 심상치 않았다. 랭크가 가장 높다는 말은 과장이 아닌 것이다.
기습적으로 날아온 화살이다. 간신히 회피에 성공한 건 돌쇠 뿐이었다.
《"아! 적색별 선수의 날카로운 사격이 댈런 선수의 어깨를 정확히 꿰뚫었습니다! 인원수가 부족한 저틴 측에 치명적으로 작용할만한 일격인데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마 선수가 댈런 선수에게 달려들고 있어요!"》
위급한 상황이다. 당장 댈런을 지원할 수 있는 위치의 돌쇠는 달려드는 투핸디드 유저와 궁병을 의식하느라 발이 묶인 상태. 화살에 어깨가 꿰뚫린 댈런은 무방비한 상태나 다를 바 없었다. 할버드를 든 달마라는 유저가 거리를 좁히기만 하면 단숨에 끝장낼 수 있을 터.
반대로 나우플 측엔 절호의 기회였다. 그쪽에 배팅한 나에게도.
죽음을 감지한 댈런이 전력으로 백스탭을 밟았다. 대쉬하는 적에게 뒤를 보일 수는 없으니, 최대한 간격을 벌린 채 회피나 패링 타이밍을 읽어보겠다는 판단이겠지. 아니면 밀려드는 아군 병사들의 사이로 숨어 시간을 끌 수도 있었다. 이미 부상을 당해버린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다.
그러나 상대는 엄연히 룩에 발을 걸친 플레이어였다.
할버드를 쥐고 달려드는 달마는 섣불리 공격을 내지르지 않았다. 백스탭으로 물러나는 댈런에게 맞춰, 대쉬를 유지하며 집요하게 거리를 좁혔다. 어깨를 다친 상태로는 먼저 공격하기 힘든 점을 이용한 것이다.
뒷걸음질 치는 댈런이 달려드는 상대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최대한 거리를 좁히고, 반격의 여지를 주지 않는 간결한 찌르기가 댈런의 목을 향해 쇄도하는 순간이다.
푸른 옷의 병사들 사이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나우플의 적색별이 그러했던 것처럼, 적이 행동하려는 찰나를 노린 날카로운 타이밍. 지금껏 존재감을 숨긴 저스틴의 궁병이 기습적인 순간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빗나갔다.
급소를 노렸을까. 강렬한 기세로 나아간 화살은 달마의 좌측 공간을 뚫고 허망한 파공성을 내며 공기를 갈랐다.
반면 달마가 뻗어낸 창 끝은 댈런의 목덜미를 정확히 꿰뚫고.
해설진의 어색한 침묵 속에서 전장의 소음만 도드라졌다.
"..."
"역시 돌돌주주님."
"...뭘 역시야. 이거 분위기 어쩔거야? 이득본 거 다 날아가게 생겼네."
구도가 무너졌다. 상대적으로 많은 병사와 보이지 않는 적 궁병을 의식해 수비적으로 임하던 나우플 팀이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섰다. 댈런의 죽음으로 전열의 숫자가 둘이나 차이나는 상황이다. 돌쇠와 해빙기가 룩 랭크라는 사실은 이 상황에서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룩이 포함된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으니.
저스틴 측이 빠른 상황 판단으로 후퇴를 시작한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방패를 들어올린 해빙기를 중심으로, 둘은 아군 병사들 쪽으로 이동해 황급히 대열을 갖췄다. 상대팀에 추격에 능한 빌드가 없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음성 채널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갔을지가 궁금했다. 자연스레 다른 모니터에 틀어둔 팀원들의 방송에 시선이 갔다. 금방 죽음을 맞이한 댈런의 방송 화면은 흑백으로 물들어있었다. 긴장을 뚫고 나온 분노가 표정에 그대로 묻어나왔다. 빗나간 지원 사격은 예정된 플랜이었던 모양이다.
돌주는 반대로 입을 꾹 닫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멘탈이 나가버린 모습이다. 습관적으로 화살을 날려 지원하고는 있는 것 같다만, 글쎄. 저런 상태로는 곧 죽을지도.
중계 옵저버는 돌주가 플레이하는 궁병을 클로즈업 해서 보여주는 중이었다. 부관참시나 다를 바 없는 지독한 행위. 누군지 몰라도 참 악질인데.
누적된 피해로 독이 바짝 오른 나우플 측이 블루가 후퇴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위협적으로 날아드는 적색별의 화살을 필두로, 전열을 구성하는 플레이어들이 블루 진영의 병사들을 제거하며 추격에 나섰다.
저스틴이 여기서 한 명이라도 더 잃는다면 그동안 쌓아올린 이득을 전부 날려버린다고 봐도 무방했다. 쫓는 쪽이나, 도망치는 쪽이나 필사적이기는 마찬가지겠지.
멀쩡히 추격전을 중계하던 옵저버가, 갑작스레 화면을 전환한 건 그 때였다.
그와 동시에 댈런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킬 로그가 올라갔다.
스벅 미나주
뜬금없이 벌어진, 메이지의 죽음이었다.
이미 벌어진 참상이다. 언덕 경사면에 가려진 틈으로, 주인을 잃은 마법진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로 핏물이 흘러내렸다. 로브를 입은 시신의 가슴팍에서부터 비롯된 흔적이었다.
생기를 잃어가는 마법사의 시체 위로 스벅이 올라탔다. 양손에 날카로운 예기를 번뜩이는 쌍검을 손에 쥐고, 스벅은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허공에서 교차된 두 검이 정확히 엑스자를 그렸다. 공교롭게도 옵저버가 바라보는 방항의 정면을 향하는 구도였다.
대회를 의식해서인지, 수위가 낮기는 했으나... 누구라도 인지할만한 티배깅이었다.
과연, 불지르기 전문가.
"하, 수성 팀이 뛰쳐나와서 적 메이지 킬? 극적인 장면이긴 하네. 몰래 우회하는 거 미니맵에 나왔는데 일부러 안 잡아준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진작에 전열에 붙어서 같이 싸웠으면 됐는데."
"그래서 명장면 나왔잖아. 돌주님은 기념할만한 하이라이트 하나 얻어갔네요. 핫클립 조회수 잘 나오겠어."
"악질이 심하시네요."
"...진짜 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거든요?"
인원수 차이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전면전에 나선 것도 다 메이지를 끊어내기 위해 파견된 스벅의 존재를 지워내기 위함이었을까.
그건 모르겠다. 이 팀의 연습 과정을 지켜본 입장에서, 그렇게 복잡한 수까지 생각해가며 설계를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작열 마법을 떨군 쪼망이 바로 마력 탐지로 적 메이지의 위치를 살폈을 때, 스벅과 함께 의외의 견적을 확인했을 가능성이 높겠지.
아무튼 그판단은 나우플 측에 치명적인 일격으로 작용했다. 게임 내의 모든 판단은 결과로써 증명되는 것이다. 누구의 오더였는지 몰라도 이 정도 성과를 얻었으면 승리의 주역이라 할만했다. 허망하게 희생된 댈런의 심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극적인 연출 탓인지, 해설진은 아직도 스벅의 활약에 대해 떠드는 중이었다. 반면 옵저버는 묵묵히 전장의 중심지를 화면에 담았다.
이를 악물고 몰아붙이는 공세를 피해, 점점 성문으로 가까워지는 해빙기와 돌쇠. 결국 킬을 따내지 못했다면 승기는 완전히 저스틴 팀이 잡은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적 메이지의 공백을 틈타, 아군 메이지가 신나게 전장을 주도할 테니까.
승부가 결정났다.
내 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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