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97 이기는 게 다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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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드 일회 이용권, 적립된 겁니다?"
"애도 아니고 유치하게 이용권이 뭐예요."
"애초에 니가 제안한 거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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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겼다!"
푸른 깃발이 멋드러지게 펄럭거렸다. 나이트폴 유저라면 수십, 수백 번도 넘게 보았을 승리 화면이다. 그 일상적인 화면이 유난스럽게도 커다란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의식하지 않고도 뻣뻣하게 굳어있던 팔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승리의 여운이다.
"이야, 진짜! 쪼망님 오더 지렸습니다. 처음 판단 너무 깔끔했어요. 어후, 거기서 거의 십 분 정도 로스트 시킨 거 같은데요?"
"아니예요. 스벅님 오더가 더 좋았어요. 상대 메이지 잡은 게 제일 결정적이었잖아요."
"캬, 뭘 그런 말씀을 다. 따지고 보면 그때까지 버텨준 해빙기 형님이랑 돌쇠가 더"
"와, 누구 때문에 좆될 뻔한 게임 간신히 살았네. 다들 너무 좋았습니다. 한 명만 빼고."
"킁... 빗나갈 수도 있지..."
"옘병, 그거 한 발 맞출라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뭐? 빗나갈 수도 있어? 야, 다시는 내가 니 말 믿어주나 봐라."
"너도, 너도 화살 맞았잖아. 원래 내가 쏘는 타이밍에 너도 들어갔어야 되는 건데."
"그래서 화살 빗나간 것도 내 탓이냐?"
"우..."
"어허. 이겼는데 뭘 싸우고 있어?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싸울 거면 다 끝나고 그때 싸워."
티격대는 돌주와 댈런에게도 묘한 안도가 맴돌았다. 게임 중반 아찔했던 순간이 아직도 머릿속을 아른거렸다. 그런 장면을 보여줬는데 게임까지 패배했다면, 그 여파는 안 봐도 뻔한 것이다. 지금처럼 팀원을 욕하면서 책임을 전가할 분위기도 나오지 않았겠지.
돌주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승리가 가져다 준 안도감과는 별개로, 굴욕감이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이번 게임 자신의 플레이를 모두 되짚어봐도 잘했다 싶은 장면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정적인 노림수를 멍청하게 날려먹고, 멘탈이 무너진 상태로 화살을 난사했을 뿐인... 처참한 경기력.
채팅창을 확인하지 않아도 원수같은 시청자들이 자신의 플레이를 어떻게 평가했을지는 뻔했다. 고향인 나이트로 돌아가자는 소리만 가득하겠지.
이럴려고 대회에 참가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아군이 이끄는 버스를 타고 승리하는 것보다, 패배하더라도 자신이 활약하는 그림을 선호했다. 나우플 팀의 적색별처럼, 홀로 고군분투하며 전장을 주도하는 에이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
저 창든 모지리한테 타박을 듣는 현재 상황이 불만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러면서도 반박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더 불쾌감을 부채질했다. 표출하기 힘든 짜증을 억누르고 마우스만 빙빙 돌렸다. 여전히 깃발은 힘차게 펄럭거렸다.
돌주는 그제서야 마우스를 클릭했다. 뒤늦게 첫 세트의 결과창이 튀어나왔다. 처음부터 전장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전적이 처참한 수준이다. 킬 포인트가 없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화살 적중률이 형편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실력은 아닌데. 평소 비숍4인 자신의 랭크가 극악에 가까운 팀운 때문이라 주장하는 그녀에게는 인정할 수 없는 수치였다. 허무한 첫 데스를 기록한 댈런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팀원들의 기록은 매우 준수한 편이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결과창을 훑던 돌주의 눈이 스벅의 닉네임에서 멈춰 섰다.
2킬 0데스. 대단한 기록은 아니었다. 그러나 게임 중 아군에게 가장 큰 찬사를 받았던 건 스벅이었다. 적 메이지를 죽인 것에서 비롯한, 승리를 확정지었다는 극찬이었다.
그런 건 나도 할 수 있는데.
주제파악은 그녀의 장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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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가 가져오는 쾌감은 시답잖은 불만들을 가볍게 씻어냈다. 지옥같은 패배를 몇 번이나 경험했던 스트리머가, 그럼에도 대회에 꾸준히 발을 들이미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그만큼 승리가 달콤했으니까.
"긴장감 확 풀리네, 이거. 다들 공식 방송 틀어보시죠? 아직 중계 나오고 있을 거예요. 거의 끝날 무렵일 텐데. 게임 끝내놓고 해설 구경하는 게 또 승리팀의 특권 아닙니까."
쪼망은 여운이 감도는 팔뚝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승리했다는 사실에 더해, 자신이 생각한 대로 게임이 흘러갔다는 만족감이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벅찬 마음으로 바라본 채팅창은 아직 게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간절히 승리를 바라고 있는 모습이다. 승리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게임이 뒤집힐 수 있다는 생각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 절실함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3분으로 설정한 방송 딜레이 때문에 시청자들의 반응이 한 차례 늦게 터진다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
스벅의 말에 따라 저스틴에 들어간 쪼망의 마우스가 잠시 머뭇거렸다. 공식 방송을 들어가기 직전, 그녀의 팔로우 목록 최상위에 노르드의 방송이 노출된 까닭이다. 방송 제목을 보면, 역시 대회를 중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공식 방송을 찾던 마우스 포인터가 점차 노르드의 방송으로 움직였다.
가슴 밑바닥부터 과하게 흘러 넘친 기대감이 그녀의 얼굴로 그대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끝이 살짝 쳐진 커다란 눈망울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칭찬을 기다리는 애완견처럼.
얼마나 나를 칭찬하셨을까.
딸깍
《"마지막 작열 떨어진다. 결정적이네요. 미니맵만 보면 그냥 일방적으로 압도한 게임이야, 이거. 누구한테 배웠는지 메이지가 참 많이 늘었네. 그렇지 않아요?"
"...잘하네요. 쪼망님."
"근데 코치라는 인간은 왜 못 믿었을까."
"...다음판도 내기하시죠."》
내기?
게임이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이야기를 나누더니, 그 다음엔 대화의 주제가 완전히 내기로 넘어가 버렸다. 어느 팀이 이길지를 예상하는 아주 직관적이고 단순한 내기. 노르드가 첫 세트 나우플 팀에 배팅했다는 정보는 채팅창을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천천히 쪼망의 입꼬리가 가라앉았다.
기대했던 칭찬은 없었다. 한껏 달아오른 상태로 노르드의 방송에 들어갔던 쪼망의 마음이 조끔씩 식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칭찬은 게임이 진행되는 중에 많이 했겠지. 지금은 게임이 거의 기울어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당장 다시보기를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왔다.
"대기방 팠다고 메세지왔어요. 다들 들어오시죠. 일단 들어오고 화장실 갔다오든가 하죠?"
"네, 네."
가라앉은 기색을 지우고 스벅의 초대를 수락했다.
그녀는, 칭찬이 고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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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나우플쪽 표정 살벌하네ㅋㅋㅋㅋㅋ]
[적색별 사람 하나 죽일거같은 얼굴인데?]
[양쪽 분위기 ㄹㅇ 극락과 나락]
[아 꼬우면 이기시던가ㅋㅋ]
[칼고님 입꼬리 올라간거봐ㅋㅋㅋㅋ]
[이 사람은 그냥 내기 이겨서 좋아하는듯]
[솔직히 저스틴이 이기는 것보다 노르드 이용권이 이득인거 같은데?]
[칼고 드디어 연패끊고 노르드한테 1승 ㄷㄷ]
입꼬리가 올라갔나.
칼고는 그제서야 송출 화면을 확인했다. 시청자의 말대로, 기쁜 마음이 한껏 묻어나오는 표정이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방송에서 이렇게 웃는 게 얼마만인지. 코칭한 팀이 이겨서는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유는 명확했다. 다시금 감출 수 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공식 방송은 지금 양 팀 선수들의 캠 화면을 송출하는 중이었다. 표정의 대비가 극단적이다. 이벤트 대전이니 뭐니 해도, 다전제로 진행되는 이상 반드시 멘탈이 중요해지기 마련이다.
첫 세트의 승자는 승리의 기쁨과 동시에 여유까지 얻어갈 수 있었다. 반대로 패자에게는 막중한 부담감이 추가될 뿐이다.
몇 번이나 플랫폼 대전을 시청한 칼고는 패배한 나우플 방송인들의 채팅창을 안 보고도 그려낼 수 있었다. 무수한 '나락'으로 도배되는 채팅창. 일반적인 멘탈로는 견뎌내기 힘든 것이다. 채팅창을 꺼두더라도,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겠지. 그건 정말 나락이나 다를 바 없었다.
칼고는 슬쩍 바탕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자 방송의 녹화 영상. 첫 게임이 시작되기 직전, 빌드를 확인하는 구간이었나. 잊어버리지 않게 방송이 끝나는 즉시 그 부분을 잘라둬야겠다.
노르드가 제안한 내기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방송에서 원하는 대로 상대방을 사용할 수 있는 이용권이라니. 그에겐 귀중한 기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악질에게 얼마나 많이 휘둘렸던가. 지금이야말로 인간의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할 때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칼고는 플랫폼 대전의 승패보다 노르드 이용권을 얻어낸 게 더 기뻤다. 그는 그런 제 심정을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흠, 이번 판은 누가 이길까요?"
"내기하시죠."
"내기요? 어허, 아무리 그래도 엄연히 코치진인데 무슨 내기를 합니까. 노르드님, 그럼 못써요."
"...내기."
다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기를 진 게 그렇게도 분했는지. 첫 세트가 저스틴의 승리로 끝난 뒤부터, 두 번째 세트가 시작하기 직전인 지금까지 앵무새처럼 내기를 중얼거리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귀찮기만 한 코치직을 수락한 것이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럴 때가 아니면 저 인간이 저러는 걸 어떻게 보겠는가.
"2세트 빌드 그대로 갈까요? 레드로 넘어가면 다른 거 쓰는 게 좋아보이긴 하는데."
미련이 남은 듯 계속 중얼대는 노르드를 무시하고, 칼고는 공식 방송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략 회의에는 그도 참가했으나 팀원들이 무슨 선택을 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노르드나 자신이나 방향성을 던져주었을 뿐 한가지로 확정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분석한 바로, 나우플은 독특한 빌드나 전략을 준비하지 않았다. 간혹 빌드가 바뀌는 경우가 있더라도 맡은 역할이 뒤바뀌는 수준은 아니었다. 확고한 택틱을 정해두고, 반복된 연습을 통해 전체적인 경기력 수준을 높이는 과정으로 보였다. 본인들의 체급이 높다는 걸 의식한 결과겠지.
"...스벅님 정도나 바꿀 거 같은데요."
"왜요. 쌍검 괜찮았잖아."
"방금 게임은 쌍검이 아니라 뭘 해도 똑같았어요. 기동성만 있으면."
"그 쓰레기 빌드는 이제 안 밀어요?"
"리스크가 크긴 크니까요."
리스크를 따질 거면 그런 빌드를 만들지 말았어야지.
칼고는 자신의 생각을 굳이 입으로 옮기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연습 과정에서 쪼망이 그 빌드를 플레이한 덕분에 가져간 전략적 이점이 적지 않았다. 당장 첫 번째 세트만 하더라도 상대 메이지가 마력 탐지를 사용하게끔 강제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전략에 대한 대응 속도를 크게 늦추는 것이다.
블러핑.
칼고가 생각하는 마법사죽이기는 딱 그 정도의 의미였다. 대처를 하지 않으면 게임이 망가지지만, 의식만 한다면 쉽게 막을 수 있는 빌드.
안정을 지향하는 나우플에서 메이지를 빼버리는 도박수를 쓰지는 않을 테니, 상대는 필연적으로 마력 탐지를 첫 수로 사용하겠지. 여기까지 행동을 강제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단일 빌드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수행한 셈이다.
어느새 준비가 완료됐는지, 화면이 해설진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관전자 딜레이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잠깐의 대기 시간을 거치고, 곧장 양 팀 플레이어들의 빌드가 표시되기 시작했다.
"뭐야?"
"아."
[????]
[킷따ㅏㅏㅏㅏㅏ]
[저게 왜 쟤한테나와]
[똘주도 저 빌드 배움? 와 어떻게 숨겼냐]
[아니 저년이 저걸 어떻게 해 뇌가 없는데]
[뭐임?]
[칼고 표정보면 좆된거같은데요]
'돌돌주주마법사죽이기'
"...저거, 돌주님한테도 알려준 거예요?"
"물어보길래, 잠깐 십분 정도."
사고가 정지한 잠깐의 공백 사이로, 노르드가 입을 열었다.
"일대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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