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98 주사위는 던져졌다
* * *
돌주는 자신이 있었다.
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고수할 만큼의 자신감.
완전히 생소한 빌드도 아니었다. 팀 연습 과정에서 쪼망의 플레이를 보고 바로 도전했던 빌드였다. 빌드를 고안했다던 노르드에게 직접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근접전을 꺼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원거리 특화로 재구성했다고 했나. 그것마저 그녀와 딱 맞았다.
시범삼아 운영한 랭크 게임에서도 썩 괜찮은 활약을 보여줬던 것이다. 다섯 번의 게임에서 세 번의 승리. 버스를 탔다는 시청자들의 평가와는 별개로, 그녀는 자신의 플레이가 제법 괜찮았다는 자체 평가를 내렸다. 방송을 보는 것들은 어떤 플레이를 하든 매번 깎아내리기 바빴으니까.
무엇보다 그 명료한 빌드의 목적성이 마음에 들었다. 이름 자체에 충실한 빌드였다. 궁병을 플레이할 때처럼, 시야가 좁다는 비난을 받을 일도 없었다. 애초에 적 메이지 하나만을 보고 달리는 빌드였으니.
게임이 시작되면 무지성으로 적 전열로 달려드는 멧돼지들을 피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그건 궁병을 하면서도 매번 하던 플레이가 아닌가. 상대 진영에 침투를 해야 한다는 게 조금 걸렸으나, 아군 메이지의 탐지를 바탕으로 적 메이지를 향해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돌주는 그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침투만, 침투만 신경쓰자. 그녀의 랭크 구간에서는 깊게 침투해온 적과 마주했을 때 침착하게 대응하는 메이지는 없었다. 당혹감에 캐스팅하던 마법을 취소하고 뒤늦게 움직이거나, 아예 접근한 것을 눈치채지도 못하거나.
눈에 띄게 당황하는 상대를 마주하고 있으면 우월감에서 비롯된 희열에 젖어 드는 것이다. 그 뒤는 가볍게 화살을 쏘아내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걸로 임무는 간단히 끝이 났다. 돌주가 이 빌드에 자신감을 얻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자신의 성격상, 다섯 번의 랭크 게임에서 적 메이지를 직접 마주한 것은 단 두 판에 불과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연습 게임이었으니까 예외로 칠 수 있는 거겠지.
확고한 자신감과 꾸준한 어필이 통한 모양이다. 게임을 시작하라는 진행자의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언성을 높여가며 돌주를 설득하던 스벅도 결국 그녀의 선택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돌주는 스벅의 허탈한 목소리와 실소와도 같은 웃음 소리는 신경쓰지 않았다. 딜레이 때문에 이제서야 그녀의 빌드 선택을 듣고, 발작을 시작한 채팅창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외부적 요인에 흔들려서는 중요한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게임을 캐리하는 에이스는 언제나 트롤과 종이 한장 차이로 맞닿아있는 법이니까.
익숙하지만은 않은 제 빌드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돌주는 마우스를 다시 잡았다.
두 번째 세트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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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을 가득 채운 병사들, 눈 앞에 마주한 적 플레이어,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전장의 소음, 긴박한듯 말해오는 팀원들의 브리핑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상념들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연이은 백스탭. 해빙기는 이를 악물고 적과의 간격을 좁혔다. 상대적으로 둔중한 몸놀림 때문에 뒷걸음질 치는 적을 온전히 추격하기가 힘들었다.
간격이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돌진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거리 벌리는 걸 허용한 순간, 어쩔 수 없는 사거리 차이 때문에 일방적으로 얻어맞을 게 뻔했다. 집중하느라 한껏 좁아진 시야는 사방에서 지나치는 적병의 물결 속에서도 할버드를 쥔 적 플레이어의 잔상을 놓치지 않았다. 미처 피해내지 못한 창칼이 화면에 조금씩 붉은 잔상을 남겼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움직였다.
"형님! 왼쪽, 왼쪽!"
왼쪽.
쾅!
판단을 거치지 않고 손가락이 움직였다. 돌진을 멈추지도 못하고, 좌측으로 한껏 뒤틀어버린 시야로 묵직한 대검이 때려박혔다. 간발의 차이. 다행히도 가드 판정에 성공한 모양이다. 공격을 막았다기 보다 방패를 가져다 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까. 불안정한 자세로 대검을 받아낸 탓에 몸 전체가 휘청이며 비틀거렸다.
자세를 회복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터. 그 찰나의 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위험 요소를 머릿속에서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 측면과 정면. 어디를 막아야 할까. 죽기 직전의 긴박한 상황이다.
캉!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 가깝지만 자신한테서 비롯된 소리는 아니었다. 흘끗 돌린 시야로 커다란 워해머를 내리친 육중한 거구가 포착됐다. 돌쇠였다. 돌진하는 자신의 뒤에 붙어서 따라왔나.
팀원의 도움으로 위험 요소가 하나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안도감을 느낄 형편은 아니었다. 해빙기는 불안정한 자세가 회복되는 즉시 측면으로 방패를 들어올렸다.
캉!
또 다시, 들어올린 방패로 육중한 대검이 때려박힌다.
대검을 들고 방패와 힘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겠지. 곧장 물러난 대검이 연이어 공격을 내질렀다. 빠르지는 않지만 무거운 일격이다. 마치 뿌리가 깊게 박힌 나무처럼, 제자리에 선 채로 대검의 일격을 받아내던 해빙기가 눈을 부릅떴다. 공격의 기세가 약해진 순간. 오른손에 거머쥔 철퇴를 휘두르려던 때였다.
"뒤로 빼! 적색별 안 보여!"
한 호흡 차이였다. 시끄러운 와중에도 긴박함이 담긴 스벅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미 눌려버린 공격. 선입력을 캔슬을 위해 다급히 키를 연타하고, 해빙기는 곧장 다시 가드 자세로 들어섰다.
팅, 하고 대검이 아닌 무언가가 커다란 타워 실드의 표면을 두드리고 떨어졌다. 화살. 또 한번 사선을 넘어섰다는 섬뜩한 안도감이 그의 등으로 내려앉았다.
여전히, 상황은 최악이었다.
"큽, 똘주야! 빨리 잡아야 돼, 궁병 없으면 정면 힘싸움 못이긴다고!"
긴박감이 넘치는 전열에서의 전투와는 달리, 멀리서 바라본 전장은 지지부진한 고착 상태에 머물러있었다. 전열에 힘을 싣고 미는 라인을 형성하려던 저스틴은 지금 외성을 공략하는 데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후열로부터 붉은 병사들이 물살처럼 흘러들면, 푸른 라인이 휘청이며 점차 밀리는 듯 물러났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거세게 밀어 붙이던 물살은 중간부터 힘을 잃어버리고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오기 일수였다. 적과 청이 팽팽한 줄다리기처럼 비등하게 맞섰다. 지속된 대치 구도에서 초조함을 느끼는 건 언제나 공성 측이었다.
궁병의 부재가 크게 다가왔다. 일부러 두어 번의 웨이브를 축적한 상태로 단숨에 뚫고 들어갔음에도 성벽 근처로 도달하기가 힘들었다. 만만치않은 적 전열과 대치를 하고 검을 나눌 때면,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이 목숨을 위협했다. 한 명이라도 쓰러지는 날엔 그 구멍을 비집고 적 전열이 달려들어 진형이 뭉개지고 라인을 뒤로 물려야 했다. 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저스틴의 전열은 아군 병사들을 방패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벌써 몇 번이고 반복된 패턴이다.
고성의 벽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야, 거기 끽해야 호위 병사가 전부니까 그냥 빨리 제끼고, 이런 씨발!"
펑
또 한 차례, 내성에 위치한 탑으로부터 보라빛 구체가 떠올랐다.
"전열 빠져서 중심선 맞춰요! 쪼망님 쉴드 빨리요!"
마치 무중력 공간을 떠다니듯 부유하던 구체에 점차 속도가 붙었다. 볼링공을 조금 확대한 정도의, 그다지 거대하게 느껴지지 않는 크기. 그러나 나이트폴을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저 조그마한 폭탄의 위력이 어떠한지는 모두 잘 알았다. 둥둥 떠다니던 구체는 이내 무서운 기세로 전장의 한복판을 향해 날아들었다.
쿵
콰아아아!
적색 물결이 모여있는 중간지점에 떨어지던 구체는, 허공에 나타난 투명한 장벽에 막히더니 곧장 커다란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온갖 소음으로 가득하던 전장이 순간적으로 압도적인 폭발음에 집어 삼켜졌다.
간신히 폭발을 저지하는 듯 싶었던 장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저지력을 상실하고 산산조각나며 무너졌다. 남아있는 폭발의 여파가 웨이브의 반절 가량을 쓸어갔다.
앉는 단축키를 누른 채 후폭풍을 견디던 스벅이 곧장 마우스를 움직여 시선을 돌렸다. 불행 중 다행이게도 킬 로그는 올라오지 않았다. 병사의 손해는 막심하지만, 팀원까지 휩쓸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대규모 마법이 떨어진 것도 벌써 두 번째였다. 마나붐이라는 명칭으로 유명한, 광범위 폭발 마법. 아군 메이지가 수비로 일변하게 된 원인이다. 적 메이지는 그 어느때보다 멀쩡히 전장에 포격을 때려박고 있었다.
'마법사죽이기'. 저 년한테는 그 이름도 아까웠다.
"그, 금방 도착, 앗!"
당황이 묻어나오는 목소리.
스벅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뭉그러진 구도 속에서 아군이 기다리는 건 적 메이지의 암살에 성공했다는 비보 뿐이었다. 전 경기에서 활약한 아군 메이지가 적 메이지의 마법을 의식해 배리어만 사용하고 있다는 걸 고려하면, 그것 외에는 정말 믿을 구석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들려오는 소식은 별로 희망적이지 않았다.
"확실히 말해! 지금 뭔 상황"
휙
또, 또 화살.
스벅의 뇌리에 적색별이라는 닉네임이 뚜렷하게 새겨졌다. 전에 퀸을 찍었다던 궁병은, 수성 측에서 제 진가를 뽐내고 있었다. 특정하기 힘든 위치에서 예상하기 힘든 타이밍에 화살이 날아들었다.
초반 대치 상황에서 섬뜩한 각도로 쇄도하는 화살을 몇 번 마주한 뒤로, 스벅은 적극적인 공세를 포기했다. 양 옆으로 아군 병사를 끼고 있지 않으면 저 날카로운 화살에 의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게 뻔했으니까. 그렇게 수비적으로 플레이 했음에도 몇 번인가 목숨을 잃었다. 쌓인 데스 카운트만큼 공세는 지체되고 있었다. 쌍검을 사용하는 자신의 빌드로는 대응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음성 채널에서 들려오는 곡소리를 생각하면 그건 자신한테만 해당하는 사항이 아닌 것 같았다. 방패를 들고 있는 해빙기가 그나마 괜찮은 형편일까. 저 무서운 궁병은 그야말로 전장을 주무르는 중이었다.
화살이 제 몸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재차 떠올리는 것이다. 우리 궁병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냐고. 지금은 암살자라고 해야 할까. 아니, 지금껏 병사 하나 죽이지 못한 저 머저리를 암살자라 부르기도 애매했다. 밥 버러지, 트롤, 머저리, 등신...
"탑 도착했어! 나 이, 이제 올라갈거야, 조금만 버텨!"
조금? 저 망할년이 진짜.
벌써 게임이 시작하고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야 저런 브리핑이 나오는지. 마법사 죽이기라는 빌드를 직접 해보지 못한 스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노르드의 방송에서 봤을 때, 쪼망과 팀 연습을 했을 때. 그때는 저 빌드가 저렇게까지 많은 시간이 소모되는 빌드라고는 느껴본 적이 없었다.
긴박한 전투 현장 속에서 언제 승전보가 들려오나 하고 미니맵을 볼 때면, 매번 쥐꼬리만큼 이동해있는 꼴에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마치 지 혼자 극악한 난이도의 잠입 액션 게임을 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메이지를 제외한 적 플레이어는 모두 아군 전열과 맞붙고 있음에도 저런 속도라니. 저 정도로 느려터진 걸 보면 거북이라는 별명은 돌주에게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스벅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화면 상단의 킬 로그에서 적 병사에게 살해당한 돌주의 닉네임을 보더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미 절반쯤은 이번 세트를 포기한 마음이었다. 다음 게임은, 안전하게 정석으로 가자는 다짐과 함께.
간단한 조작으로 적 병사 하나의 목을 자르고 뒤로 빠진 스벅이 다시금 언성을 높였다. 전투에 집중하는지 다른 팀원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번에 실패하면, 더는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
쿵
스벅의 우측에 서있던 아군 병사 하나가 무언가에 밀려 쓰러졌다. 병사들의 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스벅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병사들이 서로에게 창과 칼을 겨누는 사이에서, 거대한 방패를 든 플레이어가 발을 구르며 돌진하고 있었다. 대번에 그 정체를 파악한 스벅의 인상이 한층 더 썩어들어갔다. 이번 게임 내내 자신에게 들러붙듯 쫓아오는 저 둔해빠진 거북이에게 혐오감을 느끼기 직전이었다.
비숍 하나로 룩을 틀어막을 수 있으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겠지. 게임이 흘러가는 국면을 보면 그게 또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스벅은 쌍검로 저 두꺼운 방패를 돌파할 자신이 없었다.
"돌쇠야, 너 거북이 마크되냐!"
"지금은 힘듭니다! 할버드랑 교전 중이에요!"
기대하고 물어본 질문은 아니었다. 난잡한 전투 구도에서 적에게 등을 돌리고 편한 상대를 찾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절대 맞서기 싫은 상대를 앞두고 내뱉은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저 방패와 대면하면서, 한편으로는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적색별의 화살까지 고려해야 했다. 싸우기 전부터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더 도망친다고 해결될 일은 없는 상황이다.
빠르게 결단을 내린 스벅이 양손에 쥔 검을 들어올렸을 때였다. 한동안 잠잠하던 킬 로그가 번쩍이며 갱신됐다. 스벅의 눈동자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돌돌주주 미나주
"돼, 됐다! 나 메이지 잡았어, 잡았다고! 씨팔, 심장 떨려, 나."
1세트의 데자뷰, 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이미 지연될 대로 지연된 이 게임에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건지.
확신은 없었으나 스벅은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반격이다, 걍 배째고 밀어붙여!"
이미 물러날 시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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