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99 언제나 끝맺음이 화려하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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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메이지 암살에 성공했음에도, 당장에 극적인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전장의 유불리는 여전했다. 게임 내내 견제를 받지 않던 적색별은 활 시위를 쉬지 않고 당겼고, 아군 전열은 매서운 화살을 피해 아군 병사의 뒤로 몸을 숨겼다. 여태 답답했던 상황을 참지 못하고 외친 스벅의 반격 선언은 곧장 현실의 벽에 틀어막혔다.
절대적인 인원수 차이. 공세의 희망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유지한 라인은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후방에서 메이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법도 한데, 눈 앞에 대치한 상대는 흔들리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메이지의 지원 없이도 쉽게 뚫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다는 거겠지. 피해가 누적된 붉은 병사들은 여전히 고성의 두터운 문을 두들기지 못했다.
흐릿한 하늘 아래, 구름을 뚫고 새어나온 빛을 받아 오롯하게 선 고성이 이전보다 드높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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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드디어, 기나긴 잠행 끝에 돌주 선수가 민아주 선수를 암살해냈습니다! 팀원들이 이 소식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시작한 여정이 십분이 넘어서야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동안 저스틴 전열은 수적 열세를 가지고 버텨냈거든요! 드디어 저스틴 팀의 반격이 시작되는 걸까요?"》
[마법사죽이기(15분걸림)]
[ㅅㅂ 지혼자 잠입액션을 쳐찍고 앉았노 텐련이]
[결국 성공한게 더웃기네ㅋㅋ 상대 메이지 병1신이냐?]
[와 씨,발 잠깐 팀원들 보이스 듣고 왔는데 걍 보살인데]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개쓰레기 빌드네요 ㅎ]
[닥쳐라 방장이었으면 3분컷이다 법첩년들 다꺼져]
"차라리 뇌 비우고 정면 대치나 하는 게 나았겠는데요."
나도 칼고의 의견에 동감이었다. 정말 유감스럽게도.
빌드가 노출된 이후부터, 이 게임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돌주에게로 향했다. 당연했다. 당장 방송에서 표시되는 빌드의 이름부터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지 않나.
아주 명료한 빌드명과, 그에 걸맞게 목적성이 명확한 빌드. 해설 중 한 명이 빌드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무튼 화려한 데뷔전이 될 수 있는 무대는 완벽히 깔린 셈이다. 남은 건 플레이어의 역량에 달려 있는 일이었고.
그게 문제였다. 플레이어의 역량.
옵저버의 관심을 독차지한 돌주가 게임 내내 보여주는 플레이는, 그야말로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어쩐지 성에 침투하는 과정부터 삐걱거리더니. 빌드의 기동성을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고성 내부를 돌아다니는 적병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것 하며, 메이지를 향해 이동하는 경로 선정까지 마음에 차는 게 하나도 없었다.
빌드 숙련도를 따지기 이전에 맵에 대한 이해도부터가 문제였다. 고성이라는 전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환장할 동선. 은신 특성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해서 적병을 마주치면 겁쟁이처럼 우회해서 시간을 지체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누구보다 빠르게 메이지의 존재를 지워내야 할 빌드였다. 그럼에도 적 메이지가 마법 사이클을 몇 번이고 돌리게 허용해주는 꼴이란. 이건 메이지를 찾아 돌아다니는 사냥꾼이 아니라 전투를 피해 달아나는 겁쟁이에 가까웠다.
플레이를 보면서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었던가. 그 지루한 개인 화면을 견디지 못한 옵저버가 금방 흥미를 잃고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을 정도였다.
나는 속이 터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저건 빌드 망신이다. 명예 훼손이야...
"이거 승산있나. 늦어도 너무 늦었는데. 메이지 리젠되기 전에 정문은 뚫어야 희망 있잖아요."
"...제로는 아니네요."
"저거 뚫을 수 있다고? 뒤 없이 올인 해도 궁병 때문에 막힐 거 같은데?"
"지금 쪼망님이 캐스팅하는 게 쉴드가 아니면요."
"아, 맞네. ...근데 너무 힘든 판단이잖아."
"힘든 상황이니까요.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 러쉬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으면, 적 메이지 배제하고 공격 스펠 땡기는 게 맞았죠. 하기 힘든 판단이긴 하네요. 지금이 마지노선인 것도 모를 수 있으니까."
그래, 지금이 사실상 마지막 공격 타이밍이다.
벌써 네 번째 웨이브다. 정해진 타임 아웃은 없었으나, 정돈된 팀 게임에서는 공성에 필요한 최소 한도의 시간이라는 게 존재했다. 지금 저스틴 팀처럼 정석적이지 않은 조합이면 제한 시간은 더욱 줄어들었다. 곧 나타날 다음 웨이브와 함께 외성을 뚫어내지 못하면 수성 측의 승리가 거의 확정된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다. 사활을 걸고 공격해야 하는 타이밍이 있다면 지금이겠지.
문제는, 한창 치열한 전장에서 살아남기에 급급한 팀원들이 이런 판단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적 메이지가 다운된 것이 절호의 기회라는 건 다들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늘 높이 줌 아웃을 한 옵저버가 적극적으로 라인을 밀어붙이려고 달려드는 붉은 진영을 포착했다.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동안 적색별의 견제로 몸을 사리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적 플레이어를 향해 적극적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한점 돌파를 노린 것인지 넓게 퍼져있던 팀원들이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지난한 대치 구도를 끊어내려는 생각이겠지.
당연히 나우플 팀도 그걸 멍청하게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게임 시작 전 마크할 대상을 정해둔 듯, 저스틴의 움직임에 맞춰 나우플 플레이어들이 따라 움직였다. 조금씩 늦기는 했으나 멀리서 지켜보면 정확히 저스틴의 진형에 대칭이 되는 구도를 만들려는 것 같았다.
미리 중앙으로 움직인 건, 나우플의 룩 플레이어들이다. 쉽사리 뚫리지 않는 그들이 대열을 구축하는 시간을 벌었다. 그 와중에도 적색별이 쏘아낸 화살이 전장을 꿰뚫었다.
산개한 팀원들이 뭉쳤다는 건, 넓은 전장을 살피던 적 궁병의 시선이 한 데로 집중될 수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각개격파에 실패한 이상 유불리는 나우플 측으로 기울었다. 4 대 4로 대치한 전열에 화살이 날아드는 섬뜩한 파공성이 연이어 들려왔다. 방패를 든 해빙기를 엄폐물 삼아 몸을 뒤틀고는 있었으나... 이 괴로운 대치 구도가 어떤 결말로 향하고 있는지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예정된 파국.
말 그대로, 서서히 죽어가는 중이었다.
플레이어들의 몸에 상처가 하나 둘 늘어날 무렵, 돌연 옵저버가 하늘을 향해 시선을 들어올렸다.
흐릿한 하늘. 짙은 구름이 가득한 하늘은 이전보다 더 어둡게 느껴졌다. 구름은 비를 가득 머금고 있는지, 금방이라도 땅을 향해 내려앉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하늘에선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구름이 가린 하늘 너머로 간간히 희미한 햇살이 몸을 비집고 어둠을 밝혔다. 그러나 빛은 금새 구름에 가려졌다.
파직
컴컴한 하늘 한 가운데, 푸른 빛이 일렁거렸다.
모습을 숨기듯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던 스파크가 이내 점점 몸집을 불렸다. 푸른 빛이 점멸하는 간극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 하나를 집어삼킬 듯 사납게 짖어대는 벼락이 천지에 제 존재감을 뿜어댔다. 혼란스러운 전장 속에서 눈 앞의 적에게 집중하던 사람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영락없는 대마법의 전조.
벼락이 내리쳤다.
꽈광!
성문 앞, 한점에 모여들어 죽을 기세로 달려드는 레드팀에 대항해 나우플이 집결한 장소였다. 거창하기 짝이 없는 마법의 전조에 비해, 완성된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은 그야말로 찰나에 가까웠다. 넓은 시야로 전조를 파악한 적색별이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을 때는 이미 늦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듯 선명히 떨어진 번개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검게 태웠다.
기동성이 부족해 빠른 대응이 불가능했던 플레이어들이 즉사했다. 커다란 타워 실드를 든 율무와 투핸디드를 거머쥔 짱덕이었다. 간신히 직격을 피해 살아남은 플레이어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감전의 여파와 함께 섬뜩함이 같이 흘렀다.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나우플과 달리 미리 마법의 존재를 알고 대응한 저스틴의 피해는 경미했다. 최대한 적을 묶어두기 위해 마지막까지 적과 대치하던 해빙기와 돌쇠가 감전 상태이상에 휘말린 게 저스틴 측이 입은 가장 큰 피해였다. 벼락과 함께 떨어진 굉음의 여운이 서서히 가라앉고, 제 모습을 되찾은 전장은 이전과 달리 고요했다.
벼락이 떨어진 잔해 너머로 붉은 병사들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장서서 물결을 막아내던 장벽에 공백이 생겼음을 눈치챈 걸까. 성벽 위로 물러난 덕에 벼락을 피한 적색별이 밀려오는 병사를 훑었다. 전장의 지평선 저 너머로, 새롭게 나타난 붉은 물결이 곧장 고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벌써 다음 웨이브가 올 타이밍이었나.
전장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허망함이 담겼다.
"스펠 선택 너무 좋았네요. 바로 공격 스펠 캐스팅한 것도 좋았는데, 라이트닝이면 저 상황에서 거의 최선이지. 이번 대회 MVP는 이걸로 확정된 거 같죠? 메이지 수준 차이가 제일 심해."
"...그렇네요."
"왜 그리 시무룩해요. 따지고 보면 제자가 활약한 건데. 그 빌드 망한 게 그렇게 충격적이에요?"
"시무룩한 거 아닙니다."
"그래요? 아, 내기 때문인가. 그런 건 좀 질 수도 있죠.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었잖아. 내가 운이 좀 좋았던 거지."
"...쪼망님 잘하네요."
"말 돌리는 거예요, 지금?"
전장을 뒤집은 건 메이지의 결정적인 마법 한 방이었다. 불리한 대치 구도를 깨부수는, 정확하고 강렬한 벼락. 적의 중심부에 정확히 포격이 떨어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적색별을 제외한 적 전열을 전멸시킨 저스틴 팀은 곧장 성문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템포를 늦추지 않고 내성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쪼망의 캐리였다. 그 상황에서 방어 스펠을 선택하지 않은 대담함. 선택한 공격 스펠도 매우 적절했다. 일반적으로 공성에 사용되는 폭발형 마법이 아니라, 범위가 좁은 대신 발동이 빠른 형태의 주문을 사용했다.
적 플레이어를 맞추기가 쉽지 않아서 사용 빈도가 낮은 마법이었다. 그걸 대회에서 사용한 걸 보면, 메이지에 대한 이해도가 그만큼 높은 거겠지.
개인 기량으로 게임의 구도를 뒤집기 힘든 저랭크 팀 게임에서 메이지가 가지는 존재감은 과연 남다른 것이었다. 왜 이런 메타가 만들어졌는지 다시금 이해시켜주는 장면이었다. 차오르는 불쾌함에 흘러나오는 비죽임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밀집된 대형으로 상대방이 모여들게 유도한 것은 팀적인 콜이었을까. 결과론적으로 스펠의 파괴력을 극대화시킨 훌륭한 전략적 플레이였다. 여기까지 메이지가 주도해서 오더했다면, 그건 이미 룩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다.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일부러 인 게임 오더는 확인하지 않았는데. 쪼망의 시점으로 다시보기를 돌려 볼까 싶었다.
고성, 성벽 안쪽에서의 전투는 이전보다 훨씬 속도감이 붙었다. 이런저런 장애물로 좁아진 구역에서 플레이어의 개인 기량이 빛을 발했다.
저스틴의 가장 선두에서, 스벅이 드디어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양손에 쥔 검이 연달아 번뜩였다. 어설프게 반격을 노리기 보다는 기동성을 활용해 치고 빠지는 식의 플레이. 공격권을 쥐었을 때는 스태미나가 허용되는 한계치까지 적을 몰아붙였다. 숙련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플레이 스타일이다.
"그럴싸하네요. 제자라 그런지."
"제가 생각보다 잘한다고 했잖아요. 반응속도는 좋아서 공격 중간에 회피 타이밍을 잘 잡아요."
과연, 칼고의 말대로 연이어 검을 휘두르던 스벅이 적의 반격에 반응해 순간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저스트 프레임. 정확한 타이밍에 입력해야 나타나는 회피 모션이다.
선입력된 공격이 나가고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공격 모션을 보고 반응한 게 분명했다. 상대의 무기가 비교적 속도가 느린 대검이라는 걸 감안해도 꽤나 훌륭한 회피였다. 완벽한 회피는 곧 공격의 첫 모션으로 기능 했으므로, 이어진 연격에 말려버린 상대는 별다른 대응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꺾여버렸다.
수비하기 적절한 지형을 포기하고 급하게 달려들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것도 치명적인 죽음이었다.
기세를 탄 저스틴 팀이 파죽지세로 몰아붙였다. 성문에서의 전멸이 멘탈에도 영향을 준 것이 분명했다. 제대로 된 대형을 갖추지도 않고 달려드는 탓에 차례대로 쓰러지기 일수였다. 이 와중에도 쉬지 않고 이동하며 활 시위를 당기는 적 궁병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와 생각이 통했을까, 옵저버가 적색별 쪽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줬다. 0데스. 몰입하는 팬이 있다면 눈물이 나는 상황이겠군.
속절없이 밀려나던 나우플 팀이 간신히 레드팀을 멈춰 세운 구간은 내성에 들어서는 입구에 위치한 쌍둥이 탑이었다. 탑 위에 자리 잡은 적 궁병을 견제할 방법이 거의 없고, 입구가 좁은 탓에 수비하기 적합한 지형이다. 성문을 지키는 과정에서 그렇게도 시간을 잘 끌었건만, 한번 무너진 방벽을 복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제 속이 타는 건 나우플 측이었다.
최후의 결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결정적인 한 수는 의외의 장소, 의외인 인물의 손에서 튀어나왔다.
돌돌주주 적색별
방송을 감싸는 적막. 중반부터는 그 존재도 까먹었으면서,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 채팅창을 뒤덮는 그 기묘한 존재감을 보면 나도 헛웃음만 흘러나오는 것이다.
플랫폼 대전에 퍽이나 어울리는 마무리였다.
내가 만든 빌드라고 인터뷰하지는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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