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102 넓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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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새벽부터 일찍 올라온 태양은 좀처럼 내려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서 온전히 내리쬐는 태양 빛 때문에 이른 저녁 도시의 풍경은 낮과 다를 바 없었다. 오후의 열기를 그대로 품은 아스팔트에서 여전히 이글거리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쨍쨍한 하늘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도시의 건물들이 조금씩 조명을 밝히기 시작했다. 어둠이 깔릴 무렵 휘황찬란한 빛을 발할 조명들은, 태양의 존재감 아래에서 소심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나섰다. 이내 희고 붉은 갖가지 불빛이 허공에 섞여들었다.
여름 날 초저녁의 풍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녹아들어 있었다. 토요일이다. 가볍게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인도를 가득 채웠다. 불쾌한 접촉을 피해 숨어든 골목에서도 도심지의 소음은 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 곳에나 평이하게 깔린 소리가 마치 배경음처럼 느껴졌다. 일상이 된 소음은 더 이상 귀를 괴롭히지 않았다.
인파가 가득한 인도의 한 가운데에서, 한 남성이 팔을 들어올렸다.
핸드폰을 붙잡은 손이 한동안 분주하게 움직였다. 왼손이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도 주머니에 머문 오른손은 도무지 반대쪽 손을 도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는지, 초조한 듯 바닥을 두드리는 발이 점차 속도를 더했다.
잠시간 작은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남자가 돌연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깊게 주름진 미간과 삐뚜름하게 치솟은 눈썹.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얼굴이었다. 사정없이 짜증을 표출하고 있는 탓에 비교적 뚜렷한 이목구비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빠르게 고개를 들어올린 남자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방에 가득한 인파가 물결처럼 흔들거렸다.
이내 남자의 시선이 멈췄다.
멀지 않은 거리였다. 가로수 그늘이 내려앉은 작은 벤치 앞. 찾던 대상은 얄밉게도 지근거리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컷팅한 흔적이 남은 청 핫팬츠를 입고, 상의는 루즈핏의 흰색 크롭티를 입은 채였다. 어깨에 닿을 듯한 길이의 단발이 샛노랗게 물든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여성은 남자와 눈을 마주하고는 곧장 혀를 내밀었다. 혀를 내민 여성의 눈이 재밌다는 듯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남자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남자는 인파를 헤치며 걸었다. 큰 보폭으로 걸어간 덕분에 여자와 가까워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혀를 내민 채로 이리저리 손을 흔들던 그녀가 돌연 남자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갈색 빛이 감도는 눈동자에 명백한 조롱의 감정이 깃들었다. 적어도, 남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서 튀어나온 손가락을 꺾듯이 잡아챘다.
"악! 야, 살살 잡아! 내 손가락 가느다란 거 안 보여?"
"이런 씨,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아주 장난질을 치시네요? 뭐 만나자마자 뻐큐질이야."
"얼굴 구겨진 거 좀 피라고 그랬지! 쪼끔 늦은 거 가지고 아주 지랄이야, 지랄."
"지랄은 밥 먹듯이 지각하는 니가 지랄이고, 똘주야. 응?"
댈런, 태민의 입에 욕설이 담겼다. 꺾인 손가락을 부여잡고 불만을 품은 듯 샐쭉하게 쳐다보는 꼴이 아니꼬웠다. 이 더운 날 약속 시간을 무려 십 분이나 어겨 놓고는, 제 잘못을 생각지도 않고 장난부터 걸어오는 것이다.
알고 지낸지가 이 년이 넘어간 지금도 얼굴을 마주하는 날에는 울컥하고 감정이 격해질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건 그놈의 미운 정 때문일까.
키 차이가 머리 하나만큼 나는 탓에 가까워진 거리에서 샛노란 머리가 내려다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머릿결이 망가진 꼴이 눈에 훤했다. 몇 번이나 탈색을 반복한 모양이다. 어쩐지 방송을 볼 때마다 머리 색이 바뀌더만.
"머릿결이 아주... 관리 안 하냐? 탈색 한번 더 하면 빗자루로 써도 되겠어."
"아, 씁. 여자한테 머릿결 지적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니가 여친이 없지."
"어쭈. 그럼 니 볼 빵빵한 거부터 지적하자. 돼지 새끼가 다 됐네. 야식 얼마나 쳐먹는지 안 봐도 뻔하다, 야."
발끈한 주먹이 복부를 가격하기 전, 거리를 벌린 태민이 긴 팔을 뻗어 희주의 이마를 밀어냈다. 다혈질 기질은 어디로 가지 않았는지 달려드는 기세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래봤자 운동을 하지 않는 비루한 육체는 헬스로 단련된 그의 팔 하나도 감당하지 못했다. 손쉽게 뒤로 밀려나는 꼴에 헛웃음이 튀어 나왔다. 이 년의 남자친구는 대체 뭐가 좋다고 사귀고 있는 걸까.
희주의 무의미한 발버둥은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열기와 습도 아래 빨리도 사그라졌다. 그 잠깐의 다툼에 탈력감을 느낀 듯, 목재 벤치에 쭈그러진 그녀가 불평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과하게 몸을 젖힌 탓에 허리선이 그대로 노출되는 모습이었다. 태민은 슬쩍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서, 약속 장소 어딘데? 예약해놨대매. 더워 죽겠으니까 빨리 들어가자."
"누굴 네비로 아나. 니 때문에 딜레이된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모였겠다."
"엥? 뭘 또 오바싸고 있어. 스벅 오빠가 있는데. 우리가 무조건 빨리 도착할 거야. 그 오빠 절대 시간 맞춰서 안 와. 괜히 불판인 줄 알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아니냐며 따지려던 태민이 그냥 입을 닫았다. 불쾌함을 유발하는 여름 철의 열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기나긴 말다툼이 시작될 것이 뻔히 예상됐기 때문이다. 입을 열면 무슨 욕설이 튀어나올까 두려워, 그는 그저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약속 장소를 다시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이런 일이 있을까봐 예약된 식당과 가장 가까운 역을 약속 장소로 정해둔 것이다. 쪼망이나 스벅과 함께 하려던 의도가 완전히 빗나간 지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으나... 뒤늦게 도착해 장소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전화를 했을 똘주를 생각하면 이게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럴 경우 전화를 받는 사람은 저 년이 가장 편히 생각하는 자신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익숙한 손길로 지도 어플을 킨 태민이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근데 거기 유명한 데야? 예약하기 힘들었다고 엄청 유난 떨던데."
"나도 몰라. 가격대 높은 것만 알고."
"흐응. 칼고님 실물 보는 게 기대되네."
"...니 남자친구 생각 안하냐?"
"야, 니가 내 남친이야? 무슨 여기서 남자친구 얘기가 나와. 잘 생긴 사람 보는 것 정도는 그냥 할 수 있는 거야. 애인 있다고 덕질 못하는 건 아니잖아."
"예. 그러시겠죠."
스벅이 예약을 했다던 식당은 상점가의 중심부에 위치한 듯했다. 인파를 헤치고 들어간 번화가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저녁 시간을 맞아 이제 막 영업을 시작한 주점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들어서는 모습이었다.
도로에서 멀어졌기 때문인지, 도심지의 소음에는 엔진 소리를 대신해 왁자지껄한 말소리가 섞여들었다.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걷는 희주 때문에 태민은 몇 번이나 보폭을 맞춰 속도를 줄여야만 했다. 얇은 셔츠를 입었음에도 등판에 조금씩 땀이 차올랐다.
다행히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스벅이 계속해서 강조한 이유가 있는 건지, 유명하다던 식당은 간판부터 또렷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나섰다. 덕분에 태민과 희주는 헤메는 일 없이 곧장 건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커다란 상가 건물의 절반쯤을 차지하는 식당은 입구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냉방이 활발히 돌아가는 듯했다. 스며드는 냉기에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가 빠르게 식어갔다. 그 기분 좋은 서늘함에 치솟던 불쾌함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저, 윤성호 이름으로 예약했는데요. 일행이 먼저 왔을 거 같은데."
"윤성호 씨, 맞으신가요? 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미 도착한 팀원이 있는건지, 데스크에 앉은 접객원은 곧바로 태민을 안내했다.
일자 형태의 복도는 티 하나 없이 깔끔했다. 천장 곳곳에서 내리쬐는 은은한 조명 빛이 광택이 흐르는 묵빛 타일에 반사되어 부드럽게 맴돌았다. 어디에 설치된 건지, 사방에서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이 은은한 조명과 더불어 침착한 분위기를 만드는 듯했다. 어느 곳에서나 고급스러움이 묻어나오는 인테리어였다.
이런 분위기가 영 불편하게 느껴지는지, 안내를 받아 이동하는 잠깐의 사이 희주는 태민의 뒤에서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고 간략히 대답하던 태민이 그 성가심에 점차 언성을 높일 무렵이다. 손님의 태도에 신경쓰지 않는 듯, 제 할 일에만 집중한 접객원은 어느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벨을 눌러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데스크로 돌아가는 접객원을 뒤로 하고, 태민은 문을 열었다.
방 안의 공간은 생각보다 넓었다.
전반적인 인테리어는 복도와 비슷했다. 광택이 흐르는 검은 빛 타일로 둘러쌓인 방의 중앙에는 기다란 목재 테이블이 위치하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창문 때문에 답답할 수 있는 내부 공간에서 개방감이 느껴졌다. 태민을 따라 들어온 희주의 입에서 외마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야, 뭐 그리 멍청하게 서있냐? 얼른 와서 앉아."
"아, 안녕하세요."
늘어선 의자에 앉아있는 인원이... 다섯 명.
변명할 여지 없는 꼴찌였다.
아직 메뉴를 주문하지는 않았는지, 테이블에는 물을 비롯한 기본적인 세팅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음식이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다. 태민은 늘어선 면면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냈다. 모니터로 눈에 익은 모습이 직접 마주한 순간에 새롭게 덧씌워졌다. 그 묘한 어색함에 주저하듯 접근하던 순간이다. 태민의 뒤에 있던 희주가 갑작스레 앞으로 뛰쳐나갔다.
"쪼망잉! 실제로 보니까 훨씬 귀엽잖아. 우와, 볼 엄청 말랑말랑해."
좌측 세 번째 자리였다. 앳된 얼굴의 여성이 느닷없는 희주의 습격에 당황해 동그란 눈망울을 크게 확대한 채로 웅얼거렸다. 희주의 양손이 볼을 만져대는 탓에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말이 뭉그러지고 있었다.
올려 묶은 갈색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리저리 방황하던 팔이 이내 희주의 팔꿈치 쪽으로 향했다.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휘둘리는 모습이, 내성적인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했다.
"얌마, 쪼망님 당황한 거 안 보여? 너 거기 앉지 마라. 밥 먹는 내내 귀찮게 할 거 뻔히 보이네. 그냥 칼고님 옆에 앉아."
스벅, 성호의 말이었다. 희주에게 한껏 휘둘리고 있는 쪼망과 같은 라인의 자리에 앉은 상태였다. 모처럼의 외출에 신경써 꾸미기라도 한 건지, 멋드러지게 올려 넘긴 앞머리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평소 방송에서 보여주던 모습과 비교하면 괴리감이 넘쳐난 까닭이다.
내추럴함을 추구한다고 씻지도 않고 캠을 켜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인 양반이 아닌가. 이 모습을 저 방송 시청자들이 봤다면 무슨 소리를 내뱉을지. 매콤함으로 소문난 채팅창을 떠올리던 태민이 내심 혀를 찼다.
밀어내는 손길을 저항하며, 쪼망의 곁에 앉겠다며 조잘거리는 희주는 기어코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착석했다. 연신 싱글거리며 쪼망에게 장난을 치는 모습이, 쪼망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싶었다. 태민은 자연스레 비어있는 오른쪽 자리를 채웠다. 옆자리에는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낯선 얼굴인, 칼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태민은 플랫폼 대전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칼고의 방송을 시청한 적이 없었다. 의도해서 피한 것은 아니었다. 방송하기를 업으로 삼고, 방송 시청을 취미로 삼는 여느 스트리머와는 달리 그가 보는 인터넷 방송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 좁은 영역에 칼고가 속해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실력파 나이트폴 플레이어로 유명한 칼고의 얼굴은 그에게도 새롭게 다가왔다.
여름 날의 열기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남색의 긴팔 셔츠를 입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나, 칼같이 접어 올린 셔츠의 소맷자락을 보면 코칭을 하던 때의 깐깐한 성격이 옷차림에도 묻어나오는 듯했다.
앉은 자리에서 다시 인사를 건내는 자신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오는 중에도, 무표정한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깃들지 않았다. 그제서야 오는 길에 칼고의 여성 팬이 많은 이유가 있다며 호들갑 떨던 희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여자들은 대개 묵직한 남성을 좋아하는 법이 아닌가. 태민은 왠지 모를 거부감에 앞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다 온 거 같은데. 음식 시킬까?"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자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해빙기의 말이었다. 모인 사람들의 대답들 듣고는, 스벅이 호출 벨을 눌렀다.
옆자리에 앉은 칼고의 손이 테이블에 올려둔 스마트폰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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