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3화 〉 103 ­ 한 걸음 들어왔어 (103/243)

〈 103화 〉 103 ­ 한 걸음 들어왔어

* * *

"그... 노르드님은 못 온다고 하셨나요?"

"음. 아마 그럴 거 같아요. 지금까지 별 말씀 없는 거 보면."

비싸고 맛 좋은 곳이라 소문났다는 누군가의 말마따나, 입맛이 까탈스러운 칼고에게도 식당의 고급스러운 음식 맛은 썩 괜찮은 편이었다.

튀긴 문어 다리가 가미된 샐러드도, 미디엄으로 잘 구워진 스테이크도 맛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기분을 내냐며 스벅이 시킨 레드 와인도 목 넘김이 훌륭했다.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창 너머로 도시의 야경이 비치기 시작했다. 적절하게 조절된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스며들듯 방 안을 채우고 있는 것까지, 흠 잡을 데 없는 훌륭한 세팅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리 가슴 한편이 찝찝한지.

칼고는 괜스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자, 쪼망님도 한 잔 더 하셔야죠."

"아, 네. 감사합니다."

애초에 이런 자리를 선호하는 성격이 못 되는 것이다.

처음 어색함이 맴돌던 방의 분위기는 알코올이 들어감과 동시에 어느새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퍽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풀어진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동참해, 가벼운 마음으로 입에 발린 말을 나눌 법도 하건만. 삐뚫어진 성격은 도무지 협조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우스웠다. 이 괜한 심술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그게 또 자신의 헛된 기대에 불과했다는 걸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앗. 칼고님 또 스마트폰 보고 있다."

맞은 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다.

고개를 들어올린 순간 포크로 파스타를 빙빙 돌리고 있는 돌주와 눈이 마주쳤다. 다른 한쪽 손은 턱을 괸 채였다. 술을 마신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취기가 올라오는지 얼굴에는 홍조가 감돌고 있었다.

"저희 제자라고 선 그으시는 거예요? 폰만 보고 있으면 어떡해."

아직 또렷한 목소리에는 사람을 얄밉게 만드는 특유의 조롱기가 섞여있었다. 연습 과정에서도 팀원들의 언성을 몇 번이나 높아지게 만든 원흉이었지. 저렇게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걸 보면, 방송용 컨셉이 아니라 진짜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돌주님은 한결같으시네요."

"에? 뭐예요, 그게. 저 꼬시려고 하시면 안돼요. 임자있는 몸이걸랑요."

다행히 얼빠진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댈런이 돌주의 이죽거림에 발끈하여 칼고를 대신해 대화를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돌주와는 영 상성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칼고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는 눈 앞에 놓인 접시에서 스테이크 한 점을 입으로 옮겨 넣었다. 아직 온기를 머금은 고기에서 육즙이 흘러넘쳤다. 들이붇는 술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와인잔은 빨리도 투명한 자신의 몸뚱이을 드러냈다. 유난히도 술이 잘 넘어가는 날이다.

자리를 훑어보면 테이블 곳곳에서 한창 이야기 꽃이 피어나는 중이었다. 같은 스트리머라는 공감대와 지난 대회의 경험이 모자랄 것 없는 화제를 제공한 모양이다. 한번 풀어진 분위기는 쉽게 꼬이거나 무거워지지 않았다.

스벅은 제 말을 성실하게 들어주는 쪼망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웃으며 대화를 주도했다. 돌쇠는 맞은 편의 해빙기와 꾸준히 잔을 나눴다. 다부진 체격과 각진 얼굴을 보면, 와인이 아니라 소주잔이 어울리는 데도.

칼고는 말 없이 와인 잔을 다시 채웠다. 조금씩 일렁이는 액체는 잔의 굴곡에 따라 흔들리며 영롱하게 빛났다. 마음 속에선 작게 후회가 피어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피셔맨이나 이어갈 걸 하고.

스윽­

인기척도 없이, 방의 문이 열린 건 그 시점이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던 칼고가 가장 먼저 발견했다. 모인 사람들 중 누군가가 벨을 눌렀나 하는 의구심을 품은 채였다. 작은 문을 지나 사람 한명이 온전히 드러났을 때, 그 의구심은 거품처럼 사라졌다.

홀로 무채색의 공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여성이었다.

공간을 은은하게 채운 조명 빛이 그녀를 타고 흘렀다. 검은 생머리와 같은 색의 블라우스 때문일까. 얼굴부터 목선으로 이어지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가 도드라졌다.

오뚝한 코와 길게 뻗은 눈매 때문인지 날카롭다는 느낌이 드는 인상이었다. 피곤한지 반쯤 감긴 눈에선 어떠한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날렵하고 뚜렷한 이목구비와는 별개로, 눈가에 드리운 음영 때문에 그녀는 조금 초췌해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흑백 일색인 의상이 조명을 받아 묘하게 빛을 발했다. 반걸음 앞으로 다가와 살며시 눈썹을 찡그리는 것까지, 사소한 움직임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방에 들어선 그녀는 성가시다는 듯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소매가 넓은 블라우스의 팔을 걷어 올리자 하얀 손목이 드러났다. 무심히 주변을 훑던 그녀의 눈이 칼고와 마주쳤다.

샐쭉하게 움직이는 눈매가... 웃고 있는 건가.

"어... 어?"

느닷없이 등장한 방문자의 존재로 작은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문 앞으로 고개를 돌린 스벅의 입에서 다소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변과 상관 없다는 듯 와인잔을 기울이던 해빙기도, 댈런과 한창 언성을 높이던 돌주도 낯선 방문자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제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대회를 준비하는 연습 기간 동안 몇 차례나 들었던 목소리. 기계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음성은 평소보다 선명했으나 그 평이한 어조는 언제나와 같았다.

"...노르드님?"

"네. 늦었네요."

미안하다기보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내뱉은 말이었다. 말본새에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는 건 방송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뭔가가 불편하게 느껴졌는지, 조금 미간을 찌푸린 그녀는 이내 댈런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그때까지도 방 안의 정적은 여전했다.

칼고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렀다. 사람 목소리로 얼굴을 추정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지만, 이건 너무 예상외이지 않나.

홀로 부풀렸던 망상 중에는 확실히 이런 종류의 상상도 있더랬다. 자신을 볼 때마다 툭툭 건드리는 신원 미상의 여자가, 사실은 엄청난 미인이었다는 그런 다소 사춘기스러운 망상.

외모가 어떻든 지금의 관계와 태도를 유지하자는, 나름의 고뇌가 담긴 다짐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의미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고민 따위가 필요한 상대가 아니었다. 칼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그대로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그제서야 방 안이 소음으로 가득찼다.

주인공은 늘 마지막에 등장하는 건지, 아니면 마지막에 등장한 사람이 곧 주인공으로 자리 잡는 건지. 물고 물리는 원인과 결과는 뒤바꿔 놓더라도 교묘히 어울릴 때가 있는 법이다.

노르드의 등장 이후 그녀는 곧장 화제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애시당초 아무도 나타나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다. 평소 캠방송을 즐겨하지는 않더라도, 이 자리에 참석한 스트리머들은 모두 방송에서 몇 번이나 얼굴을 공개한 적이 있는 방송인들이었다. 노르드를 제외하곤 모두 그랬다.

설사 야외 방송이 예정되어 있지 않다고는 하더라도, 얼굴 공개는 커녕 신상 공개도 거의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신비주의로 가려진 방송인이 아무 예고도 없이 뒤풀이에 불쑥 참가하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평소 뭔가 벽이 느껴지게끔 대하던 노르드의 태도는 그 덤이었다.

따라서, 직접 마주한 순간 그녀를 향해 질문이 쏟아질 것은 어느정도 예정된 사항이었다.

"노르드님? 혹시 본명이... 아. 혜진이요. 혹시 사석에서 혜진씨라고 불러도 될까요? 흐흐, 감사합니다. 혹시 나이가..."

"아, 이 오빠 진짜 징그럽게 왜 이래? 혜진씨 부담스러워 하는 거 안 보여? 이거 드세요. 아직 안 식어서 먹을 만 해. 와, 피부 왜 이리 좋아요? 화장품 어떤 거 쓰는지 물어봐도 되죠? 에, 괜히 숨길 필요 없잖아."

"그, 저 쪼망인데요... 앗, 네. 최, 최민아예요. 네! 그럼 너무 좋죠!"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무안한 느낌이 들 정도의 열렬한 성원이었다.

질문의 폭격을 맞으면서도 그녀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목을 축이기 위해서인지 몇 번이나 와인잔을 기울이면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은은한 조명과 검은 빛 위주로 인테리어된 방의 색감이 그녀의 존재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간혹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할 때면,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마치 빛을 머금은 와인의 색깔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이다. 저게 올 줄 알았다면 조금은 늦게 도착해 남는 자리에 앉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옆자리는 아니더라도, 맞은 편에만 앉았어도 이리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을 텐데.

좌측에 댈런이 자리 잡은 이상 그걸 비집고 말을 건내는 것도, 어색하지 않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결되지 않는 불편함이 마음 한편에서 스물스물 기어올라왔다. 그러게, 오겠다는 문자 하나만 해줬으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칼고는 물이 든 컵을 단숨에 들이켰다. 오랫동안 방치한 물은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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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없다.

"와, 근데 혜진씨 진짜 동안이야... 몇 살이라구요? 에? 스물 둘? 진짜로? 그럼 나 언니라고 불러줘."

어느새 옆자리로 자리를 옮긴, 볼이 빨갛게 변한 돌주가 내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도.

"이것도 좀 더 드세요. 늦게 오셨는데 더 드셔야지. 뭐 계속 와인만 먹고 있어요. 어우, 손목봐. 그냥 뼈만 있는 수준인데? 야, 돌쇠야. 벨 좀 눌러봐라. 먹을 것 좀 더 시키자."

맞은편에 앉은 스벅이, 눈빛을 빛내며 이런저런 접시를 밀어오는 것도.

사방을 둘러싼 팀원들의 눈초리가 전부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게, 단순한 자의식과잉이 아닌 것 같다는 점도.

모두 머리가 아프기는 매한가지인 점이었다.

인간의 외모, 성별, 나이 따위는 당연히 관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혜진으로 변한 순간 인간 관계에 지대한 변곡점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내가 간과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걸 수 차례나 고민하고,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낯선 대우는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르드로 방송을 할 때는 상관없던 일이다. 무수한 익명의 시청자가 다소 눈 뜨고 보기 힘든 찬양을 읊어댄다고 한들, 나 또한 익명성의 가면을 쓰고 분위기에 따라 흔들거리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대면하는 관계는 달랐다. 매번 서로에게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벽을 치는 관계에 찌들었던 것이다. 이런 식의 적극적인 접근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좋고 나쁘고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수용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관심이란, 생전 처음으로 느끼는 낯섦과 함께였다.

그렇다고 밀어내는 것은 너무 우스운 일이지 않은가.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해 이런 자리를 찾았을 터인데.

차마 어쩌질 못하고, 깨작깨작 손이나 움직이는 꼴이란 무엇인지. 애써 태연한 척을 가장하며 와인잔만 비우고 있는 제 모습이 확실히 나잇값을 못하는 것 같기는 했다. 아니, 혜진의 나이에 따르면 오히려 적절한 대응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래도, 오랜만에 마시는 와인은 맛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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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2차, 2차 갈거죠? 이렇게 모이기도 힘들잖아. 맥주나 한 잔하고 노래방으로 갈까요?"

식사가 끝났을 때는 기세등등 하늘을 점거하던 태양도 자취를 감춰버린 뒤였다.

와인을 몇 병인가 시켰기 때문인지 테이블에서 일어난 사람들 중 몇은 얼굴에 취기가 돌았다. 정작 대작을 하는 것처럼 연거푸 잔을 기울였던 해빙기와 돌쇠는 멀쩡하고, 입만 열심히 나불대던 돌주와 댈런의 얼굴만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이다. 앞장 서 방문을 연 돌주가 히히덕거리며 데스크로 향했다.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선 칼고는 습관처럼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테이블에 팔을 걸친 탓인지 접어올린 소맷자락이 조금 흐트러진 것 같았다. 선 자리에서 소매를 펴 내리고, 다시 접어올리는 번거로운 과정을 이어나갈 때였다. 하나 둘 방 안을 빠져나가는 팀원들을 뒤로 하고 인기척 하나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접어올린 왼쪽 소맷자락을 살며시 끌어당기는 희고 가는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노르드, 혜진이 속삭이듯 읊조렸다.

"나 왔어요."

가슴에 뭔가 턱하고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현실에서도, 뭐라 대답하기 힘든 맥락없는 말을 내뱉는 건 똑같구나 하고.

"...뭐라는 거예요?"

"아니, 물어봤잖아요. 나 오는 거 맞냐고."

"하. 그걸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대답할 거면 진작에 해줬어야죠. 밥 먹으면서 폰만 보고 있었잖아."

"아."

손가락을 떼어내고는 눈을 마주한 혜진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모습은, 사람의 인상 자체가 이렇게 단숨에 뒤바뀔 수 있나 싶었다. 날카롭고 차갑게 느껴지던 얼굴이 한순간에 활짝 피어올랐다.

확실히, 극적인 변화였다.

"그럴 줄 알고 대답 안 했어요."

생글거리는 모습이 평소처럼 얄밉게 느껴져야 할 텐데.

칼고, 성현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하고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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