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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화 〉 108 ­ 친구가 많으면 (108/243)

〈 108화 〉 108 ­ 친구가 많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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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마음을 먹고 한걸음 내딛고 나서도, 막상 변화라는 건 체감하기 어려웠다. 외견으로 보이지 않는 변화는 더더욱 그랬다. 일상에 묻어든 사소한 것들 한두 개 정도야 티도 잘 안 났다.

시간이 흐르고 흘렀을 때 누적된 변화를 한번에 직시한 뒤에야, 이리도 많은 것들이 변했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잠기는 것이다. 누가 봐도 극적인 변화가 아닌 이상에야 대개 그랬다.

이미 그려진 그림에 옅은 물감으로 색감을 추가하는 수준의, 사소한 변화들. 짧은 순간 눈에 띄게 변화하는 것은 한창 성장할 나이의 어린 아이들 뿐이겠지. 특히나 변화에 둔감한 나는 변화를 인지할 때면 항상 새삼스럽다는 감상을 품고는 했다.

지금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건... 변화를 인지한 순간이 바로 지금이기 때문일까.

"노르드님? 이, 이쪽에 좀비들 몰려와요! 어떡해, 벽 다 뜯겨져 나가요!"

"...마우스 왼쪽 버튼을 누르면 총알이 나간답니다."

"에, 놀리지 말고 도와주세요!"

거의 울먹거리는 수준으로 웅얼거리는 쪼망의 말을 듣고는, 그제야 미니맵을 확인했다. 레이더 형태의 맵 북동쪽에서 아군을 상징하는 푸른 빛이 반짝거렸다. 거리를 생각하면 멀지 않은데도, 과도하게 많은 장해물 때문에 접근하는데 30초 가량은 필요할 것 같았다.

그와중에 창문으로 접근하는 좀비 두어 마리의 얼굴에 총알을 꽂아넣었다. 구식 라이플의 노리쇠를 잡아당기는 찰진 모션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좌우를 체크해 더 이상 달려드는 놈들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쪼망이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으에, 이거 피 엄청 튀어요! 잔인해!"

"나이트폴하는 쪼망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네요."

"아니아니. 저는 그래서 메이지 위주로 하잖아요."

"태워 죽이는 건 잔인하지 않다?"

"...그게 아니구­"

얼마 지나지 않아 아둥바둥 비틀거리는 쪼망의 캐릭터를 발견했다. 멍청하게 헛손질이나 하고 있는 걸 보면, 벌써 주어진 총알을 다 써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건물 외벽에 달라붙듯 접근한 좀비들은 꽤나 흉흉한 기세로 입구를 차단한 판자 따위를 걷어내고 있었다. 바로 창문에 접근한 나는 몇 번이고 방아쇠를 당겼다. 강렬한 격발음과 함께 좀비 무리의 머리가 시원하게도 터져나갔다.

타격감은, 역시 합격점이다.

[노르드 등장!]

[쪼망 점마는 뭘했길래 좀비들이 멀쩡히 살아있냐?]

[어허 마법이 없어서 그래]

[이래서 '메'들이 안되는거임ㅋㅋㅋㅋ 마법없으면 그저 민간인]

[와따 에임 존나 잘맞추네]

[이 사람 못하는 게임이 뭐임?]

[지뢰찾기 씨1발아]

[아ㅋㅋ;]

틱­

"아. 총알."

"엇, 이... 이거 큰일난거 아니에요?"

"붙어서 칼질하세요. 닿는 판정 나오기 전에 뒤로 빠지는 식으로."

시원하게 쏟아지던 격발음이 끊겼다. 총알이 다 떨어진 것이다. 높은 난이도 때문인지, 한 명이라도 실수를 하면 탄알이 부족하게 설정된 모양이다.

나는 바로 정글도로 무기를 교체해서 가장 근접한 좀비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호쾌한 강공격은 마치 커다란 둔기를 내리친 것처럼 무른 머리를 터뜨렸다. 총 게임 치고는 근접 처형에 제법 정성을 쏟았다. 여러모로 디테일에 집착하는 게임이었다.

교차되는 좀비들을 피해가며 칼질을 하는 건 지루한 작업이었다. 높은 난이도는 게임 플레이에 여러 제약을 가하기는 했으나, 아직 초반에 불과한 단계에서 좀비들의 움직임은 느려터진 수준이었다.

덕분에 총알이 없는 우리도 그리 어렵지는 않게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수 있었다. 이게 뭐라고 중간 중간 비명을 지르듯 소리 치는 쪼망이 인상적이었다. 나로써는 저 비명 소리가 더 호러에 가까운 것 같은데.

실내에 좀비들의 시체가 쌓이기 직전이 되어서야, 핏자국 가득한 글자로 '첫 번째 밤이 지나갔습니다.'라는 클리어 문구가 튀어나왔다. 해치운 좀비의 숫자나 입힌 피해량 따위가 화면 구석 결과창에 출력되는 모습이다.

그걸 무시하고 상점 인터페이스를 뒤적거리던 나는, 총기의 가격대를 확인하고는 금방 창을 닫았다. 아직 원하는 무기를 구매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수준이다.

그때쯤 한숨을 내쉬고 목을 가다듬은 쪼망이 입을 열었다.

"흐, 후. 이거 생각보다 너무 무섭네요. 제가 좀비 게임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어서... 으, 죄송해요."

"죄송할게 뭐가 있어요."

"아, 아뇨. 그래도 제가 추천받아서 가져온 게임인데, 너무 트롤하지 않았나요?"

"쪼망님은 워크라이 하면서 탱킹하셨잖아요. 일인분은 충분해요."

"워... 워크라이요?"

[ㅋㅋㅋㅋ야만전사냐 무슨]

[비명 좀 찰지기는 했어]

[근데 쪼망이 에임 좋은편아님? 세비지도 하던데]

[당황해서 난사하다가 총알오링남ㅋ]

[좀비 리얼하긴한데 과하게 무서워하네ㅋㅋ]

[존나 침착한 노르드랑 비교되서 오히려 좋아]

두 번째 스테이지를 준비하는 주둔지 내에서, 나는 쪼망과 협력 플레이를 하고 있는 지금에 대해서 생각했다. 당장은 이게 대수롭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누군가와 이렇듯 자연스럽게 합방을 하게 되는 날이 올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이렇게 이른 시기에.

큰 마음을 먹고 내딛었던 한걸음이 이렇게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맥이라는게 늘어난 것이다. 베타코드 친구창에 새로운 이름들이 하나 둘 들어서는 것도, 사적인 메세지를 주고 받는 스트리머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도 그랬다.

방송을 하던 어느 날 쪼망이 코옵을 하자며 게임 하나를 들고 온 것까지. 모두 내 새로운 인간 관계가 긍정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표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부를 인맥이 칼고 밖에 없던 외톨이 인생에선 벗어난 셈이다. 술자리에서 연신 생글거리며 오렌지를 받아 먹던 쪼망의 얼굴이 생각나 친밀감이 올라가기도 했다. 과연 한번이라도 얼굴을 마주했다는 사실이 크기는 한가보다. 인간 관계가 이렇게 스무스하게 풀려나간다는게 조금은 생소하게 와닿기도 했다.

군중 속에서 또 구석진 곳으로 숨어드는 것이 내 천성이었을 텐데.

"저희 다음 라운드 시작할까요?"

바짝 긴장한듯 억눌린 목소리가 생각을 끊고 다가왔다. 쪼망의 저런 목소리는, 플랫폼 대전 당시에나 들어봤던 것 같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비교적 최신에 가까운 게임이라 확실히 그래픽이 리얼하기는 하다만, 이게 그렇게 움츠러들만한 게임인지는 의문이었다. 요즘 좀비를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본인이 무섭다는데 뭐 어쩌겠냐마는.

"쪼망님은 괜찮아요?"

"넵. 이번에는 진짜 잘 해볼게요. 방금은 정말 긴장해서 그랬어요. 저 원래 에임 되게 좋거든요. 노르드님도 혹시 새비지 하시나요? 제가 새비지만 하면­"

스타트.

《두 번째 밤이 시작되었습니다.》

음산한 여성의 목소리가 시작을 알렸다.

"우왓! 그렇게 갑자기 시작하시면, 저 자리도 안 잡았는데!"

"이 겜은 한 자리 고집하는게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보는게 좋아 보여서요."

"...그런가요? 아직 한판밖에 안 했는데 벌써 파악을­"

"사실 더 듣기 싫어서 시작했어요."

"..."

머뭇거리면서도 뭐라 웅얼거리던 쪼망은 이내 좀비 무리가 다가오는 창가로 움직였다. 첫 스테이지 보상으로 탄을 추가했으니 이전처럼 금방 빌빌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건물 좌측은 이대로 쪼망에게 맡겨두고, 나는 반대쪽을 지켜보는게 좋겠다.

쪼망이 가져온 게임, 데드 얼라이브(Dead Alive)는 이름부터 노골적인 좀비 게임이었다. 일인칭 FPS게임의 감각으로 좀비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그런 클리셰적인 게임.

컨셉이나 설정 자체는 특기할만한 부분이 없으나 훌륭한 조작감과 타격감을 지닌 괜찮은 게임이었다. 솔로 플레이부터 4인, 16인의 대규모 합동 플레이까지. 직접 해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꽤나 잘 만들었다고 표현해도 되는 완성도다. 아무튼 클리셰라는건 대개 기본치를 끌어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쪼망과의 2인 협동 플레이는 작은 건물에서 일정 시간 밀려드는 좀비들을 밀어내닌 일종의 디펜스 게임이었다. 매판 죽인 좀비 수에서 비롯된 점수로 정산을 받고, 그렇게 얻은 자원으로 무기나 지원 아이템을 새롭게 강화하는.

단순한 구조였으나 그렇기에 좋았다. 잠깐 뒤적거린 무기 목록을 보면 위쪽에는 미니건 따위의 흉악한 무기도 존재했다. 아마, 게임이 진행될수록 그에 걸맞는 특별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몰려왔다.

아무튼, 그때까지 버텨야 된다는 전제가 붙기는 하지만.

아직 교체하지 못한 구식 소총은 불편하면서도 짜릿한 손맛을 선사했다. 볼트 액션은 뭔가 한발 한발에 영혼을 담아 쏜다는 감각이 있었다. 냉병기도 아닌데 이토록 손맛이 느껴지는 것은 꽤나 신기한 일이었다. FPS 게임을 할 때면 매번 반동이 강한 무기를 찾게 되는 것도, 그런 감각이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리라.

탕­, 철컥­.

격발음과 노리쇠를 잡아젖히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퍼졌다. 화면을 통해 느껴지는 타격감과는 별개로, 좀비 무리을 쏴죽이는 행위는 다소 기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총알 한발이 소진될 때마다 달려드는 무리 중 하나의 머리통도 터져 나갔다.

유저를 곤혹스럽게 만들기 위한 디자인인지, 좀비의 움직임이 뭔가 기묘했다. 앞으로 움직이면서 과하게 머리를 휘젓는다. 이 요상한 추가 동작은 헤드샷을 노리고 쏘아낸 탄알을 낭비시키기 위함이겠지. 첫 스테이지에서 쪼망이 총알을 낭비한 것은 당혹감뿐만 아니라 이런 원인들이 작용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물론,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였다.

[ㅅㅂ 왜 안 빗나가]

[타겟원할때도 느꼈는데 진짜 에임 미친놈임ㅋㅋㅋ]

[년임]

[좀비새끼들 헤드뱅잉 왜케 덜하냐? 사람차별하나]

[연사총쏘는거 보고싶다]

[그만완벽해 노르드!!!]

[손캠좀 켜주세요]

[이 여자... 못하는건 지뢰찾기뿐이다]

나름 유명한 게임이라 플레이해본 시청자들이 많은 모양이다. 좀비 무리가 정리되고 잠깐 남은 공백기를 활용해 채팅창을 훑어봤다. 기회가 된다면, 시청자들을 대거 모아 16인의 대규모 협동 게임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그럼 내 방송 최초의 시청자 참여 컨텐츠가 되는 셈인가.

슬쩍 후열에 위치해, 용감하게 앞장 선 시청자들의 뒤통수에 실수인 척 오발탄을 쏴대면 그것도 재밌을 것 같다. 죽은 동료도 좀비가 되어 달려든다고 하던데. 죽어버린 시청자가 어느 시점으로 관전에 들어갈지가 관건이었다. 죽은 자신의 시체가 움직이는 광경을 보는 편이 훨씬 즐겁지 않을까.

반복 작업에 이상한 곳까지 잡념이 뻗어갈 무렵, 여태 조용하던 쪼망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 노르드님. 저, 저 물렸어요."

"아. 확인할 수 있겠네."

"...네?"

"아니에요. 어딘데요? 구하러 갈게."

웃음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게 조심하며, 나는 쪼망이었던 것이 위치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훌륭한 게임은 좀비가 되는 순간 꼼짝도 못하고 좀비의 시점으로 묶여버리는 모양이다.

당연히 좀비로 변해버린 자신의 캐릭터를 조작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따끈따끈한 좀비가 되어, 빨갛게 물든 화면으로 내 캐릭터를 바라보면서 울먹이는 쪼망의 목소리를 듣는 건 예상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었다. 금방 죽이기 아까울 정도로.

그래서 죽이지 않았다. 플레이어를 인간으로 되돌릴 혈청 따위를 찾는다며 다리 두 짝에 총알을 박고는 주변의 다른 좀비부터 정리했다. 쓰러진 채로 이쪽으로 기어오는 쪼망이 조금 애처롭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살아있는게 어디인가.

혼자 움직였기 때문일까. 해가 뜨기까지는 유난히 오랜 시간이 필요한 두 번째 밤이었다. 좀비 마지막 생존자로 꿈틀거리는 쪼망을 죽이면 과연 리젠이 될까 고민하다가, 나는 결국 정글도를 내리쳤다.

플레이어의 부활은... 음.

좀비가 되어버린 쪼망의 다시보기는 제법 재밌었다고만 말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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