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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화 〉 114 ­ 뉴비는 일단 하고 싶은 걸 골라 (114/243)

〈 114화 〉 114 ­ 뉴비는 일단 하고 싶은 걸 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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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때는 언제나 두근거리는 설렘이 있었다.

게임을 시작하는 과정부터가 힘겨운 고난 길이었다. 여러 사람이 돌려 읽어 다 헤진 게임 잡지 따위에서, 빛 바랜 사진이나 설명을 읽으며 기대를 쌓아올리는 게 첫걸음이었다.

그중에서도 내 관심사는 주로 돈을 주고 구입해야 하는 패키지 게임에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 게임을 돈주고 구매한다는 건 굉장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두 푼씩 힘겹게 모은 용돈으로 몇 달에 걸쳐 게임 하나를 구입하면 정말 큰 일을 하나 성공한 셈이다.

그 지난한 저축의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기대치를 축적했겠는가. 그쯤되면 게임 하나를 실행하고 오프닝을 보는 일련의 행위가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질 때 느끼는 커다란 감흥은 시간이 지나도 가슴 어딘가에 남아있기 마련이다. 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때면 케케묵은 그 시절의 감동이 어렴풋이 떠올라 아른거렸다.

당시 느꼈던 생생한 감정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추억이라는 건 대개가 그런 것이다. 그 아련한 향기만으로도 몇 번이고 비슷한 경험을 쫓아다니게 되는, 묘한 마력을 담고 있는 것.

탕­, 탕­.

콰광­!

온갖 총탄이 난무하는 게임의 오프닝을 보면서 하기에는... 너무 감상적인 생각일까.

"총알을 피하네요? 그냥 평범한 FPS 장르인줄 알았는데."

[직업군마다 갈림]

[센세 모르는척 컨셉질하지마세요]

[초창기엔 에임만 좋으면 다 씹어먹는 근본 갓겜이었는데... 어쩌다 날파리같은새기들만 늘어나서...ㅠ]

[실상은 위버 늘어나고 유저 수 늘어났죠? 근본주의 틀딱들 날뛰는건 나이트폴이나 새비지나 똑같음]

[지금도 에임 중요한건 똑같아용..]

[진짜 뉴비인가보네]

새비지는 아무래도 내가 예상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게임이었던 것 같다.

게임을 실행함과 동시에 재생된 시네마틱 영상은 딱 보기에도 완성도가 높았다. 표지에서 봤던 폐허가 된 도시를 배경으로, 소수의 인원이 건물 하나를 사이에 둔 채로 대치하는 장면이었다. 산발적으로 빗발치는 총성과 더불어 간간히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경음을 따로 삽입하지 않은 건 시선을 오롯이 전장에 집중시키기 위한 연출일까.

카메라는 이곳저곳이 헤진 밀리터리 복장을 입은 남자를 중심에 두고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건물 외벽을 엄폐물로 삼아 숨어있던 남자는, 총성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수류탄을 던지고는 반대편 고층 건물을 향해 내달렸다. 범상치 않은 장면이 튀어나온 건 그때였다. 다음 엄폐물을 향해 내달리던 남자가 눈먼 총알에 맞았을 때, 마치 영상을 거꾸로 재생하는 것처럼 남자의 시간이 뒤로 돌아간 것이다.

그걸 기점으로 전장 곳곳에서 기이한 역장 따위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얼핏 보라빛이 감도는 역장에 휘말린 사물들이 보이지 않는 힘에 구겨지듯 우그러졌다. 총알에 맞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 듯한 남자는, 불규칙적으로 생성되던 역장을 피해 필사적인 뜀박질을 시작했다.

남자의 움직임을 빠짐없이 포착하던 카메라가 점차 남자에게서 멀어졌다. 하늘 높이, 마치 도시 전체를 담아내듯 솟아오르는 모습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도시에서는 총성과 폭발음이 뒤섞인 소음이 아득하게 흘러나왔다. 무너진 건물 사이사이에서는 기이한 역장이 내비치던 빛처럼 초현실적인 색채를 띄는 형형색색의 불빛이 점멸하며 번쩍였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반쯤 멸망한 세상.

'Savage'. 타이틀은 꽤나 거창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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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시청자들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새로운 게임을 실행할 때 노르드는 매번 꼼꼼하게 설명을 읽어내리는 스타일이었다.

오프닝만 해도 그렇다. 성격 급한 사람들이 키보드를 연타하며 넘기고는 하는 오프닝이나 시네마틱 영상을, 노르드가 스킵해서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처음보는 것들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완성도가 훌륭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스토리가 형편없기로 유명한 졸작의 엔딩 영상을 보면서도, 그녀는 혹평을 남길지언정 그걸 스킵하지는 않았다.

노르드 나름대로 게임을 즐기는 방식이었던 모양이다.

그게 영상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었다. 예컨대 게임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튜토리얼이나 작은 툴팁 따위도 마찬가지였다. 넘겨도 그만인 그것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는 행위는 무슨 게임을 하더라도 적용되는 그녀의 습관이었다.

서브 스토리가 담긴 메모나 스크립트 등을 수집하는 게임이라도 하는 날에는, 그것 전부를 빠짐없이 읽어내리는 탓에 진저리를 치는 시청자들도 적지 않았다. 업적 같은 건 신경쓰지도 않으면서 왜 그런 건 또 다 읽어보는지. 그렇게 게임 진행에 차질이 생기면 노르드의 채팅창에서 눕는 이모티콘이 도배되고는 했다.

당연히 노르드는 그런 시청자들의 반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노르드가 출중한 실력으로 막히는 구간 없이 게임을 진행하는 능력자가 아니었다면, 필시 그런 습관 때문에 폭발하는 시청자들이 나왔으리라.

좋게 말해 세심하고 꼼꼼한, 나쁘게 말하면 쓰잘데기 없고 느려터진 그 습관은 지금도 그대로 나타나는 중이었다.

"충격파... 역장. 이거 크기 조절은 가능한 건가요? 아, 마우스로. 드래그하면서 조절하나 보네요. 음."

[또 이지럴]

[와 시1발 무슨 능력 하나하나 다 읽고 앉았냐 걍 아무거나 해!!!!]

[이 집 난방이 뜨겁네]

[걍 솔저하셈 젤 무난하니까]

[커마 졸라대충해서 안심했는데 이게 무슨...]

[아 초능력은 중요하지ㅋㅋ]

[어차피 나중에 레벨 해금하면 다른 위버도 쓸 수 있어요;;]

[이 사람 나이트폴 빌드는 어케만듬? 십년동안 빌드만 읽었냐?]

[오늘 게임 시작할 수 있나요]

아주, 아주 섬세한 캐릭터 생성이었다.

커스터마이징은 기본 설정에서 별다른 터치도 없이 간단하게 넘어간 다음이었다. 새비지에서 '위버'라고 부르는, 일종의 초능력을 고르는 구간에서 정체가 생겼다. 아무 기반 지식도 없이 게임을 실행한 노르드는 게임에서 제공되는 능력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스킬셋을 모조리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최근 대규모 패치의 영향으로, 새비지에 존재하는 위버의 숫자는 열 개가 넘어선 상황이었다. 개중에는 능력에 대한 설명만 따져도 꽤나 길게 이어진 위버도 적지 않았다. 하물며 예시로 달아둔 스킬 시전 영상까지 모두 확인하면 어떨까. 노르드가 간만에 대중적인 게임을 켰다고 좋아하던 시청자들이 분노를 표출할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를 위해 친절히 신규 유저를 위한 추천 탭을 만들어두었건만, 노르드는 그런 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꼼꼼히 능력을 훑는 모습에서 기어코 모든 위버를 확인하고 고르겠다는 집념이 느껴졌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집이었다.

뉴비를 상상하며 노르드의 질문에 친절히 답변을 하던 시청자들도 점차 태도가 바뀔 무렵이다. 결국 모든 위버를 확인한 노르드가 이내 마우스를 옮겼다. 답답함을 지우기 위해 채팅창을 도배로 가득 채우던 시청자들이 노르드의 선택에 곧바로 반응했다.

[고르고 골라서 나온게 블써ㅋㅋㅋㅋ]

[아 ㅅㅂ 뉴비면 그냥 솔져나하라고]

[여기서도 지같은거 골랐네...]

[광전사 컨셉 겁나 좋아하시는듯]

[ㄴㄴㄴㄴㄴㄴ 블써 개쓰레기에요 다른거해]

[니들이 암만 지럴해봤자 이사람 어차피 자기맘대로함ㅎ]

[여기 나이트폴 아니라고; 무슨 초보가 근접 위버]

[재밌어보이는데 그냥 ㄱ]

[다음 위버 언락될때까지 피똥쌀 예정ㅋㅋㅋ]

열띤 반응들을 살펴보면, 노르드가 고른 위버는 꽤나 악명이 높은 모양이다.

그녀는 채팅창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채팅창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결정을 내린 뒤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화면을 넘겼던 것이다.

그 자연스러운 패스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튼 노르드가 채팅창 여론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으니까.

가장 시간이 많이 소모되는 지점을 통과했다. 캐릭터 생성에 필요한 모든 설정을 마친 노르드는 마지막으로 닉네임을 적어넣었다. 위버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끌렸기 때문인지, 그녀가 주로 쓰덤 닉네임은 이미 누군가가 등록해서 사용할 수 없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그녀가 이내 키보드를 두드렸다.

'Nord11111'

다소 성의없는 닉네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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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느러터졌다.

미나는 고개를 돌려 왼쪽 모니터를 확인했다.

노르드가 게임을 실행하기 전부터 켜놨던 새비지의 메인 화면에는, 이미 튜토리얼을 완료한 미나의 신규 캐릭터가 앉아있었다. 빈말로도 미형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조형에 분홍색 머리만 독특하게 도드라졌다.

비어있는 채팅창에서 경고 메세지 하나만 띡 하고 올라왔다. '과도한 게임은 건강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하는, 시간마다 올라오는 경고 문구. 미나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확한 타이밍에 매칭을 돌리기 위해 진작에 준비해둔 상태였다. 그게 어느새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이제 노르드의 애청자라고 자칭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방송을 자주 챙겨보는 미나였지만, 위버를 고르는 시간이 이렇게까지 길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누가 그 요약이 절실한 설명문을 전부 읽어가며 능력을 고른다는 말인가. 차라리 인터넷에서 공략을 찾아보고 말지.

삼십 분 정도가 지난 이후부터는 미나도 저격 준비가 아니라 채팅을 치느라 바빴다. 노르드의 방송에서 자주 쓰이는 도배 문구를 저장해둔 메모장을 펼쳐놓고, 골라가며 복사해서 채팅창을 가득 채웠다.

관리자도 없는 노르드의 방송에서 차단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잦은 도배로 인한 자동 차단을 막기 위해, 도배 채팅들 사이사이에 짧은 채팅 한두 개를 넣어두는 게 포인트다. 그것만 지키면 노르드 방송의 채팅 규칙을 전부 숙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숨 막힐 정도로 오랜 시간 고민한 결과가 블러드서커(bloodsucker)라니. 그 선택이 노르드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금방 게임을 접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동시에 차올랐다. 아무튼 저격을 위해 신규 계정까지 만들었는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그건 슬픈 일일 테니까.

블러드서커. 속칭 블써, 모기, 날벌레... 기타 등등. 비교적 최신 버전에 추가된 이 위버는 유저들 사이에서 손 꼽히는 쓰레기, 예능용 위버로 유명했다.

능력의 컨셉은 매력적이었다. 이름 그대로 적의 피를 빨아들이며 체력을 채우고, 동시에 자신의 능력을 이것저것 강화하는 컨셉의 위버였다. 이것만 살피면 얼마나 훌륭한 설정인가. 새비지같은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에서 체력을 회복하는 능력이 얼마나 유용할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능력 컨셉부터 흡혈과 관련된 이 위버는 당연히 공개 당일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 모았다. 상세한 스킬 구성이 공개되기 전에는 분명 그랬다. 총이 기본 무기로 사용되는 게임에서, 접근전을 전제로 하는 그 요상한 스킬 구성을 확인하기까지는.

당시 실시간으로 급변하는 커뮤니티의 반응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미나는 자주 들리는 커뮤니티에서 당시의 반응을 요약 정리한 인기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여론의 반전이 꽤나 극적이었지.

사람들이 기대한 흡혈 패시브는 원거리 무기를 활용할 경우 그 효율이 급감하는 결함 스킬이었다. 어떻게든 근접 무기를 활용하자고 하기에는, 점퍼(Jumper)처럼 훌륭한 이동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혈류 가속이라는 이동속도 버프 스킬이 전부였다. 그깟 기술로 총알 세례를 뚫고 적에게 접근해 칼질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예능이었다.

결국 나오자마자 유저 티어표의 최하위를 장식한 이 위버는 어딜가나 존재하는 게임 연구자들의 손으로 떨어졌다. 랭크를 올리는 것 보다는, 빌드 같은 걸 연구하며 색다른 플레이를 찾는 괴짜들. 그들의 손에서 여러 분석을 거친 블러드서커가 도착한 지점은 양학용 예능 세팅이었다.

킬 포인트를 올리면 생기는 버프 따위를 이용해 빠르게 생존자들을 정리하는 정도의 컨셉이었나. 최근 새비지를 자주 플레이한 미나가 이렇에 아련히 기억할 정도면, 그 효용성을 알만도 했다.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플레이하는 캐릭터의 성능이 최악이라는 사실은 방송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니다. 최약체라는 설정을 활용해서 방송 각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그게 노르드의 방송에서도 적용될까 하면 그건 의문인 것이다. 아무리 다른 게임을 매우 잘한다고는 하나 고인물 가득한 새비지에서 뉴비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무력감을 느끼고 빨리 접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저격을 해서 노르드의 감정선을 건드리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하면서도, 그렇게 저질러버리면 금방 새비지를 포기하고 접어버릴 것 같아 망설임이 피어났다.

튜토리얼을 진행하는 노르드를 지켜보면서, 미나는 그렇게 다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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