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115 괴롭히지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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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비지는 생존 게임이다.
매칭을 시작하면 60명의 유저가 게임에 참여해, 폐허가 된 도심지 한복판에 떨어진다. 시작할 무렵 플레이어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선택한 위버를 제외하면 남은 건 걸치고 있는 옷가지뿐인, 혈혈단신의 상태.
그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아이템 따위를 파밍하고, 다른 생존자들을 제거하면서 최후의 한 명이 될 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여기까지 훑어보면 한 때 유행처럼 떠오른 다른 서바이벌 게임과 동일한 골자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차이가 있다면, 새비지는 거기에 RPG적 요소를 가미했다는 점일까.
이 생존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이 피해야 하는 대상은 다른 플레이어에 국한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역장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에너지가 맵 전체를 좁히기 시작하고, 폐허 곳곳에서는 변이체라는 괴이한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이 모든 것들이 플레이어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로 다가왔다. 환경 자체가 플레이어의 적인 것이다.
그런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인지, 새비지에는 레벨 시스템이 존재했다. 처음 리스폰되는 순간부터 게임이 끝나는 시점까지. 땅에 떨어진 아이템을 파밍하거나, 아이템을 따로 제작하는 행위. 또는 맵 곳곳을 돌아다니는 변이체를 사냥하거나 적 유저를 사살하는 등의 모든 행위에 경험치가 주어졌다.
그렇게 레벨을 올리면 체력이나 방어력같은 캐릭터의 기본적인 스펙 모두가 상승한다. 물론 급소가 되는 부위에 총알이 박히면 한순간에 빈사 상태에 이르는 건 동일했지만, 극심한 레벨 차이가 절대적인 스펙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건 여타 다른 RPG 게임과 흡사했다.
뿐만 아니라 파밍할 수 있는 아이템에도 레어도 개념이 존재했다. 4단계로 분류되는 레어도 항목에서, 첫 단계인 노말 아이템과 최종 단계인 전설 등급 아이템을 비교하면 엄청난 격차가 나타났다. 플레이어들은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얻기 위해 지뢰가 가득 매설됐거나 강력한 변이체가 등장하는 위험 지역을 수색해야 했다. 목숨을 걸고 높은 레어도의 아이템을 얻어 보겠다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선택이다.
이런 요소들은 새비지라는 게임을 말 그대로 야만적이며, 흉포한 게임으로 만들었다.
새비지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숨을 죽이고 다른 플레이어들들 피해 숨어다니는 등의 신중한 플레이가 아니었다. 높은 레벨과 귀한 아이템 따위를 가득 두르고 다른 생존자들을 학살하며 돌아다니는 것.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비치며 직접 폐허의 무법자로 거듭나는 것. 소위 트럭을 몰면서 최후의 생존자로 살아남는 게 새비지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의 기본적인 생존법이었다.
그건 새비지라는 게임의 인기 요인이기도 했다. 압도적인 스펙 차이로 학살당할 때는 게임의 무너진 밸런스에 대해 불만을 쏟아내다가도, 열에 한번 자신이 그 학살자가 되어 살아남으면 강렬한 쾌락을 느끼며 게임을 찬양하기 마련이다. 생존 게임이라는 장르에서 약육강식의 적자생존을 더 도드라지게 강화한 게임이 새비지였다.
압도적인 힘을 드러내며 타자를 찍어누르는 우월감은 인간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욕망 중 하나다. 게임 방송을 시청하는 요인은 여러가지였으나, 새비지라는 게임을 주로 시청하는 시청자들에게 그건 바로 대리만족이었다.
홀로 10명 이상을 사살하며 우승하는 짜릿한 플레이. 그건 랭크를 올라갈수록 미쳐날뛰는 고인물들과 플레이의 어려움 때문에 직접 달성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유독 새비지에서 실력자로 유명한 고수들의 방송이 흥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온갖 화려한 플레이로 눈요기를 마친 시청자들이, 이제 막 새비지를 시작한 뉴비의 방송을 시청한다면 어떨까.
그 노르드에게 마음껏 훈수를 날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미나를 비롯해 지루한 캐릭터 생성을 기다리며 저격을 준비한 저격러들은 물론이고, 순수하게 방송을 시청하는 일반 시청자들도 노르드의 첫 번째 게임 매칭이 잡히는 걸 기대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드디어, 노르드의 첫 번째 게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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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이것도 긴장감이라 해야 할까. 추격의 과정에서 바짝 긴장하는 건 도망치는 먹잇감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사냥감을 쫓는 자신도 이렇게 조금씩 손이 떨리는 걸 보면, 역시 술래에게도 부담감은 있는 것이다.
명확한 사실은.. 사냥감보다는 사냥꾼의 입장이 훨씬 편하다는 점이겠지.
긴장을 억누르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 한편, 남자는 그 떨림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긴장감과 함께 섞여드는 건 사냥의 짜릿함이다. 사냥감의 급소에 총탄이 박히는 그 순간엔 긴장으로 인한 떨림이 전율로 뒤바뀌는 것이다. 눈치채지 못하게 접근해서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재미는, 남자가 새비지를 즐기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 즐거움이 머지않았다.
그의 사냥감은 지금 변이체를 사냥하고 있었다.
잡고 있는 변이체는 양팔에 거대한 낫이 달린, 중형 이상의 까다로운 개체였다. 사냥감은 그걸 아무런 방비도 없이 건드렸다. 양팔을 휘두르며 접근하는 패턴이 상당히 위협적이라, 주변에 다른 생존자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면 건드릴 엄두도 내기 힘든 변이체였음에도 그랬다. 그걸 대면하자마자 건드리는 걸 보면 확실히 초보자는 초보자다. 남자는 와쳐(Watcher) 위버로 그 장면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뉴비라는 걸 감안하면 컨트롤은 썩 괜찮은 편이었다. 아니, 저 정도면 나름 훌륭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 변이체의 돌진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흘려내고 곧장 근접 무기로 스위칭해서 공격하는 장면은 순간 의도한 플레이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정교했다.
우연에 불과한 움직임이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돌진을 피해낸 반응속도는 매우 준수한 편이었다. 신중함은 쥐뿔도 찾아볼 수 없는 뉴비였으나 피지컬은 훌륭한 부류라고 정리해야 할까.
더욱더 좋았다. 피지컬만 믿고 무리한 플레이를 일삼는 플레이어는 남자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였으니까. 새싹이 자라나기 전 짓밟는 행위는 또 얼마나 짜릿하고 즐거운 일인지. 이 순간을 위해 부계정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이겠지.
총탄을 쏘아낼 타이밍은, 사냥을 마치고 루팅을 시작하는 그 순간이 딱 적당할 것이다.
스킬 사용을 마친 남자는 사냥감이 있는 방향으로 조심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사냥감이 들고 있는 것으로 확인한 무장은 희귀 등급의 기관단총에 근접 무기인 도끼가 전부였다. 주무장으로 레어 등급의 저격총을 착용한 남자로서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접근이었다.
그럼에도 거리를 좁히는 건 사냥감의 반응을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어딘가에서 정체모를 일격을 허용하고, 어쩔 줄 몰라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그 멍청한 모습을 직접 지켜보기 위해.
그러다 어느샌가 가까이 접근한 남자의 캐릭터를 확인하고 황급히 무기를 들어올렸을 때가 사냥의 하이라이트였다. 미리 급소에 조준한 에임에 방아쇠만 당기면 그만이다.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허망하게 죽어나가는 뉴비의 시체를 보면, 모니터 너머에 있는 사람의 일그러진 얼굴도 함께 떠오르는 것이다. 그게 남자가 양학을 그만두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는 이걸 방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뉴비존에서 양학을 감행한 다년간의 경험에서 나온 유흥이다. 새비지를 처음 플레이하는 유저는 갑작스레 일격을 허용한 그 상황에서 절대 침착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확인하는 것도 벅찬데, 위버 능력을 활용해 위험을 타개하려는 시도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을 대비해 와쳐 위버로 진짜 뉴비가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까지 마친 상태였다. 남자는 자신이 하는 플레이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신중하게 움직인 남자는 드디어 사냥감이 시야에 보이는 지점에 도달했다. 비틀거리는 변이체의 모습을 보면, 사냥감은 남자의 예상보다 빠르게 사냥을 완료한 모양이다.
사냥감의 몸 이곳저곳에서 피가 흘렀다. 아무리 그래도 역시 뉴비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변이체였다. 과감하게 시도해서 사냥에 성공하기는 했으나, 흘리는 피의 양을 보면 꽤나 부상이 큰 것으로 보였다. 남자는 사냥감이 치명상을 입지는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이미 다 죽어가는 사냥감을 마무리하는 건 그가 선호하는 바가 아니었으니까.
와쳐 특유의 넓은 시야로, 사냥을 마친 사냥감이 변이체의 사체를 뒤적거리는 모습을 포착했다. 역시 뉴비는 뉴비였다. 상처를 치유하기 전 루팅부터 시도하는 것이 전형적인 뉴비의 모습이다. 사체 사이로 희미하게 유니크 아이템을 상징하는 보라빛이 번쩍거렸다. 새비지를 처음 시작한 뉴비라면 아마 최초일 가능성이 높은 희귀도의 아이템이다.
남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미끼였다.
그는 저격총을 들어올렸다. 남자가 서있는 위치는 주변이 휑한 평지였다. 본래 자신의 랭크에 맞는 게임이었다면 엄폐물이 없는 순간을 극도로 경계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시야가 전부 드러나는 게 오히려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시야는 물론이고, 발버둥치는 사냥감도 웃고 있는 사냥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마우스를 꽉 쥔 남자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즉사를 막기 위해, 최초는 역시 다리가 좋을 것이다.
스코프의 조준점을 사냥감의 다리에 맞춘 순간이다.
확대된 배율에서 사냥감의 모습이 사라졌다.
새비지는 게임에서 튕긴다고 한들 캐릭터가 사라지지 않는다. 재접속의 유예를 두기까지, 아무런 방비 없이 제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즉, 갑작스런 사냥감의 소실이 게임에서 튕긴 것 따위의 문제로 발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함에, 남자는 황급히 스코프에서 눈을 뗐다.
사냥감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한 손에 기관단총을 거머쥔 채였다. 달려오는 인영의 뒤에서 붉은색 아지랑이가 잔상처럼 피어올랐다. 새비지에 존재하는 모든 위버의 스킬을 파악한 남자가 익히 알고 있는 현상이었다. 블러드서커의 혈류 가속. 근접에 특화한 뚜벅이라는, 나사 빠진 위버의 이동 스킬이다.
동시에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블러드서커에게 존재하는 패시브 스킬이 있었다. 피의 박동. 인파이트 위주로 설계된 위버라면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위기감지 계열의 패시브였다. 플레이어에게 닥친 위기 상황을 심장 박동으로 알려준다는 컨셉의 스킬이었는데, 주로 두근거리는 효과음과 함께 화면이 박동하는 연출로 위기를 알려왔다.
새비지에서 '위기'라 함은 보통 공격에 노출된 상황을 의미한다. 변이체가 패턴을 사용하기 직전, 매설된 트랩을 건드리기 직전... 그리고 적의 에임에 노출되었을 때.
새비지를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당연한 알고 있을 상식이었음에도, 남자는 그걸 의식하지 않았다. 애초에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남자와 사냥감의 거리를 생각하면 화면이 미세한 흔들리는 정도의 경고가 전부일 테니까. 그 사소한 신호에 즉시 반응해 에임에서 벗어난다는 건 상식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상식적으로는 그랬다.
상식을 벗어난 블러드서커는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견제를 위한 사격이나 엄폐물 따위에 몸을 숨기는 움직임도 일절 없었다. 남자가 있는 곳을 향해 직선으로, 망설임 없이 내달렸다. 분명, 혈류 가속 스킬의 효과에는 체력이 낮아질수록 이동 속도가 상승한다는 부가 능력이 있었다. 와쳐의 뛰어난 시야에는 혈류 가속의 이펙트와 더불어 사냥감의 몸 곳곳에서 흩날리는 핏줄기가 선명히 보였다.
깨달음은 곧 소름으로 번졌다.
남자는 황급히 부무장인 권총을 들어올렸다. 연사가 불가능한 스나이퍼 라이플로는 절대 저 질주를 멈추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같은 랭크대에서도 꽤나 준수한 편이라 확신하는 에임 능력을 믿어야 할 때였다. 최대한 침착함을 가장하며, 남자는 곧장 사격을 개시했다.
탕, 탕, 탕
연이은 사격이 모두 빗나갔다.
조준점이 목표와 맞닿는 그 순간이었다. 피를 흩날리는 괴물이 붉은 궤적을 남기며 좌우로 흔들렸다. 애써 쏘아낸 총알은 흔들리는 아지랑이만 관통하고 지나갔다.
두 번째, 세 번째... 그 다음 총알도 마찬가지였다. 위기를 감지하는 패시브 스킬 때문에? 남자는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새비지의 위기감지 스킬은 총알이 발사되는 타이밍까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에임이 몸에 맞닿는 순간의 경고음만 가지고, 어떻게 총알을 피해낼 수 있다는 말인가.
틱.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당겨낸 방아쇠가, 비어버린 탄창을 암시하는 공허한 소리로 돌아왔을 때.
남자의 눈앞까지 쇄도한 괴물이 도끼를 번쩍 들어올렸다.
마지막 순간 웃고 있는 건, 남자가 아니라 저 괴물이었다고. 사냥꾼은 사실 자신이 아니었다고.
마지막 생각이 머리를 스칠 무렵, 남자는 허탈하게 웃었다.
"오... 저격총."
[???]
[와]
[진짜 어이가없네]
[조준당한거 어케 알았노 ㅅ1발련아]
[위기감지 뜨긴했음ㅋ;]
[아니 혈가땜에 변이체한테 일부러 쳐맞은거아니냐? 어쩐지 이사람 피지컬에 이상하다했더니ㅋㅋㅋ]
[내가 뭘 본거지]
[슴지안쏘고 굳이 도끼로 죽이는거 실화냐? 진짜 새비지에서 나이트폴하는 꼴에 입이 벌어지네]
[ㄹㅇ 소리지르면서 봤다]
이전 상황을 돌아보며 난리가 난 채팅창과는 별개로, 노르드는 별다른 감흥 없이 도끼 한방에 시체가 되어버린 남자의 시체를 뒤적거릴 뿐이었다.
그녀의 첫 번째 게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