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117 사냥당하는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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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송에서 플레이했던, 혹은 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게임에는 당연히 온라인 RPG 게임도 포함되어 있었다.
혹자는 한물간 구시대의 장르라고 말하곤 하지만, 나는 한창 RPG가 부흥하던 시기에 가장 열심히 게임을 즐긴 사람이다. 당연히 그 장르에 대한 온갖 추억들이 마음 깊숙한 곳에 켜켜이 쌓여있었다. 당장에야 먼지로 뒤덮인 낡은 기억에 불과했으나, 추억이라는 것들은 때가 되면 공기를 가득 머금은 풍선처럼 날아오르는 성질을 지니지 않았나.
방송을 위해 게임을 고르던 내가 유명한 RPG 게임에도 손을 가져다 댄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결국 신나게 선정한 그 게임들을 방송에서 실행하지는 못했는데.
그건... 어느샌가 커다랗게 덩치를 불린 노르드의 인지도가 온라인 RPG라는 장르에서 어떤 대참사를 초래할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게임을 막 시작한 초보자 마을에 수십 수백 명의 시청자들이 모여든다던가 하는 일들이 그렇다.
단순히 모여들 뿐이라면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걸로 끝날 리가 있을까. 공개 채팅이나 귓속말 따위로 온갖 메세지가 날아들 것을 생각하면 시작하기도 전부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평소 내 방송의 채팅창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낮은 일도 아니었다. 그 게임 내에서 일개 유저에 불과한 내가 무슨 대처를 하기도 힘들 테고.
방송을 진행하는 스트리머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진행되는 시청자 참여 컨텐츠는 언제나 위험성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나는 나름대로 방송 사고에 대한 경계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최근 틈만나면 호들갑을 떠는 혜민이나 주연이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위험 정도야 나도 숙지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염려가 조금 헐거운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시청자가 참여할 수 있는 건 RPG 게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새비지를 시작했을 때... 아니, 새비지 이전에도 마찬가지다. 나이트폴을 처음 할 때도 그랬다. 나는 PvP가 메인인 게임에서 시청자들이 난입하는, 소위 저격이라 불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었다.
높은 랭크로 인해 저격 자체가 어렵다는 점도 있었으나, 본질적으로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 게임 진행을 방해하든 그걸 꺾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 게임에 대한 강렬한 자신감이 다소 유치하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게이머란 그 쓰잘데기 없는 자존심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존재들이 아닌가.
아무튼, 이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리잡힌 사고방식 때문인지 새비지를 다운받고 실행할 무렵에도 저격 따위의 문제는 전혀 염두하고 있지 않았더랬다.
음.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그건 내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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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비지에 존재하는 위기감지 스킬은 위버마다 특색있는 설정으로 경보를 달리 울린다.
위버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맞게 이펙트를 다르게 부여한 까닭이다. 어차피 똑같은 효과를 가진 김에 같은 이펙트를 사용할 법한데도, 굳이 이런 식으로 디테일을 살리는 것이 새비지를 호평하는 유저들이 손꼽는 장점이기도 했다.
아무튼 위버마다 상이한 위기감지 이펙트를 살펴보는 것도 게임의 소소한 재미 포인트 중 하나였다. 가장 대표적인 위버인 트레센더(transcender)의 경우, 고음의 경보음과 함께 위협의 대상이 위치하는 방향에서 보라색 섬광이 번뜩이는 것으로 위기를 알려왔다.
그 특유의 경보음이 위기감지 능력을 대표하는 상징처럼 자리 잡아서, 새비지 관련 커뮤니티 등지에서 여러 밈이나 합성 소재로 사용되고는 했다.
그럼 블러드서커의 위기감지는 어떤 식으로 발동할까.
새비지의 시작부터 함께한 전통의 위버인 트레센더와는 달리, 비교적 최근 출시된 이 새로운 위버는 보다 역동적인 이펙트로 위기를 알려왔다. 마치 심장 뛰는 것을 묘사하듯 박동하는 화면의 흔들림이 바로 그것이었다. 위협 대상이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에 따라 변동하는 박동은 핏빛으로 빛나는 이펙트와 함께 대상의 위험도를 직접적으로 알려왔다.
경이로운 학습 능력으로 이 경보의 효용성을 대번에 깨우친 노르드는 지금.
마치 지진이 난 듯 쿵쾅대는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뱉었다.
게임이 시작하고 불과 5분이 경과한 시점의 일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왼쪽, 아."
[ㅋㅋㅋㅋㅋㅋㅋㅋ ㅅㅂ 지,랄 지진낫냐?]
[와 동서남북ㄷㄷㄷ]
[왼쪽아니야 사방이야..]
[화면 그냥 시뻘겋네 아주]
[24시간 방송 가즈아~~~~~]
[5분 살아남은게 어디냐]
[아니 게임은 할 수 있게 해줘야되는거아님; 이사람 그래도 뉴비인데]
[응 안돼 방종막는게 먼저야~]
[뉴비는 ㅅㅂ 노르드정도면 뉴비존 가물치임 이렇게 솎아내주는게 맞다]
본디 인터넷 방송의 채팅창은 보다 극적인 상황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표현하기 마련이다.
지금 노르드의 방송이 그랬다. 앞뒤 맥락을 살피지 않아도 화면 상으로 나타나는 연출이 극적이기 짝이 없었다. 블러드서커의 박동 효과로, 엄폐물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하면 화면 전체가 두근거리며 고동쳤다. 적의 위치를 알리는 붉은빛 신호가 사방에서 번뜩이는 게 긴박감을 더했다.
이 구역 하나에 도대체 몇 명의 생존자가 모여들었는지. 빈말로도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는, 불합리한 상황이다. 이번 판에는 특히나 많은 시청자가 매칭에 잡힌 것 같았다. 방송을 봤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신속히 위치를 특정한 걸 보면 다들 새비지에 익숙한 유저임이 분명했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어쩌면, 1초만에 잡힌 매칭을 수락한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던 결과겠지.
저격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소수 시청자들의 의견에 따라, 적어도 화면을 가려놓고 매칭을 돌리는 게 옳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저격은 있을지언정 이렇게 사방을 포위당하는 형국은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노르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게 어떤 상황이 나오든 스스로 타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결단인지, 아니면 자포자기한 결과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기실, 대부분의 시청자들에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위기상황에 처한 노르드가 이번 판 역시 방종을 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이 훨씬 중요했으니.
누가 봐도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 저돌적인 노르드도 엄폐물에 숨어서 숨만 고르던 무렵.
쿠과광!
어디선가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수류탄이라고 치기엔 조금 더 강렬했다. 구역 오브젝트로 등장하는 특수 지뢰, 혹은 폭발과 관련된 스킬을 가진 위버의 능력일까.
어느 쪽이든 궁지에 몰린 노르드에겐 중요한 게 아니었다.
굉음에 대한 노르드의 반응은 매우 빨랐다. 폭발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상황 판단을 위한 시간도 필요하지 않다는 듯 곧장 엄폐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조준하고 있는 적을 의식해 몸의 일부만 들어냈다 다시 감추기를 몇 번. 그녀는 이전처럼 고동치는 박동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아마 포위하고 있던 생존자들도 커다란 폭발음의 원인을 찾기 위해 잠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 같았다. 그걸 확인하는 즉시, 스태미나 아이템을 복용한 노르드가 폐허 한복판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전경고 상황에서 가장 선명한 붉은빛이 돌았던, 좌측면을 향한 질주였다.
이 순간 폭발의 원인 따위는 노르드의 머릿속에 없었다.
노르드가 달리는 구역은 마치 거대한 발톱에 찢겨나간 듯, 엉망으로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가 가득한 곳이었다. 본래 고층이었을 건물들도 무참히 박살나 땅 이곳저곳에 널부러진 폐허. 몸을 숨길 곳이 많은 탓에 총을 겨누고 있던 생존자를 발견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노르드는 자기자신을 미끼로 내세웠다.
달리는 와중에 다른 곳으로 몸을 숨기지 않았다. 손에는 초반에 획득한 레어 등급의 카타나를 들고 있는 채였다. 대놓고 몸을 내놓고 달려, 위기 감지 패시브로 적의 위치를 특정하려는 강수였다.
방송을 보는 저격려들의 특성상 빠르게 포위망을 돌파하지 못하면 이번 판도 허무하게 그르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단 한 차례의 완급 조절 없이 달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방송을 보고 쫓아올 저격러들을 피해. 한번 잡은 기회를 놓쳐서는 일말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때문에 노르드의 판단은 과감하고 신속했다.
사선에 노출된 이상, 더 이상은 판단의 문제가 아니었다.
두근
후방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는 없다. 경보가 울리는 순간 혈류 가속을 발동한 노르드는 마우스를 좌측으로 크게 돌리면서 대쉬를 연타했다. 삽시간에 붉은 잔상을 그리며 가속한 블러드서커가 왼쪽으로 몸을 꺾으면서 미끄러지듯 뛰어들었다. 종전에 노르드가 자리로부터 붉은 잔상을 따라 총탄이 때려박혔다.
총성을 확인한 노르드가 후방 사선에 엄폐물을 끼며 전진했다.
두근
우측과... 또 하나. 한껏 예민해진 노르드는 박동한 화면이 겹치듯 두 차례 고동친 것을 포착했다. 하나가 뚜렷하게 오른쪽을 경고한 반면, 다른 하나는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침착하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당장에 직면한 위협을 피해, 그녀는 화면을 비틀었다.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을 피해 급격히 몸을 뒤트는 회피 동작이었다.
멀찍이 울려퍼지는 총성. 그 이후로 총알이 귓가를 스치듯 지나가는 파공성이 혜진의 이어폰을 섬뜩하게 파고들었다. 이게 살을 꿰뚫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해야 할까.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널부러진 엄폐물을 이용해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틀어막으려던 노르드가 황급히 들고 있던 카타나를 휘둘렀다.
촥
새비지보다는 나이트폴이 떠오르는 날붙이가 살을 가르고 지나가는 소리.
어느 순간 노르드의 뒤 쪽에서 튀어나온 생존자 하나가, 그녀가 휘두른 카타나에 의해 머리부터 잘려나갔다. 회색 폐허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분홍색 머리가 몸뚱이를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손에 들고 있던 거대한 전기톱이 그 옆에 떨어져 함께 바닥을 굴렀다. 유니크 희귀도를 상징하는, 보라색 빛깔이 전기톱 주위에서 아른거렸다.
주울 틈이 없었다.
탕
두근거리는 경고음과 총성이 거의 동시에 울려퍼졌다. 이전에 빗나간 탄환을 의식한 건지, 조준하고 사격하는 순간의 딜레이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아마 에임을 맞추자마자 마우스를 클릭했으리라. 간발의 차로 땅을 두드린 총탄을 확인할 여유도 없이, 노르드는 바닥을 박차고 다시 달렸다.
방금 기습해온 생존자를 깔끔하게 처리한 것이 주요했다. 피를 먹고 혈류 가속의 쿨타임이 초기화된 덕분에 폐허를 질주하는 블러드서커의 속도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림짐작한 것이 맞다면, 아마 이전 상황에서 엄폐한 자신을 조준한 적은 이 근처에 숨어있을 터.
저격러가 맞다면, 직접 스트리머의 목숨을 끊어낼 절호의 기회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두근
경고를 알리는 박동이 예상보다 크게 울려퍼졌다. 노르드가 찾던 생존자는 대담하게도 그녀의 정면에서 몸을 드러냈다. 짧은 순간, 대면한 적의 손에 들린 총이 무엇인지 확인한 노르드가 땅을 박차고 몸을 굴렀다.
펑
크헉
캐릭터가 흘려낸 단말마가, 충격의 여파로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아득하게 들려왔다.
황급히 회피를 시도했음에도 산탄의 일부를 몸에 허용한 것이다. 충격에 비틀리면서도 무기를 바꿔드는 조작이 가능한 걸 보면 치명상은 아니었다. 종전에 킬 포인트를 올리면서 위버의 패시브로 증가한 능력치가 유효했을지도 모른다. 위급한 상황에서 머리가 판단을 위해 돌아가는 한편, 몸은 정직하게 위협에 대한 대응에 나섰다.
적을 마주한 순간 바꿔든 것은, 마주한 적과 동일한 사양의 샷건이었다. 새비지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필드 드랍의 레어 샷건. 생존자 하나의 피를 머금은 혈류 가속은 산탄을 한 발 허용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기능했다. 샷건을 들어올리고, 엄폐물을 끼고 머리만 드러낸 적 생존자에게 에임을 맞출 때까지. 노르드는 그 가속하는 모션을 세밀하게 통제했다.
그건 이적에 가까운 결과로 나타났다.
미리 조준점을 맞춘 상대보다, 대응을 위해 총을 들어올린 노르드의 샷건이 더 빨리 목표를 집어삼켰다.
펑
산탄이 정확히 삐져나온 머리를 박살냄과 동시에, 노르드의 화면에 선명한 킬로그가 올라갔다. 완벽한 헤드샷이었다. 2킬 째의 킬 포인트. 그러나 아직도 멈출 때는 아니었다.
두근, 두근, 두근
요동치는 심장 박동 소리. 흔들리는 화면. 붉게 물든 시야 어딘가. 울려퍼지는 총성. 폭발음. 쓰러지는 생존자의 단말마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게임에서, 위험 상황에 대한 타개책은 머리가 내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노르드는 그저 본능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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