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118 사냥감인 척하지 마
* * *
"꺄악! 뭐야, 말도 안돼!"
퍽
자신도 모르게 내리친 키보드에서 파편처럼 키 캡이 튀어나갔다.
발작하듯 발을 구른 탓에 의자가 책상으로부터 멀어졌다. 틱틱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 곳곳으로 떨어진 키보드 조각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방금 모니터 내에서 벌어졌던 장면이 영화처럼 반복 재생되는 중이었다. 도저히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아, 억지로 기억을 되돌리는 얼빠진 짓거리를 반복했다.
직전까지 긴장과 흥분으로 가득하던 마음은 노르드의 칼질 한 번에 토막이 나버린 것 같았다. 저격을 위해 급히 만들어낸 자신의 캐릭터처럼, 그녀의 감정도 함께 잘려 나갔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잔해들은 금방 허탈함과 경악으로 돌변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아도 점차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게임 전체를 훑으면 초반부에 불과했으나, 시작과 동시에 노르드의 방송을 보면서 추격을 시작한 미나에게는 꽤나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 보통 새비지를 플레이할 때면 루틴처럼 일삼는 아이템 파밍 절차도 과감하게 캔슬하고 달렸다. 휴대가 간편한 종류의 총기 정도만 주워들고, 우선 가까워지자는 생각으로 거리를 좁혔다.
그러기 위해서 선택한 점퍼(Jumper)였다. 기동성에 특화된 위버는 멀찍이 떨어진 스타팅 위치에서도 추격의 대상을 놓치지 않았다. 나름대로 고민한 끝에 만들어낸, 그녀의 노르드 저격용 캐릭터다.
상대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면, 절대 대상을 놓치지 않을 뛰어난 기동성을 갖춘 위버였다. 기껏 저격에 성공했는데 얼굴도 마주하지 못하고 게임을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기동성을 가장 우선적인 조건으로 잡았다.
그녀는 자신의 허망한 최후를 상상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은 반대로 어떻게 노르드를 끝낼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고 있었다. 방송을 틀어놓고 있던 다른 모니터로 노르드의 위치를 완벽히 파악하고, 여유가 있는 위치인 걸 확인한 후에는 파밍으로 우선순위를 돌렸다.
앞길을 막는 변이체 하나를 잡고 유니크 레어도의 근접 무기를 획득한 것까지 흐름은 완벽했다. 새비지 초보자인 주제에 근접 무기로 재미를 보는 노르드를, 전기톱과 같이 요란한 근접 무기로 사살한다. 서사적으로 제법 잘 짜여진 모양새이지 않은가.
미나가 걱정한 건 오히려 노르드의 이른 최후였다. 지난 몇 게임에서 그랬듯이, 방종을 막기 위해 미친 것처럼 모여든 저격러들이 이번에도 노르드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빠르게 형성될 포위망에서 노르드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혹은, 저격러들 중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이 같은 동료를 사살하지는 않을까 하는 게 더 큰 걱정거리였다.
그 순간 저격 자체가 잘못된 행위라는 생각은 없었다. 손 끝을 깨물고는 이를 덜덜 떨어대며 노르드의 다음 매칭을 기다린 시간들이 미나를 좀먹은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노르드에게 접근하면 할수록 방송을 바라보는 빈도가 늘어났다. 노르드는 기이할 정도의 위기 감지 활용을 보여주면서 파밍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초보자치고는 노련하게 보일 정도의 움직임이었으나, 미나가 보기에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좁혀지고 있을 포위망을 생각한다면 지금 저렇게 신중히 파밍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방향을 잡고 뚫어내는 게 맞겠지. 아무튼 미나에게는 기회였다. 덕분에 포위망의 일부가 될 정도로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으니까.
우려했던 저격러들 내부의 트롤링은 나타나지는 않았다. 방종을 막기 위한 목적의식이 안면도 트지 않은 집단 내부의 결속력을 강하게 묶어준 모양이다. 노르드가 위치한 구역으로 가까워질수록, 이곳저곳에서 서로의 인기척이 느껴졌으나 그들은 암묵적인 합의를 마친 것처럼 일정 간격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미나처럼, 노르드의 목을 탐하는 생존자가 있다는 것 정도가 마지막 남은 걱정거리였다.
분명... 분명 그랬는데.
점프해서 기습한 순간, 그녀의 목덜미를 훑던 그 섬뜩한 궤적이 아직도 그녀의 시야에 아른거렸다.
사각에서 점퍼의 특수 스킬로 갑작스레 튀어나온 그녀의 일격에 반응한 것이다. 분명 다른 생존자에게 한눈 팔린 순간을 노려 감행한 기습이었음에도. 미나가 그토록 기겁을 했던 이유는 분명했다.
몇 시간에 걸친 저격의 결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허무한 엔딩이 아닌가.
미나의 새비지 화면은 이미 그녀를 죽인 노르드의 시점으로 전환된지 오래였다.
자동 전환된 시점은 높은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연출의 탑뷰(Top View)였다. 시야가 제한적인 일인칭 시점을 벗어나자, 정도를 모르고 날뛰는 미친 블러드서커의 움직임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났다.
지나가는 경로마다 짙은 핏빛 궤적을 남기는 꼴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생존 게임에서 쓸데없이 이펙트가 화려하다고 비웃었던 그 스킬이, 노르드의 손에서 비할 데 없는 흉포한 스킬로 거듭나고 있는 것 같았다.
미나의 눈에는... 숫제 네임드 변이체나 다를 바 없었다.
또 한 번. 날아든 총탄이 붉은 잔상을 뚫고 지나갔다. 몇 번인가 경악할만한 회피를 마주하고, 노르드를 둘러싼 생존자들도 학습을 마친 모양이다. 단 발로 노르드를 제압하려기 보다는 연사력이 뛰어난 무기로 화망을 구성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몇 사람의 피를 먹은 탓인지, 혈류 가속을 발동시킨 블러드서커는 기이할 정도로 빨랐다.
대부분의 총탄이 노르드의 잔상만 훑었다. 붉은 괴물은 그 와중에도 잔해들을 방패막으로 삼으며 영리하게 움직였다. 운 좋게 목표물을 포착한 총알은, 잠깐 질주를 늦췄을 뿐 의미 있는 데미지를 준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노르드를 겨냥하고 있는 유저는 대부분 그녀만 바라보고 빠르게 모여든 생존자들이다.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다른 것들은 도외시하고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평소 게임 양상과는 달리, 파밍이나 성장이 현저히 부족했다. 몇 번이나 생존자를 잡아먹으며 덩치를 불린 노르드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상정하지 못했다.
모여든 저격러가 많다는 사실이, 그들 자신에게 악수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을 누가 할 수 있었을까.
노르드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가속을 받은 속도는 빨랐으나, 행동에는 엄연한 절차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차근차근 자신의 근처에 있는 생존자부터 물색해서 처리하려는 생각일까. 한 번 변이체 같다는 생각을 떠올려서 그런지, 미나에게는 그 결정 또한 일종의 패턴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장비하고 있는 무기는 샷건과 카타나가 전부였다. 이동 속도 옵션이 붙은 카타나였다. 노르드는 잔해가 난잡하게 널부러진 폐허를 질주할 때 카타나를 들었다. 그러다 시야에 생존자가 확인되면 바로 무기를 스위칭해 사격을 개시했다.
빠르게 내달리는 와중에도 조준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견제 사격을 위해 머리만 빼꼼 내밀었던 생존자 하나가 머리에 총탄을 허용하고 쓰러졌다.
생존자들을 연료로 삼고 있는 걸까. 킬 포인트를 올릴 때마다 붉은 잔상이 더욱 짙어졌다. 지금에 와서는 최초의 빛깔이 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붉게 타오르는 상태였다. 그 화려한 이펙트가 위압감을 더했다.
포위망의 한 축을 돌파하려는 듯한 경로는 어느새 역전된지 오래였다. 노르드는 폐허 곳곳에 숨어든 생존자들을 쫓아 무너진 건물 사이사이를 속속들이 파헤쳤다.
탑뷰 시점으로 폐허를 내려다보는 미나는 노르드의 이동 경로를 쉽게 그려볼 수 있었다. 지금 위치한 구역을 외곽에서부터 파고 들어가듯 집어 삼키는 모양새였다. 그게 마치 사과 따위의 둥근 과일의 내부로 침투하는 애벌레처럼 느껴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파먹히는 게 과육이 아니라 생존자들이라는 점일까.
미나는 옵저버 시점에서 마우스 휠을 조작해 화면을 확대했다. 노르드가 점차 화면 가운데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주검이 되어버린 생존자 하나의 몸을 뒤적거리는 중이었다.
사냥감을 전부 먹어치웠을까. 금세 발을 움직이는 노르드의 뒤로 다시 붉은 잔상이 나타나 폐허를 붉게 물들였다. 다른 먹잇감을 찾기 위함인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이 확대된 시점으로 선명하게 투영됐다.
...맞잖아. 네임드 몬스터.
미나는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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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운영법을 좀 알겠네요. 이렇게 하는 거구나."
[??]
[뭐래 미친련이]
[운...영?]
[블써 구리다는 새끼들 다 어디감 ㄷㄷ 운영법을 몰라서 구리다고 하는거였네ㅋㅋ]
[피해자들 시점 너무 궁금한데.. 3스택 넘어간 뒤로는 어지러워서 못보겠음 마우스 움직이는게 너무 빨라서.. 다시보기 옵저버로 한번봤으면]
[오늘도 경이롭네요 선생님]
[진짜 방종하는거아니지...? 나 야근하고 방금왔단말이야 지금 방종하면 나 죽어버릴꺼야]
[그런 채팅쓰면 바로 방종함 ㅂㅅ아]
"그럼, 약속했으니까요. 오늘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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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를 넘으면 성취감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막막했던 상황을 타개하고, 정신 없이 생존자의 그림자를 쫓아 움직였던 게임이었다. 구역 전체를 감싸안듯 모여들었던 유저들을 남기지 않고 처리했다. 그 와중에 몇 번의 사선을 넘었는지. 판단 이전에 손을 움직이는 과정 속에서, 위기를 상기시키듯 박동하는 화면에는 묘한 스릴이 있었다.
중간부터는 거의 위기 감지에만 몸을 맡겼다. 빗발치는 총알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기치 못한 순간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파고드는 위버의 스킬 활용을 감당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염동력 따위를 사용했는지 멀리서부터 굴러들어와 발 밑에서 터지는 수류탄하며, 갑작스레 이동 경로를 틀어막는 역장은 대처하기도 힘들었다. 생소한 응용기에 휘말릴 때마다 경험의 부재가 몸서리치게 다가왔다.
생전 처음 보는 그것들을 찰나의 순간에 유추해서 대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온전히 감당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결국 거의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경보를 믿고 반응속도로 해결하는. 지금 생각하면 무식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다.
자기과신은 독이 되는 것이다. 이런 류의 게임을 할 때는 적어도 화면을 가리는 정성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사방에서 조준점이 내리꽂히는 그 짜릿함을 다시 경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이번처럼 상황이 운 좋게 풀릴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방송을 종료했는데도 채팅창은 한동안 멈추지 않고 올라갔다. 새벽까지 이어진 방송이었음에도 누군가에겐 더 없이 짧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아니면 끝까지 내가 우승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튀어나왔다. 예상을 깨부순다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으니.
새비지를 종료하고는 습관처럼 저컴 게시판으로 들어갔다. 어느샌가 방송을 종료하고 게시판을 확인하는 일이 루틴처럼 자리 잡았다. 메일로 들어온 몇 천자 길이의 기다란 방송 훈수를 듣는 것 보다는, 게시판에서 쏟아지는 직접적인 피드백을 보는 게 훨씬 유용하리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은 방송 채팅방과는 다른 맛이 있기도 했고. 아무튼 커뮤니티를 하던 버릇 같은 게 아직도 남아있던 모양이다.
내겐 하루의 마무리와도 같은 시간이었다. 방송을 종료하고 게시판을 훑는 잔잔한 시간. 대개 뇌를 비우고 쓴 것 같은 가벼운 헛소리만 가득해서 부담 없이 즐기기가 좋았다.
게시판에 들어가, 추천 순으로 나열한 게시글을 클릭하려던 순간이다.
띠링, 하며 베타코드 메세지를 알리는 알람이 들려왔다. 새벽 네 시. 누군가에게 문자를 날리기엔 퍽이나 좋은 시간이다. 방송이 종료된 직후를 노리고 날아온 걸 보면, 아마 주연일 가능성이 높겠지. 방송 편집과 관련된 이야기를 상의하려는 내용일까.
칼고:손수건 받고 싶은데
칼고:이번 주말에 시간 돼요?
...아.
그런 게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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