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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9화 〉 119 ­ 우리 친구 맞잖아 (119/243)

〈 119화 〉 119 ­ 우리 친구 맞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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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손수건이다.

없어도 그만인 물건이다. 그는 손수건 한 장에 거금을 투자할 정도로 명품 브랜드에 눈 먼 사람이 아니었다. 고작해야 몇천 원에 불과한 값싼 물건. 밖에서 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티슈로 손을 닦아낸다는 게 거북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손수건이다. 방 서랍 따위를 뒤지다 보면 비슷한 무늬의 물건이 몇 장씩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굳이 돌려받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저런 제안을 한 건지.

다시 만나는 구실로 삼기에는... 너무 구차하게 느껴지지 않나.

아무렇지 않은 척 메세지를 보내놓고, 가슴 속 깊이 초조함을 느끼며 답장을 기다리는 꼴이 우습게 느껴졌다.

다행히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

Nord:택배로 보내면 안 되나요.

Nord:착불은 안 할게요.

...저건 다 알고 저러는 걸까.

자신과 만나기 싫다는 표현을 에둘러 뱉어대는 건지, 평소처럼 짓궂은 장난을 걸어오는 건지 잘 모르겠다.

마주했을 때 속삭이듯 읊조리던 목소리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감정이 잘 묻어 나오지 않는 목소리. 노르드가 무슨 상황에서든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건 방송을 하기 위한 컨셉이 아니었다.

별 대신 LED 불빛이 빛나던 밤, 노래방 밖에서 진담과 농담의 경계를 구분하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굴렸던가. 표정 변화는 커녕 말투도 그대로라 골머리를 앓았다. 어쩌면, 저건 태생부터가 그렇게 생겨먹은 걸지도 모른다.

듣는 사람만 헷갈리게 만들어서는.

'됐어. 귀찮게 무슨 택배야. 그냥 너 가져요...'

키보드에서 손가락이 머뭇거리다 주저 앉았다. 엔터 키 바로 위였다. 채팅 따위를 치면서 이렇게 망설인 적이 있던가. 방송에서는 수천 명 앞에서도 아무런 주저 없이 말을 내뱉고는 하는데, 지금 이 순간에 무슨 방지턱이 있길래 키 하나를 누르지 못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짧은 문장 하나도 완성하기 힘들었다. 한낱 채팅 한 줄씩을 주고 받으면서 뭐가 이리 많은 잡념이 떠오르는 걸까.

Nord:장난이에요.

탁. 키보드 위를 정처 없이 부유하던 손목이 책상 모서리로 떨어졌다.

Nord:토요일로? 칼고님 휴방하는 날이잖아.

이번에는 장난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제 할 말을 잇는다. 누구는 말 한마디에 수십 가지의 생각을 눌러 담고 있는데도.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커뮤니케이션이었다.

그러면서도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스물스물 기쁨이 가슴 한편으로 기어들어오고 있다는 게 성현의 입장에서 가장 우스운 점이었다.

...내 휴방 날을 알고 있기는 하구나.

칭찬이라도 들었나. 별 의미도 없는 한 문장에 갈대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는 꼴이 같잖기 그지없다. 자기인식을 명확히 한다고 한들 제 맘대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의식해서 내린다고 해서, 마음 속 요동치는 감정까지 컨트롤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칼고:토요일 1시로. 점심이나 같이 먹죠

이번에는 손가락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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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이라도 넘어간 선은, 갈수록 넘기 쉬워지기 마련이다.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않나.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다가도, 막상 경험하고 나면 의외로 별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런 것이다.

처음 수업을 땡땡이 쳤을 때, 처음 담배를 입에 댔을 때, 처음 부모님의 양주를 훔쳐 먹었을 때, 처음 오토바이를 탔을 때... 아무튼 그런 많은 일들.

내 외출도 마찬가지였다.

외출이라고만 표현하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을 만나기 위한 외출이다. 누군가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이 별것도 아닌 행위가 내겐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랬다.

그건 내게 있어 단순한 외출이 아니었다. 혜진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새로운 관계를 쌓아올리기 위한 첫 발걸음... 이라고 말하면 너무 거창할까. 익숙한 성장 소설의 표현을 빌려서 알을 깨고 나온 행위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 아무튼 발버둥이라는 점에선 비슷한 느낌이지 않나.

초면인 사람들만 가득한 스트리머 파티에 참가했던 건, 그만큼 고심하고 고심한 끝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막힌 혈을 뚫어내는 행위라고 해야 할까. 나로서도 언제까지 아무런 인맥도 없는 생활을 계속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초창기에는 분명 집에서 방송만 반복하는 삶에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마, 운 좋게도 방송이 금세 흥했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경제적인 문제가 단편적으로나마 해결된 걸 가지고 좋아했던 때였다.

그러나, 관계의 부재는 한순간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커지는 성질을 가졌던 모양이다.

시시한 잡소리를 들어줄 사람, 새벽에 술 한잔 하자고 불러낼 사람...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자각한 순간 외로움은 갑작스레 밀어닥쳐 나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했다.

...친구가 없는 건 서글픈 일이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친구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쓰러운 시선으로 쳐다볼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 그랬다.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간신히 맺은 인연을 수많은 갈래 중에서 친구라는 카테고리로 인도하는 것도 내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혜진이 되기 전에도 내 좁디 좁은 인맥의 대부분은 학창 시절의 인연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기 싫어도 살아남기 위해선 친구를 만들어야 하는 그 가혹한 환경에서야 내가 간신히 인맥을 넓힐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힘들게 맺어서 이어가던 관계들이 단 한순간에 모두 증발해버린 걸... 어디다 하소연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컴퓨터가 내 친구라고 말하는 소리는, 이제 유쾌하게 들리지도 않았으니.

그러니까 칼고의 제의는 내게도 꽤나 반가운 일이었다. 혜진에게 있어 사람과의 접촉은 귀중한 것이다. 적어도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는 귀찮기 짝이 없는 일련의 과정을 감수할 정도는 됐다.

이 나이를 먹고 친구라는 관계에 대해서 정의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칼고와 내 관계쯤 되면 이건 확실히 친구라고 말할 만한 관계가 아닌가.

게임과 관련된 이야기로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고,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사소한 농을 주고 받기도 하고... 또 이렇게 사소한 물건을 빌려주기도 하고 말이다. 문자 메세지 몇 마디로 약속이 성사되는 관계가 친구가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칼고의 제안을 농담과 함께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장면까지 거의 완벽했다.

누군가에게 나와 칼고의 채팅 내역을 공개하면 분명 친한 친구 관계라고 확신할 터였다. 여기서 얼굴만 좀 더 눈에 익힌다면, 이건 이견의 여지 없는 현실적인 친구 사이였다.

이번 외출은 사실상 서류에 도장을 찍는 행위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렇지. 혜진과 칼고의 친구 계약서에...

칼고, 칼고?

...이 친구 본명이 뭐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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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오후의 도심에선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기 힘들었다.

차가 달리는 도로를 제외하면 모든 곳에 사람이 가득했다. 태양이 하늘 가장 높은 곳에서 빛을 내리쬐고 있는 시간이다. 여름의 열기를 가득 머금은 아스팔트가 한껏 흡수한 열기를 다시 배출해 공기를 달궜다. 도로 위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때문에 자동차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걸 멀리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뜨거운 열기로 인해 자동차가 녹아드는 것 같았다.

화창하다 못해 뜨거운 날이었다.

칼고, 성현은 인파를 헤치고 약속 장소로 들어섰다.

한여름의 더위가 무겁기는 했는지, 잠깐을 견디지 못하고 목덜미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역에서 나와 건물로 들어서는 짧은 거리에도 무더위를 감당할 수는 없던 모양이다. 그나마 땀이 적은 체질이라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이미 땀 때문에 등이 축축해졌을지도 모르겠다.

혜진의 앞에서. 상상만해도 아찔한 광경이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삼십 분이나 남았다.

카페의 서늘한 공기가 가열된 몸을 기분 좋게 훑고 지나갔다. 약속 장소를 카페로 정한 건 혜진이다. 누군가 기다리게 될 수도 있으니, 우선 시원한 곳으로 장소를 정해두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는 설명이었나.

지금 생각하면 훌륭한 판단이었다. 이 뙤약볕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보면 정말 쓰러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시원하지도 않은 가로수 그늘 아래와 에어컨 바람이 서늘하게 다가오는 카페는 비교하기 힘든 대상이었다. 누가 먼저 약속 장소로 도착하리라는 생각에 이런 제안을 했을지.

성현은 커피 한 잔을 시키고는 곧장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더위를 피해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카페 안은 빈자리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테이블 배치를 신경쓴 덕인지, 공간이 협소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잠깐 자리를 물색하던 성현은 운 좋게 카페 안쪽 깊숙한 곳에서 비어있는 테이블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공간 구조 상 입구 쪽에서는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든 자리였다. 자리를 잡고 앉은 성현이 곧장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칼고:카페 들어오면 왼쪽으로 쭉 들어와요

칼고:안쪽에 앉았으니까

메세지를 확인했을까. 한동안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아무런 신호도 없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테이블을 두드리는 성현의 손가락이 속도를 더했다. 혜진과의 채팅은 어제가 마지막이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오늘 새벽까지 이어졌던 노르드의 새비지 방송이 잇달아 재생됐다.

세 시... 세 시 반까지는 성현도 그 방송을 시청했다. 게임에 재미를 들린 건지, 쉬지 않고 게임에 몰입하는 모습이 꽤나 즐거워 보이기는 했다.

물론 다음날 약속이 있는데 그렇게까지 무리를 해도 되는 건지는 차치하고. 그 당시에도 걱정이 앞섰으나 구태여 그걸 지워냈던 것이다. 사적인 일로 방송을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게 지금에 와서 후회되기 시작했다. 빠르게 확인한 노르드의 다시보기 목록은 전날 있었던 그녀의 방송 시간이 열 시간을 넘어섰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장시간 방송에, 새벽 방송. 약속 시간 이십 분 전에도 확인하지 않는 문자 메세지... 점점 끓어오르는 초조함에 기름을 끼얹는 요인들이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지난번 플랫폼 대전 뒤풀이로 스트리머들이 모였을 때를 생각하면,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존재 자체가 두루뭉술한 인간이다. 약속 하나 정도 제끼는 건 일도 아니겠지.

무엇보다, 성현에게는 지금 자고 있을지도 모를 혜진을 깨울 수단조차 없었다. 평소 모든 연락을 베타코드 채널을 통해서 주고 받았으니까. 사적으로는 그녀의 번호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목구멍으로 차가운 커피를 밀어넣고 있을 때였다.

"칼고에몽."

귓가에, 속삭이듯 읊조리는 목소리.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접근이다. 생각에 집중한 성현은 갑작스레 귓가에 파고드는 음성 때문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귀를 중심으로 소름이 퍼져나가는 와중이었다.

혜진이 있었다.

이전처럼 윤기가 흐르는 긴머리와 창백한 피부색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상의는 흰색 반팔 무지 티셔츠를 입고, 밑에는 연한 하늘색의 면바지를 입은 채였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폭이 넓은 옷자락에 가려진 가느다란 굴곡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성현은 곧장 시선을 돌려 혜진과 눈을 마주쳤다. 묘한 광택이 흐르는 검은 눈동자가 그의 눈과 맞닿았다. 눈 밑으로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 전반에는 피로감이 엿보였다. 자신처럼 오면서 땀을 흘렸는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뒷덜미로 달라붙어 있었다. 시선을 의식했는지 혜진이 손을 들어올려 머리를 귀 뒤편으로 쓸어넘겼다.

"...진짜 깜짝 놀랐네. 사람 찾았으면 말부터 해야지, 뭐 하는 거예요?"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뜻 밖에도 퉁명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전의 당황을 숨기려는 듯, 태연함을 가장한 목소리.

"그래서 불렀잖아요."

혜진은 대답과 동시에 성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풀썩하고 몸을 뉘이는 모습이, 앉는다는 표현보다는 쓰러진다는 표현과 더 잘 맞았다. 그녀의 힘 풀린 눈동자가 허공을 이리저리 방황했다.

"어제 몇 시에 잤는데 그래요. 방송 세 시까지 하는 건 봤는데. 약속 있는 거 생각했으면 조금 빨리 끄던가 해야지."

"으응, 거의 안 잔 거 같은데... 해 뜨고 잠들면 못 일어날 거 같아서. 하암. 미안해요. 끊기 힘든 흐름이었어. 오늘 휴방이라 그런 것도 있고­ 아."

평소보다 느릿하게, 나른한 어조로 말을 잇던 혜진이 어느 순간 말을 멈췄다. 힘 풀린 눈동자가 잠깐 크게 뜨인 것이, 뭔가 중요한 것이 떠오른 눈치였다. 그녀의 눈이 성현의 눈과 그대로 맞닿았다.

"칼고님 이름이 뭐예요?"

얼빠진 질문에 성현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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