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120 놀러 갈 때면
* * *
"그럼 성현씨, 라고 불러도 되는 거죠?"
종잡을 수 없는 발걸음은 여전했다.
카페 내부에선 잔잔한 발라드가 흘러나왔다. 앉은 자리가 스피커와 가까워서 그런지, 적절한 볼륨의 음악이 성현과 혜진이 앉은 테이블에 그대로 내려앉았다. 이별의 후회를 읊조리는 노랫말이 다른 사람들이 뱉어대는 말소리를 뒤덮었다. 번잡한 카페 내부가 두 사람의 테이블로 아득하게 좁아졌다.
한 차례 대화를 마치고 난 자리에는 자연스럽게 정적이 깔렸다. 성현이 목을 축이기 위해 커피를 들어올릴 때였다. 돌연 혜진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천천히 앞으로 내민 손에는 가지런히 접힌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나른하게 흔들리는 손짓이 어서 빨리 손수건을 가져가라는 듯 재촉하는 것 같았다.
성현은 마주 손을 내밀었다.
가져가는 과정에서 손끝이 맞닿았다. 부드럽고 가는 손가락. 인내심을 발휘한 성현은 그대로 굳을 뻔한 자신을 내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스쳐 지나간 손가락으로부터 온기가 올라왔다. 창백한 피부색과는 달리, 따듯한 손이었다.
돌려받은 손수건에서는 산뜻한 향기가 맴돌았다.
"빨았어요. 그냥 세탁기에 넣고 같이 돌렸는데. 차라리 새 거 하나 사 올걸 그랬나?"
"아니, 됐어요. 약속 안 제끼고 나온 걸로 만족하고 있으니까."
"응? 그거 무슨 말이에요. 저 약속 안 지키고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렇게 나쁜 사람 만드는 버릇, 나중에 그대로 돌아온다구요."
"...그건 니가 평소에 하는 짓이잖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는 꼴이 발칙하기 그지없다.
"저는 결백해요."
혜진은 그렇게 읊조리면서 커피잔을 들어올렸다. 성현의 이름을 물어보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받아온 커피였다. 무더운 여름날의 더위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 건지, 그녀가 선택한 커피는 뜨거운 아메리카노였다.
그런 주제에 몇 번 홀짝이고는 한참을 방치해두는 게 아닌가. 이미 성현의 커피는 바닥을 보이기 직전이었음에도, 혜진의 커피는 반이 넘게 남아있었다. 매끄럽게 뻗은 손가락이 자꾸 잔 손잡이 부근을 기웃거렸다.
...뜨거운 것을 마시기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럴 거면 그냥 아이스로 시키지 그랬어요?"
"따듯한 걸 선호해서."
"근데 왜 못 마시고 그래?"
"...이건 뜨겁잖아요."
이런 엉뚱한 대답에 당황할 때는 있었으나, 혜진과 대화를 나누면서 어색함을 느낄 일은 없었다. 둘 다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성현은 혜진을 배려하며 대화의 주제 따위를 맞춰줄 필요가 없었다. 방송, 시청자, 게임... 애초에 공유하고 있는 카테고리가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다. 가치관 따위가 맹렬히 충돌할만한 지점도 거의 없었다. 혜진의 내면은, 접근하기 어려운 외견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둘이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처음 노르드와 메세지를 나눌 때의 감정이 다시금 살아나는 것이다. 어딘가 묘하게 뒤틀린 사고의 표면을 걷어내고 나면 그녀는 의외로 이지적인 사람이었다. 그와 취미를 공유하는,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 대회 연습을 도와준 정도의 사소한 계기로 맺어진 인연이 이렇게 길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모니터 뒤의 사람을 궁금해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칼고님? 들었어요?"
"...칼고님? 성현씨라고 한다며."
"아. 입에 익었나봐. 그냥 편한 대로 부를게요. 칼고에몽."
"밖에서 그렇게 부르다 큰일나는 수가 있어요. 누구 한명 알아볼 수도 있잖아."
"으음, 그건 너무 자의식과잉이 아닐까요."
내가 자의식과잉인게 아니라, 네가 조심성이 떨어지는 거겠지.
성현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우물거렸다.
"메뉴 물어봤잖아요. 점심 뭐 먹을지."
"근처 맛집 몇 군데 검색해오긴 했어. 파스타 맛있다고 트라이앵글에 자주 올라오는 식당이 있던데."
"트라이앵글? 식욕이 확 떨어지네요. 왠지 무슨 맛일지 상상할 수 있을 거 같아. SNS에 올라갔다고 하면 식당 가치가 확 떨어지는 거 같지 않아요?"
"...여자들 사이에서 인기 많던데?"
"...아. 여자라고 다 그러라는 법은 없잖아요."
스스로 말을 내뱉고는 잠시 미간을 찌푸린다. 파스타를 싫어하는 건지, 아니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냥 유명한 식당을 꺼려하는 건지 모르겠다.
입맛이 까탈스러운 걸 보니 이제야 외견과 내면이 잘 어울러지는 것 같았다. 성현은 우선 트라이앵글에서 검색한 유명 식당 몇 군데를 머릿속에서 날려버렸다. 평범한 여성을 기준으로 식당을 선정한 건 애초에 잘못된 일이었다. 평범하지가 않은 인간인데.
"그럼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메뉴로 정해봐. 근처에 식당가 있으니까 어지간하면 있을 거야."
혜진은 성현의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뭘 먹을지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가느다란 손끝이 갸름한 턱에 맞닿았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는 자세였다. 작은 얼굴을 지탱하는 희고 가는 팔목이 성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힘을 줘서 잡으면, 쉽게 부러질 것 같은 굵기였다. 평소에 뭘 먹길래 저리도
"우리 그냥 햄버거나 먹을까요?"
"수제 버거? 괜찮지."
"아니, 그냥 프렌차이즈 햄버거. 점심은 대충 해결하고 이동하는 게 낫잖아. 시간도 아끼고."
"...무슨 고딩이냐? 뭘 대충 때워요, 대충 때우기는."
어처구니 없다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성현의 시선이 그대로 혜진에게 향했다.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성현은 그녀가 마른 이유를 얼핏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인간은, 끼니를 단순히 해결해야 하는 귀찮은 무언가로 인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열 시간이 넘게 방송을 계속할 때도 밥을 먹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면 하루 한 끼로 삶을 연명하지 않을까.
얼추 비어가는 혜진의 커피잔을 확인한 성현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따라와요. 햄버거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그럼 국밥?"
"쓰읍."
"..."
성현이 혜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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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선사하는 적정치의 식사량은 밥 반 공기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용하지 않는 위장은 쪼그라든다고 했던가. 혜민의 방문 이후 식단 관리를 하는 와중에도 위장을 늘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점도 있었다. 많이 먹을 수 있게끔 기능을 늘려서 도대체 어디다 사용하겠는가. 식비와 함께 밥 먹는데 소요되는 시간만 늘어나는, 비효율의 극치였다.
영양소만 얼추 다양하게 챙길 수 있다면 인간은 하루 한 끼로도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생명체였다. 그렇다면, 최대한 압축해 식사 시간을 절약하는 쪽이 여러모로 이득이 아니냐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자취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게 깊게 자리 잡은 사고방식인데, 이는 혜진이 되고 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안 그래도 좁았던 위장이 더 줄어든 영향일까.
애초부터 나는 미식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배가 가득 차 부풀어 오른 상태는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위장까지 먹을 게 들어있는 것 같은 불쾌함.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두드리는 만화의 한 장면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나 쳐먹고 어떻게 만족감을 느끼는지.
그런 내게, 간만의 과식은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배가 부르다고.
"뭐 얼마나 먹었다고 그래요? 억지로 먹인 것도 아니고."
맞은 편에서 칼고... 성현이 말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뉘다시피 기대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진 모양이다. 퉁명스럽게 물어보는 꼴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모두 먹으라고 압박을 해 놓고는. 식기를 내려둘 때마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혜민이 떠오르는 눈초리였다. 냉정히 밀어내기가 묘하게 힘든, 걱정이 섞인 압박의 눈초리. 내겐 대놓고 먹으라는 소리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주류도 없이 위장에 기름칠을 하는 게 얼마만인가. 유명한 일식 돈가스라고 했었나. 확실히 맛은 있었지만, 절반 정도만 먹었어도 충분했을 양이었다. 혜진의 작은 위장에 고기 튀김은 너무 버거웠다.
"위가 터질 거 같아요."
"보통 배가 터질 거 같다고 하지 않나."
"배까지 내려가지도 못했어요. 이건 위야."
내 말이 농담처럼 들렸는지 성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기 몫의 음식은 이미 깔끔하게 처리를 한 뒤였다. 성인 남성 기준으로는 많은 양도 아니었겠지. 저런 걸 보면 신체의 차이가 정말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어느샌가 기준점이 혜진의 육체로 잡혀버린 게 그제야 실감이 가는 것이다.
탁
물컵을 내려둔 성현이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첫 대면부터 말을 할 때면 매번 저렇게 눈을 마주치려는 태도를 보였다. 마치 사람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눈을 보고 말하라는 교육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손수건을 들고 다닐 정도로 깔끔한 성격과 더불어, 저런 습관이 사람을 말끔하게 만드는가 싶었다.
나와 정확히 눈을 마주한 채, 성현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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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콘솔방이라도 갈까요? 뭐든 같이 하면 재밌을 텐데. 성현씨 격투 게임은 좀 쳐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는 있는 걸까.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음 일정에 대한 물음이었다. 성현이 전날 밤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혜진과 같이 뭘 할 수 있을지. 떠오르는 생각의 대부분이 머릿속에서 자체적으로 검열되기 일수였다. 노르드가 이런 걸 선호할 리가 없다는, 성현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필터의 작용에 의한 결과였다.
자신이 혜진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다고 그런 필터를 돌린다는 말인가. 대부분이 그간 나눴던 대화 내역에서 추출한, 말 그대로의 어림짐작에 불과했다. 그 애매모호한 기준점은 어떻게 되먹었는지 엄격하기 짝이 없었다. 영화나 노래방 따위의 선택지는 대번에 차단될 정도였다.
결국 성현은 누운 자리에서 몇 가지 경우의 수를 돌려보다가 지쳐서 잠들고 말았다. 마땅한 계획을 마련하지도 못한 채였다.
그래서 혜진에게 물었던 것이다. 조금이나마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서.
거기서 대번에 콘솔방을 운운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저 사람은 콘솔방이 대체로 밀폐된 룸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걸까. 뒤이어 덧붙인 물음이나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표정을 보면, 그런 걸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아 더 열불이 났다.
그래서, 무심코 즉답을 내뱉은 것이다.
"좀 치지, 당연히. 그럼 콘솔방 갈까요? "
"음, 그럼 바로 가죠."
돌아오는 혜진의 대답은 생기마저 느껴졌다. 빠르게 의자에서 일어서는 움직임에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의자를 집어넣고 등을 돌린 그녀는 곧장 카운터로 걸어나갔다.
순간 남녀 관계가 바뀌었나 생각한 성현이, 멍청한 표정으로 일어난 건 그보다 조금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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