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121 동상이몽
* * *
콘솔방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뜨거운 뙤약볕을 생각하면 두 사람에게는 몹시 다행인 일이었다. 냉방이 열심히 일을 하던 식당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나서는 순간의 낙차는 견디기 힘들었다. 자외선인지 뭔지가 피부를 콕콕 찔러대는 것 같았다.
위치 어플을 키고 성현이 앞장 서서 이동하는 내내 혜진은 말이 없었다.
외출 한 번 하지 않은 것 같은 창백한 피부가 태양빛을 받아 더욱 하얗게 보였다. 생기있는 빛이라기보다, 희게 질려간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걸음이 너무 빠른가 싶어 뒤를 흘끗 바라본 성현은 오히려 걷는 속도를 더 올려야만 했다. 당장에 어딘가로 들어가지 않으면 혜진이 쓰러질 것 같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인파가 가득한 길을 헤쳐 걸었다. 온갖 소음으로 가득한 공간이었음에도 성현은 혜진을 만난 이래 가장 깊은 정적을 느꼈다.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 않아서 일까. 스마트폰 화면을 훑는 기계적인 공정을 반복하는 내내 성현의 머리는 잡념으로 가득했다. 이미 그의 마음은 콘솔방 룸 안에 머물러있는 것 같았다.
어플에 표시된 콘솔방은 커다란 상가 건물의 3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건물 표면을 가득 채운 간판 중에서 간신히 원하던 이름을 찾아낸 두 사람은 재빨리 상가 내부로 들어갔다. 햇빛이 비추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흘러나온 냉방의 영향인지 복도로 들어선 순간 금세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덮었다. 뜨겁게 달궈진 피부는 그만큼 빨리 식었다. 성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아. 성현씨 얼굴 가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번에는, 또 성현씨.
상가 내부에 들어온 직후였다. 조금 숨을 돌렸는지, 한결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의 혜진이 입을 열었다. 잠깐 그 울림을 되새기던 성현이 조금 늦게 대답했다.
"...갑자기 왜?"
"혹시 알아볼 수도 있잖아. 칼고 정도면 유명한 사람 아닌가."
"그걸 이제와서 걱정해요? 아까는 자의식 과잉이라며. 알아볼 거면 길거리에서 진작에 알아봤겠지. 피시방 같은 곳 대놓고 들어가는 거 아니면 그럴 일 없어요. 애초에 처음 보는 사람이라 얼굴 대충 보고 넘어갈걸."
"아...뭔가 콘솔방 알바면 인방 쪽 잘 알 거 같잖아. 선입견인가?"
"선입견이지."
만에 하나의 문제다. 만에 하나. 정말 드문 가능성으로 성현의 얼굴을 알아본다고 한들, 큰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었다. 기껏해야 스트리머 칼고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나보다 하는 루머가 커뮤니티 구석진 곳에서 퍼지는 정도에서 그치겠지.
요는 증거가 없으면 되는 것이었다. 어딘가에서 노르드의 얼굴을 보았다는 둥 헛소리를 내뱉어봤자 사진이 없으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말이었다. 성현과 혜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누군가 사진으로 촬영한다던가 하는, 상상하기 힘든 불상사만 아니면 큰 문제가 될 일은 없을 터였다.
잠깐 혜진의 신상정보가 인터넷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상상을 한 성현은 아찔함을 느꼈다. 어쩌다 그녀가 노르드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면, 어떤 대참사가 일어날지. 스토커 하나 둘 쯤 생기는 일이야 우습지 않을까.
성현은 곧장 그 최악의 가정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걱정할 필요는 없던 것 같았다. 성현은 콘솔방을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카운터의 중년 남성을 보고 확신했다. 나이대를 생각하면 아마 사장일까. 심드렁하게 이쪽을 쳐다보는 눈길이, 익숙한 커플 손님 따위를 대하는 눈치였다. 그걸로 일말의 불안감을 모두 정리한 성현이 곧장 카운터로 접근했다.
성현과 혜진이 들어온 콘솔방은 예상한 것과 매우 흡사한 구조였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함인지 개방적인 구역에 밀집된 형태로 배치된 자리가 다수 존재했다. 성현이 처음 생각한 밀폐된 룸 형태의 공간은 공개된 자리보다 비싼 금액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성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룸을 선택했다.
대충 보이는 타이틀을 고르고 안내받은 룸은 생각보다 협소했다. 작은 노래방을 연상시킬만틈 좁은 공간이었다. 소파가 있는 자리에서 한쪽 팔을 온전히 펼치면, 그대로 반대편의 상대방과 맞닿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성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환풍이 제대로 되지 않는지 방 내부의 공기가 텁텁하게 느껴졌다. 베이지색 벽지에 묻어난 흐릿한 회색 무늬는 누군가가 담배를 폈던 흔적일까. 깔끔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 인테리어를 마친 지가 꽤나 오래된 장소인 것 같았다.
성현이 군데군데 흠집이 가득해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오는 컨트롤러를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바라보고 있을 때, 대번에 컨트롤러를 집어든 혜진이 소파 우측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텁텁한 공기나 낡아빠진 콘솔방의 환경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빨리 안 앉고 뭐해요? 시간 가잖아."
...맞는 말이었다.
밀폐된 공간이다. 들어오고 보니 생각보다도 더 좁았다. 모션 인식 컨트롤러 따위를 조금 과하게 휘두른다면 금방이라도 피부가 닿을 듯한 거리였다. 실제로, 잠시 모니터에서 눈을 돌려 귀를 기울이면 상대방이 내쉬는 호흡까지 들려오고는 했다. 이 정도면 어쩌다 손이 맞닿아도 자연스럽게 넘어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혜진의 얼굴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하얀 피부에 오뚝 솟은 코가 유려하게 떨어졌다. 몇 번인가 뒤로 쓸어넘긴 머리카락 때문에 혜진의 가는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목 아래로 내려가면, 조금 품이 넓은 무지 반팔 티 사이로 쇄골 라인이 조금씩 엿보였다.
성현은 내색하지 않고 시선을 들어올렸다.
뭘 그리 집중하는지,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모습이었다. 반개한 눈꺼풀이 움직이는 걸 제외하면 정지한 영상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그게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이, 쉽사리 지워지지는 않을 듯한 광경이었다. 콘솔방을 가자는 혜진의 말을 듣자마자 떠올렸던 망상들이 다시금 부풀어올랐다.
그러니까, 뭔가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K.O! Winner, 카빈》
"이겼다. 칼고씨 집중 안 해요? 맞고만 있으면 어떡해. 그럼 나도 때리는 보람이 없잖아요."
"...신났네, 아주."
모니터에서 나오는 화려한 승리 연출을 보면서, 혜진은 기쁘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활짝 웃는 표정은 아니었으나 평소 그녀의 무감정한 얼굴을 생각하면 꽤나 극적인 변화였다. 격투 게임으로 성현을 이긴 게 그만큼 기쁜 건지, 아니면 지금 이 상황 자체를 재밌어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즐기고 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이런 걸 기대하지는 않았었는데.
성현은 괜스레 손에 든 컨트롤러를 만지작거렸다. 한쪽 벽면을 장식한 대형 모니터는 어느새 다시 대전 캐릭터를 고르는 선택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혜진이 이것저것 캐릭터를 골라가는 와중에도 성현은 온전히 화면에만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런 것보다 눈길은 혜진에게로 향했다. 이전에 맥 없이 패배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하고 있는 게임도 때려치우고 싶었다.
반면 혜진은 온전히 게임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에 들어오고 나서, 그녀의 시선은 모니터로 고정된지 오래였다. 뭔가 추억이 깃든 물건을 바라보듯 아련한 눈빛은 덤이었다. 이 오래된 격투 게임에 학창 시절의 기억이라도 있는 걸까. 그는 거기에 얽힌 사연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성현의 머릿속에서 소원권이라는 단어가 점멸하듯 존재감을 내비쳤다. 이루 정리할 수 없는 온갖 소원들이 망상 속 소원권의 여백을 빼곡히 체워넣었다.
당연히, 방송과 관련된 소원은 아니었다.
"뭐해요, 캐릭 안 고르고."
"...아니. 생각을 좀 했지."
"생각해도 못 이길걸요?"
"너는 콤보도 넣을 줄 모르면서 왜 입만 살았어? 지면 어떡하려고."
"콤보... 그건 버전이 달라서 그래요. 원래 할 줄 알았는데."
혜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캐릭터를 골랐다. 급격히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승부에 진심이라 게임에 집중하려는 걸까.
문득 지금 바로 모니터를 꺼버리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 그 때는 나를 볼지도 모르는 일이지. 성현의 내면에는 이미 심술이 가득 차오르는 상태였다.
...참아야겠지.
자신만 게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헛된 생각을 부풀린 건 자신뿐이었던 모양이다. 잠깐 아랫입술을 깨문 성현이 그제서야 컨트롤러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억지로라도 게임에 집중해야겠다는 결심과 함께였다.
콘솔방의 이용시간이 성현에게만 유독 길게 느껴졌다.
###
이 씨발련은 공지도 안하고 맘대로 휴방하네ㅋㅋ
프리시즌이라고 나이트폴은 안하고 새비지만 존나 하더니 주말에 휴방ㅋㅋㅋ 프리시즌 끝나고 하는거보자 진짜로
ㅇㅇ:네 다음 방구석 개백수
ㅇㅇ:응 나 회사다녀 병신련아ㅋㅋ
ㅇㅇ:네 다음 퇴근하고 노르드 방송만 기다리는 쓰레기좆소 1년차 신입사원
ㅇㅇ:어제 방송에서 오늘 쉰다고 말했어 우리 센세 음해하지마
ㅇㅇ:하긴 뭘해 찐따년이 끽해야 채팅창에 도배라도 한줄 더하겠지ㅋㅋ
방송에서도 티 엄청 내더니 이제 휴방일정까지 대놓고 맞추네...ㅠㅠ 지금쯤 서로 손잡고 몸 부비고 있겠지?? 나도 노르드 손가락 핥고 싶은데... 방송 킬때까지 메일이나 보내야겠다
ㅇㅇ:이새끼는 똑같은 억떡만 존나 굴리네 그만좀해 엠생년아
ㅇㅇ:휴방 겹치는게 몇번째인데...ㅠ 나도 아니었으면 좋겠어...
ㅇㅇ:말투 진짜 죽이고싶노
ㅇㅇ:남자랑 여자가 만나서 섹스할수도있지 뭔 호들갑이세요 ㅎㅎ
ㅇㅇ:노르드는 처녀임
ㅇㅇ:ㅋㅋ 암요암요
ㅇㅇ:칼고가 그 와꾸에 면상 좆빻은 멸치년이랑 사귀겠냐? 노르드 육수인것 같은데 억지 흑화 그만하고 게시판가서 놀아라
ㅇㅇ:노르드 존나 예쁘다고 스벅피셜났는데 뭔ㅋㅋ 칼고랑 만나면 선남선녀지 뭐
ㅇㅇ:스벅ㅋㅋㅋㅋ 그 새끼 방송에 미친새낀데 걔 말을 믿냐? 그럼 실물봤는데 방송에서 좆빻았다고 말할리가 없잖아. 예쁘다고 밑밥 깔아놔야 육수들이 궁금해서 도네 쏘는거지ㅋㅋ 어휴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네 이거
둘이 합방하는거 보면 케미 잘 맞는거 눈에 보이잖아. 칼고도 그동안 합방 거의 안하던 스트리먼데 노르드 만난 이후로 빈도 엄청 늘어났고
노르드는 말할 것도 없음ㅇㅇ 다른 사람들이랑 말할때는 벽 엄청 치면서 칼고한테는 먼저 농담도 치고 스스럼없이 대함. 이 정도면 공인했다고 봐도 되는거지ㅋㅋ
ㅇㅇ:노르드 칼고랑 존나 엮네 씨발련이 진짜 칼침맞고싶나
ㅇㅇ:우결충들 없는 회로까지 죄다 끄집어내서 억결만드는거 토악질나온다. 멀쩡히 겜방하는 스트리머 방송 씹창내지말고 그냥 구석에 짱박혀있어라
ㅇㅇ:댓글보면 노르드 육수 존나 잘끓인 티가나네ㅋㅋㅋㅋ 방송 잘되는 스트리머는 다 이유가있다
ㅇㅇ:둘이 사귀는거 맞나보네
ㅇㅇ:뭘 맞아 씨발아 쳐맞을라고 근거 하나도 없는 억떡이구만
ㅇㅇ:근데 애들 왜케 흥분한 상태임? 진짜 몰라서 그래
ㅇㅇ:원래 여스보는 새끼들 남친생기는거에 발작함. 과몰입하는 병신들이 많아서ㅋㅋ
ㅇㅇ:니가 노르드 방송봐봐 씨발아...
게시글 몇 페이지에 죄다 노르드 얘기밖에 없냐ㅋㅋ
칼고랑 우결 억떡 굴리는 흑화 육수들이랑 노르드 쉴드치는 팬덤새끼들이랑 아주 개판이 따로 없음ㅇㅇ
노르드 이야기만 할거면 따로 갤파서 나가던가 저컴 게시판에서 떠들어 ㅅㅂ련들아 저스틴 갤에서 뭔 지랄이냐 진짜
ㅇㅇ:지금 대기업 생방이 없어서 그래...
ㅇㅇ:노르드 저컴게시판 관리자 생긴 뒤로 안감ㅋ 어그로끌라그러면 칼같이 짤라서 노잼
ㅇㅇ:관리자 낮에도 일함?
ㅇㅇ:거기서 좀만 놀다보면 걍 24시간 상주한다는 생각밖에 안듬 관리자 미친놈임
ㅇㅇ:노르드로 갤 도배되는거 신경쓰는거보면 이새끼 그림자단이네ㅋㅋㅋㅋ 느그 주인 요즘 시청자 수 떨어지는거 보니까 가슴 철렁이디? 갤 씹창나는거 한두번도 아닌데 언제부터 신경을 썼다고 지랄이야
ㅇㅇ:노르드가 방송만 키면 이런 병신도 저런 병신도 없을텐데... 방송을 안킨 노르드의 잘못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