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122 휴방 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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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망, 민아의 주말은 제법 바쁜 편이었다.
정기적인 휴방 날이 평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의 주말은 방송을 제외하고도 유독 할 일이 많은 날이었다. 다음주에 있을 방송을 준비하는 시간이었으니까.
학교를 쉬는 두 동생이 집을 시끄럽게 채우는 와중에도, 민아는 어느샌가 일터가 되어버린 방음 부스 안에서 제 할 일을 하나씩 해결해야 했다.
다음주 방송 스케줄을 만들어서 올리는 일, 새로운 컨텐츠를 만드는 일, 영상 편집, 게시판 확인, 메일 체크... 사소한 일 하나하나를 전부 언급하자면 끝이 없었다. 최근 탄력을 받기 시작한 방송 성장에 힘입어 민아가 주말에 처리해야 할 일들도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었다.
고작 두세 개에 불과했던 메일함이, 수십 통으로 늘어났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녀도 뿌듯함을 느끼는 중이었으나... 기쁨이 모든 단점을 덮어버리지는 못하는 법이다.
기쁜 만큼 민아에게는 그만큼의 부담이 함께 얹어졌다. 구독자가 늘어감에따라 늘어나는 편집에 대한 부담감도, 감정이 그득히 묻어나오는 메일을 의무감에 읽어가다 보면 쌓이는 정신적 피로감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많은 일들을 밀린 숙제처럼 한꺼번에 처리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이럴 거면 휴방 날로 지정해둔 하루에 귀찮은 일 몇 가지를 분배해서 처리하면 얼마나 일이 편해지겠는가. 그러나 마음 먹는다고 해결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민아은 이런 후회를 벌써 열 번도 넘게 반복한 것 같았다.
그쯤되면, 후회조차 일상으로 녹아든 셈이다.
오후 열두시. 그녀는 뻑적지근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전날 잠든 시간을 생각하면 이것도 이른 아침이었다. 열한시부터 맞춰둔 알람이 몇 분 간격으로 울려댔는데도, 한 시간이 더 지난 후에야 간신히 눈을 떴다. 사실 알람이 울렸다는 자각도 없었다. 의식도 못하는 비몽사몽한 상태로 몇 번인가 알람을 꺼버렸을 게 분명했다.
토요일의 기상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일어남과 동시에 화장실로 기어들어간 그녀는 대충 세안을 마쳤다. 어차피 방송을 준비하면서 샤워를 할 테니 지금은 대충 때워도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그러고는 곧장 계란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고 방음 부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알람 시간을 넘어서 늦잠을 자버린 이상 밥 먹을 시간도 아깝다는 판단에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오늘은 다행히 막내 동생이 집에 없어서, 기상하자마자 방음 부스로 기어들어가는 그녀를 막아설 방해꾼도 존재하지 않았다.
방음 부스가 설치된 안쪽 방으로 들어가기 전, 거실에서 TV를 시청하는 모녀의 한두 마디 잔소리가 통행료의 전부였다. 최근 큰동생의 잔소리 빈도가 줄어든 건 매우 큰 희소식이었다. 아마 두둑하게 건내준 용돈이 큰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모양이다.
부스 안은 거실보다 서늘했다. 미리 에어컨을 틀어달라는 그녀의 부탁은 언제나 어머니의 손으로 충실히 지켜지고는 했다.
익숙한듯 의자 밑둥에 발등을 걸어 공간을 확보한 그녀는 토스트와 우유가 담긴 접시를 모니터 옆 공간에 내려두었다. 그러고는 곧장 컴퓨터부터 가동했다.
이 순간부터, 방송 준비를 위해 화장실로 향하는 순간까지 그녀는 붙박이처럼 부스를 떠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편집 프로그램을 먼저 실행한 마우스가 자연스럽게 인터넷 브라우저 아이콘으로 이동한다.
홈페이지로 설정된 저스틴의 메인 화면. 익숙하게 자신의 팔로우 스트리머 목록을 훑던 쪼망은, 이내 목록을 크게 펼쳐 방송을 하고 있지 않은 스트리머의 이름을 찾았다.
'Nord11'. 노르드의 아이디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민아가 의자 위에 앉아서 컴퓨터를 바라보는 시간의 전부가 순수한 노동으로 활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주말이 유독 길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민아가 하는 모든 업무는 좋아하는 스트리머의 방송, 혹은 재방송과 함께 진행되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니까.
편집을 하다가도, 스케줄을 짜다가도, 메모장 따위를 키고 방송 컨텐츠에 대해 쥐어짜더라도 그녀의 일과에는 늘 배경음처럼 방송이 함께했다. 그 방송에 한눈이 팔려 본업을 깜박하는 시간이 일이 하루에도 수 차례씩 발생하는 것이다. 그게 습관처럼 자리 잡아서, 이제는 민아 스스로도 고치기를 포기한 고질병이 되어버렸다.
생각해보면 최초부터 그게 농땡이 수단의 하나로 이용되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스트리머를 시작하고 초창기, 잘 나가는 다른 스트리머의 방송을 참고하고자 틀어두었던 게 이 요상한 습관이 정착하게 된 계기가 되어버렸다.
최근 그녀가 즐겨보는 방송은 단연코 노르드의 방송이었다. 물론, 그 참고하기 힘든 방송 스타일에서 무언가를 배워가고자 하는 선택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면 단순히 노르드의 방송에 재미를 들린 것에 가깝겠지.
어쩌다 빠져들었을까. 어느샌가 쪼망은 노르드의 시청자 중 한 명으로 거듭난 것이다.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가 좋아서, 압도적인 인게임 퍼포먼스가 좋아서, 시청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마이웨이로 방송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사실 명확한 이유는 없었다. 좋아하는 이유는 갖다 붙이기 마련이라고 하지 않는가. 어쩌면 플랫폼 대전과 뒤풀이를 거치면서, 사람 자체에 호감을 가지게 된 게 계기일지도 모른다. 노르드라는... 아니, 혜진이라는 사람에게.
아직도 제 옆자리에서 속삭이듯 말을 걸던 혜진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이어폰을 꽂고 노르드의 방송을 틀어놓고 있노라면,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재현되고는 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예쁜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다들 비슷한 모양이다. 화장기가 옅은 하얀 얼굴을 새초롬하게 기울이고선, 그 예쁜 손으로 오렌지를 건내주던 모습은 쉽게 잊을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사람을 보고 그토록 친해지고 싶다 느낀 것은 오랜만이었다. 아마 고등학생 때나 느꼈을 법한, 어리고 앳된 감정. 그날 이후로 매일 문자를 보내며 적극적으로 몸을 들이민 것도 전부 나름의 절실함을 담고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노르드는 휴방을 한다고 했던가.
일을 하기 싫다는 마음에 연기처럼 피어오른 호기심은 어느새 그녀의 머릿속 전부를 가득 채워버렸다. '노르드는 과연 휴방 날 무엇을 할까' 라는, 다소 악성 시청자와 흡사한 측면이 있는 의문이었다.
본래 방송을 하지 않는 스트리머의 사생활에 대해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닐 텐데. 쪼망으로서는 비밀스러운 노르드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고 싶다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노르드는 방송에서도, 사석에서도 자신의 일상에 대한 말을 매우 아끼는 편이었다. 게임으로 그녀를 접하고 팬이 된 다수의 시청자가 그렇게나 노르드의 사생활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원래 비밀만큼 사람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도 없지 않은가.
일반 시청자에 비하면 노르드에 대해 훨씬 잘 알고 있다 자부하는 민아도 그녀에 대해 궁금한 게 많기는 매한가지였다.
과연 노르드는, 혜진은 휴방 날에 과연 뭘 하고 있을 것인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찾은 손이 혜진의 이름을 바로 찾아냈다.
'조금 자연스럽게... 혜진님... 아니, 혜진씨? 지금 뭐 하시나용... 혹시 시간되시면 저랑 새비지... 아, 이러면 휴방 날 괜히 신경쓰이게 하는 거 같잖아. 으응...'
문자 하나에도 신경을 쓰는 정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노르드에게 문자를 보낸 쪼망은 자연스레 마음속 혜진을 데려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재료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뒤풀이 날 만났던 혜진의 외형과 그녀가 방송에서 보여주는 모습,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눴던 대화들.
취미를 떠올리면 역시 게임 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최근 노르드의 방송을 지켜보면, 새비지와 같이 유명한 게임뿐만 아니라 쪼망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이런저런 게임들을 많이 가져와 플레이하고는 했으니까.
그러나 혜진의 얼굴을 생각하면 도무지 집에서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보다는 조금 더 분위기있는 취미를 즐길 것 같았는데.
아, 그러고보면 혜진은 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방송을 할 때도 종종 음주 의혹(캠이 없었기 때문에 시청자들도 확신은 못했다)이 제기되기도 하고, 밤 늦게 메세지를 나눌 때면 취기가 묻어나오는 답장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뒤풀이에서 연거푸 잔을 넘겼던 모습도 그렇고. 그토록 술을 좋아한다면, 휴방 날에 홀로 술을 즐기는 취미를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혜진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역시 떠들썩한 술집보다는 분위기있고 조용한 바(bar)가 어울리겠지. 그곳에서 이름모를 양주를 한잔씩 꺾어가며 조용히 취해가는 게 그녀의 은밀한 취미인 것이다. 어쩌면 조금 이른 지금에도, 단골 바를 찾아 분위기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안개처럼 희미한 형상으로 혜진의 모습이 그려졌다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모두 답지 않게 퇴폐적인 미소를 띈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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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골이다."
《슛! 골, 골! 이수철 선수의 강력한 슈팅! 인천이 또 한 골을 가져갑니다! 강원의 수비가》
"씹... 너 이거 왜 이렇게 잘해. 축구 게임도 했었어요?"
"싱가는 했었는데."
"싱가? 싱가가 뭔데요."
"성현씨, 아직 어리네요."
"...꿀밤 한 대만 때려도 돼?"
"안돼요. 그럼 이기셨어야죠. 꿀밤은 보통 승자의 권리잖아."
"......"
"소원권으로 코스프레 방송시킬 거야."
"......그럼 나 방송 접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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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
한쪽에 노르드의 이전 방송을 틀어둔 민아가 이제 막 엘튜브 영상 업로드 예약을 마쳤을 시점이다.
그녀의 방음 부스를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민아는 방문자가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시간에 노크도 없이 방에 들어올 사람이 누구일지는 안 봐도 뻔했으니까.
"유정아, 노크하고 들어오라고 했잖아."
"응? 어차피 언니 이어폰 크게 해두면 못 듣잖아. 과일 가져왔어."
역시, 그녀의 동생인 유정이었다.
유정은 사과와 참외가 담긴 접시를 들고 민아가 앉은 자리로 접근했다. 아마 가족 구성원 중에서, 그녀가 하고 있는 방송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사람이 유정이었다. 보지 말라고 그렇게 애원해도 매번 방송을 챙겨보는 듯하더니, 어느날부턴가 이렇게 방음 부스 안에도 맘대로 드나들었다.
방송을 방해하는 일은 일절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편집은 다 끝난 거야? 저번 영상 꽤 깔끔하던데."
"응, 그랬어? 헤헤, 댓글도 꽤 반응이 좋더라고."
그녀와 달리 활달한 성격의 동생은, 방송에 대해 꽤나 직접적인 피드백을 건내고는 했다. 생방송 스트리밍에는 적용하기 힘들었으나 엘튜브 편집 영상에는 유효한 충고들이 많았다. 소위 말하는 '인싸'들의 시선에서 감상을 말해오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전공을 살린다고 자체적인 편집을 이어나가고 있는 민아에게는 이런 객관적인 시선 하나가 큰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책상 한쪽에 접시를 내려둔 유정은 민아가 앉은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리고는 잠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방송을 시작한 이후로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녀의 큰동생은, 아무래도 방송을 시작한 제 언니의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 사실을 공개하고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방송 환경을 바라보고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흥미로운 것 같았다.
우웅
그즈음 민아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진동을 듣자마자 바로 혜진을 떠올린 그녀가 재빨리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아챘다. 평소 노르드의 답장 속도를 생각하면, 이건 기록할만한 속도에 가까웠다. 물론 이 진동이 혜진의 답장이 맞을 경우의 일이지만
<혜진씨!*노르드님*/>
다음에 같이해요.
저 지금 칼고에몽이랑 축구중이라 ^^&
민아에게는, 해석이 필요한 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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