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125 쉬는 날, 다가오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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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최초의 음악 방송이 끝난 후로 사흘이 지났다.
음악 방송. 그래, 음악 방송이다. 게시판에서 고문 방송이라는 멸칭을 사용하는 시청자들이 간혹 보였으나, 그건 정말 인터넷 커뮤니티 특유의 비하적 표현에 불과했다.
괜찮은 노래를 찾아 몇 번 반복해서 들었다고 고문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건 너무 과한 일이 아닌가.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는 단어였다.
아무튼, 그 방송이 끝나고 사흘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마지막 방송으로부터 3일이 지났다. 그 날 이후로 오늘까지 방송을 킨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사실 그 날도 취기로 인한 충동이 아니었다면 예정대로 휴방을 했을 날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사흘이 나흘이 되는 셈인가.
충동적인 방송. 성현과의 술자리에서 여러 자극을 받았던 게 문제였다. 노래방을 가봤자 부를 노래도 없을 거라는... 그 별 것도 아닌 말이 왜 갑자기 내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머리를 맴돌던 알코올의 성분이 숨겨진 감성 따위라도 건드렸는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대충 샤워를 마치고는 바로 방송을 틀어버린 것이다.
그 날 방송에서 실행한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는 사실 방송을 켜기 직전에 설치한 것이었다. 혜진이 된 뒤로 가요에 관심을 가진 적은 거의 없었으니, 그것도 당연한 일이다.
채팅창에서 그 난리가 날 줄은 몰랐다. 휴방을 예고하고 방송을 했으니 막연하게 시청자들이 기뻐하리라 생각했건만,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는 사실 하나로 그렇게나 빨리 의혹이 굴러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몽롱한 정신으로 대부분의 채팅을 흘려 넘겼기에 망정이지. 다음날 또렷한 정신으로 다시 본 채팅창은 내 생각보다 훨씬 온도가 뜨거운 상태였다.
개소리라 치부했던 되도 않는 채팅 사이로 진심 어린 감정이 섞여드는 걸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성현의 말마따나 취한 상태로 방송을 켰던 게 근본적인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별의별 일이 다 있는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일개 스트리머의 사생활에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다는 말인가. 메일함을 수북히 채운 연애편지(매우 노골적인 내용에 비하면 꽤나 고풍스러운 표현이라고 자부한다) 세례가 단순한 장난질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 방송의 어떤 점이 그들을 그렇게까지 몰입하게 만들었을까. 내가 여성스러운 매력을 풍기는 점은 외피를 둘러싸고 있는 얼굴 가죽뿐이지 않나. 모니터 너머로 숨겨진 혜진의 얼굴을 투시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도 시청자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조금 아찔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휴방이 길어진 원인이 그날의 방송에서 기인한 건 아니었다.
사실 요 며칠간 이어진 휴방은 예정된 일이었다. 나이트폴의 신규 확장팩이 출시되기 전, 방송을 정비하고자 만들어둔 일종의 여름 휴가였다.
시청자들에겐 말하지 않았다. 며칠 연속으로 방송이 없다고 하면 한번에 커다란 실망감이 찾아올 게 분명하지 않은가. 그럴 바에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기다리는 쪽이 훨씬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날 방송이 없다면 하루치의 실망감만 남고 말 테니까.
그간의 방송 경력으로 나도 시청자를 배려하는 태도가 몸에 익은 것이다. 휴방 계획조차 시청자를 생각하는... 지금 생각해도 꽤나 훌륭한 판단이었는데
잔뜩 불이 난 게시판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 휴방 전날의 방송이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싶었다. 마무리가 허술하면 어떤 장치를 해놔도 뭔가 엉성하게 보이기 마련이라더니, 지금 내 꼴이 딱 그랬다.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다고 계획을 틀어서 방송을 이어갈 것도 아니었는데. 방송을 쉬는 동안, 난 게시판도 대강 훑어보듯 하며 빈둥거렸다. 휴식도 열심히 쉬어야 의미가 살아나는 법이니까.
물론 그럼에도 방송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둥둥 떠다니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컨텐츠에 대한 고민이나, 엘튜브 채널에 대한 고민 따위가 그랬다. 떠오르는 생각들 대부분이 나이트폴 신규 확장팩과 관련되어 있었는데... 그건 억눌렀던 호기심이 제멋대로 뛰쳐나온 결과나 마찬가지였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도 나이트폴의 새 시즌을 간절히 기다렸던 것이다.
확장팩에 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피해온 게 전적으로 내 선택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꽤나 멍청하게 느껴지는 자기 고문이었다.
왜 그런 다짐을 했던가. 공개된 수많은 정보를 미리 알고 하는 것보다, 아무런 지식도 없이 직접 부딪치는 방송이 더 재밌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스트리머로서 나름대로 방송을 더 재밌게 살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별다른 효과가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했으나.
아무튼 이어진 휴방에서 나를 가장 괴롭힌 충동은 나이트폴 신규 확장팩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중간 즈음에 몇 번이나 나이트폴 공식 홈페이지 링크에 손이 갔던가. 원래 같으면 온갖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정보가 나올 때마다 확인했을 성격인 것이다. 호기심도 욕망의 일부라고 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참아온 지난 시간이 아까워 점차 버티는 게 쉬워졌다는 건 다행인 점이었다.
결국 내 미련한 인내력 테스트는 그대로 이어졌고.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찾아왔다.
휴방이 끝나는 날이자, 나이트폴의 확장팩이 출시되는... 수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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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은 게임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플랫폼이었다.
인터넷 방송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실제로 카테고리도 넓혀가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 근본에는 변함이 없었다.
노래, 춤, 야외 방송, 먹방... 다양한 컨텐츠가 늘어가는 와중에도 저스틴 카테고리 부동의 1위는 언제나 게임 방송이었다. 그건 한국 채널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글로벌 채널을 훑어봐도 다를 바는 없었다.
실시간 시청자 수로 나열되는 방송 카테고리는 보통 게임으로 시작해 또 다른 게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기껏해야 저스트 채팅 정도를 그 다음 순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도였다. 이렇게 굳건히 1위 자리를 사수하고 있는 걸 보면, 게임 방송 플랫폼이라는 명칭도 꽤나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지.
저스틴의 시작이 게임 스트리밍을 위해서라는 것도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헛소리는 아닌 셈이다.
게임이 주된 방송 컨텐츠인 만큼 저스틴을 찾아오는 시청자들도 게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관심도 없는 곳에 일일이 고개를 기웃거리는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저스틴에 모여드는 시청자 층은 다양한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는 걸 즐기는 게이머거나, 하다 못해 남이 게임하는 걸 지켜보면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낄 정도의 관심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플랫폼의 규모가 커지면서 시청자의 다양성도 늘어났으되, 게임을 싫어하거나 관심이 없으면서 저스틴에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는 말이다.
괜히 저스틴에서 다양한 게임 행사의 라이브 스트리밍을 송출하는 게 아니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 법이다. 국제적인 규모의 거대 게임쇼가 아니더라도, 기대되는 신작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면 언제나 많은 수의 시청자가 모여들었다. 게임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시청자 층이 많았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게임사들이 대거 참가하는 대규모의 게임쇼라도 개최되는 날이면, 발표 일정에 따라 수만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유동 시청자가 저스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눈에 불을 켜고 발표를 바라보기도 했다. 게임과 밀접한 플랫폼이라는 말도 빈말이 아니었다.
그런 플랫폼이니만큼, 새로운 게임이나 유명 게임의 신규 확장팩이 출시되는 날이면 수많은 시청자들이 해당하는 카테고리로 모여들고는 했다.
이때만큼은 평소 자신이 즐겨보는 방송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새로 나온 게임을 구경하기 위해 다양한 방송을 돌아다니는 유동 시청자가 크게 늘어났다. 이들 중 대부분은 시청자가 많아 상위권에 노출되는 방송으로 몰려다녔다.
보통 평소에도 많은 고정 시청자를 보유한 유명 스트리머들의 방송이 거기에 해당됐으나, 신규 출시된 게임을 플레이하는 상황에선 예외적인 경우도 존재했다. 뛰어난 게임 실력으로 남들보다 빠른 게임 진행도를 보여주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주로 싱글로 출시되는 콘솔 게임의 신작들이 그랬다. 게임을 빠르게 진행하다 보면, 신작의 스토리를 궁금해하는 시청자들이 모여들어 때아닌 문전성시가 발생했다.
기회가 된다면 방송 규모와 상관 없이 평소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규모의 대규모 시청자들을 불러모으는 것도 가능했다. 운이 따라야 한다지만, 방송 규모를 키우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는 스트리머들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기회인 셈이다.
방송인으로서 이런 기회를 잡고자 함인지, 혹은 한 명의 게이머로서 빨리 게임을 즐기고 싶다는 마음 때문인지. 유명한 신작의 출시 날에는 시청자뿐만 아니라 스트리머들도 모두 같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수십 명, 더 크게 보면 수백 명이 넘어가는 스트리머가 동일한 카테고리를 설정하고 방송을 하는 장면은 평소에는 찾아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게임의 네임 밸류가 어지간히 크지 않은 이상 나타나지 않는 귀한 광경이다.
그 보기 드문 광경이, 오늘 저스틴을 바라보는 시청자들 앞에 그대로 나타났다.
나이트폴의 신규 확장팩, '성전(Crusade)'의 오픈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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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나이트폴, 저기도 나이트폴...
이건 완전 나이트폴 플랫폼이나 다름이 없다.
마우스 휠을 도르륵하고 굴리면 보이는 게 대부분 똑같은 카테고리였다. 인기를 증명하는 가장 직관적인 증거를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출시도 전 하도 호들갑을 떨어대는 탓에 짐작은 했지만, 예상한 일이 그대로 벌어진다고 한들 신기한 건 신기한 거였다.
새삼스레 깨닫는다. 나이트폴이 인기가 있긴 하구나 라고.
나는 습관처럼 머그컵의 하단부를 왼손 약지로 툭툭 건드렸다. 타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식어가는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컵이 이렇다면 내용물의 온도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뻔할 것이다. 왠지 모를 찝찝함에 마우스만 계속 스크롤을 올렸다 내렸다. 확장팩 출시를 선전하는 방송 제목들이 자꾸 눈에 걸려들어왔다.
최상단에 위치한 외국 유명 스트리머의 방송에는 벌써 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평소에도 몇 만명이 넘는 시청자를 기록하던 인플루언서였으나, 역시 단위 수가 달라지는 건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아니지. 확장팩이 전세계 동시 출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은 지금쯤 늦은 밤에 가까울 것이다. 해가 쨍쨍히 떠오른 이곳과는 달리 게임을 하기에 매우 적절한 시간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개인 방송에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시간이 아닌가. 서버가 이제 막 열린 지금, 방송을 진행하는 스트리머는 한창 신나서 확장팩을 플레이할 게 분명했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슬쩍 움직인 마우스가 방송 미리보기 화면을 확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눈 딱 감고, 잠깐만 보다 나올까. 영어로 진행될 게 뻔한 방송을 잠깐 훑어보는 정도야 별 문제도 아닐 텐데... 숨기기 힘든 호기심이 내면에서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아니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는데. 이 날을 위해 한동안 게시판을 확인하는 것도 삼가지 않았나. 한순간의 충동을 위해 그동안의 인내를 저버리는 건 역시 너무나 허망한 일이었다.
나는 급히 마우스를 옮겨 브라우저를 종료했다. 반쯤 식은 인스턴트 커피가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입 안에 기분 나쁜 텁텁함이 남는 것이, 지금 내 기분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고보면 커피는 되려 갈증을 유발한다고 했던가.
...아무렴, 지금 신경쓸 일은 아니었다.
오전이 오후가 되는 시간, 해가 하늘 가장 높은 곳에 걸릴 시간이다. 창을 통해 바라본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쨍쨍했다. 게임을 하기에 적절한 날씨가 따로 있겠냐마는, 신규 확장팩이 열리는 날에 억지로 의미 부여를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중충하게 비가 쏟아지는 날 보다야 새로운 시작에 걸맞는 날씨가 아닌가.
턱 끝까지 차오른 기대감을 더는 억누르지 않았다. 이미 패치가 완료된 나이트폴 클라이언트를 실행한 상태로, 나는 방송 시작을 위해 마우스를 움직였다.
간만에 찾아온, 노르드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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