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127 익숙한 걸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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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도시였다.
순백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것 같은 도시는, 외벽이 온통 흰색으로 이루어진 건물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나오는 흰 벽들. 벽을 물들인 작은 얼룩이나 흉터 따위도 도시의 전체적인 외관을 해치지는 못했다.
낮 시간. 하늘 높이 떠오른 햇빛을 반사할 때 도시는 온통 새하얀 빛을 내뿜으며 성스럽게 빛났다. 높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하늘의 태양과 더불어 지상에 또 하나의 광원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도시는 지상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장소로 거듭났다.
하늘과 땅이 빛으로 맞닿는 곳. 그래서 성지였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도시가 가장 환하게 빛나는 시간이다. 태양은 여느 때처럼 성지을 밝게 비추는 중이었다. 도시의 하얀 벽은 태양을 마주하며 빛나고, 스스로 반사한 빛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세상을 밝혔다. 빛이 빛을 부르는 선순환. 정오의 성지는 오늘도 찬란했다.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분명 그랬다.
도시의 내부. 한두 군데라고 지칭해서 정리할 수 없었다. 티끌 하나 없이 광휘를 거느려야 할 성지 내부에서, 하늘을 향해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파괴의 흔적은 지리멸렬하고 난잡했다. 도시의 외곽을 크게 둘러싼 거대한 외벽에서부터, 서서히 도시 안쪽으로 찔러들어가듯 박살난 흔적이 이어졌다. 질서 따위는 찾아보기 힘든 그 연장선에도 도착점은 있는 것 같았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연기를 따라 이어가면 방향이 드러났다.
대성당. 둥근 원형의 천장에 거대한 십자가가 꽂혀 있는 성지의 심장부였다.
촤악!
새하얀 건물 외벽에 붉은 핏물이 묻어난다.
건물 쪽으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상대방을 지켜보던 순간이다. 돌연 성현은 빠르게 회피 캔슬을 시도했다. 입력한 단축키에 반응해, 좌우의 쌍검을 연달아 휘두르려던 제 캐릭터가 황급히 동작을 멈추고 좌측으로 몸을 굴렸다.
그와 거의 동시였다. 방금 전까지 그가 위치했던 자리로 화살 세 개가 연달아 꽂혔다. 단정하게 정리된 돌바닥을 철로 만들어진 화살촉이 뚫고 들어갔다. 뒤이어 대면하고 있던 검사가 사방으로 피를 흩날리며 뛰어들었다.
심상치 않은 출혈량이 적의 목숨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알려왔다. 그럼에도 재빨리 움직이는 걸 보면, 광전사로 익히 알려진 빌드의 특성이나 혹은 확장팩과 함께 새로 나온 특성이라도 채용했을까. 궁병과 합을 맞춘 최후의 발악이 생각보다 날카롭게 느껴졌다. 시즌이 열린 직후, 새롭게 시작된 경쟁전의 배치 게임이란 걸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
이를 받아칠 수 있었던 건... 머리로 판단하기 이전에 멋대로 몸을 움직인 경험 때문이리라.
성현은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회피 모션이 끝나기도 전에 들어올린 왼손의 검이 매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검사의 칼날과 비스듬히 맞부딪쳤다. 성현의 목덜미를 꿰뚫을 것처럼 찔러오던 검이 쇠를 긁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좌측으로 비껴갔다. 성현의 의도대로, 완벽한 패링이었다.
적수의 마지막 발악을 무위로 돌리는 한 수이기도 했다.
성현은 무심히 발을 내질렀다. 거칠게 뻗은 다리가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검사의 복부를 강하게 걷어찼다. 일격에 무너진 검사는 한 차례 더 피를 토하고는 완전히 쓰러졌다.
굳이 생사를 확인할 필요도 없는 최후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검사가 틀어막고 있던 건물 안쪽으로 들어섰다. 아직도 이쪽을 노려보고 있을 적 궁병의 사선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내부조차 건물 내부로 들어오고 나서야, 성현 칼고는 방송 채팅창을 확인했다. 이전 교전 상황에서 자신이 보여준 슈퍼 플레이에 대한 반응을 기대하면서.
[와ㅠㅠㅠ 넘 멋있어요]
[아니 킹들은 죄다 뒤에 눈달렸냐? 화살어케피한거지; 완전 사각이었는데]
[시가전 긴장감 미쳤네 좁아터져서 방심하면 훅가겠다]
[맵 너무 하얘서 눈뽕... 감마좀 낮춰주세여]
[방금 왜 안죽었지?? 도약 특성찍은거보면 광전사빌드 아닌거 같은디 저게 신특인가]
[쌍검 빡겜ㅋㅋㅋ 배치 10연승보여주나?]
나쁘지 않았다. 채팅창이 올라가는 속도도, 그 내용도. 자신이 이런 그림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온전히 게임 화면에만 집중하는 시청자들의 모습이 왠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이트폴의 프리 시즌 기간, 종합 게임을 하던 때의 난잡하기 짝이 없던 채팅창이 눈 앞에서 아른거린 까닭이다.
칼고는 마우스를 이리저리 돌리며 아직 익숙하지 않은 주변 환경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꽤나 제작에 신경을 쓴 듯, 가정집으로 추측되는 건물 내부의 모습은 제법 디테일이 살아있었다.
무심코 왼쪽 마우스를 클릭한 순간 칼고가 휘두른 왼손의 검이 목재 탁상에 기다란 상흔을 남겼다. 분명 그래픽에 불과한데도 나무 따위의 거친 물건을 베어낸 둔탁한 감촉이 손 끝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지형이 복잡해서 궁병 견제가 빡세네요. 저쪽도 시야 확보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같기는 한데... 교전 중에 물리면 정신차리기 힘들겠어."
[성당까지 가는것도 ㅈㄴ 힘드네]
[ㅋㅋ 방금 성지 점령 3연패 박고왔다 질문 안받는다]
[새특성 쓰고싶은뎅 너무 난해함]
[이거 맵이 기동성살리는 빌드짜야겠는데요]
[법사는 별로임?]
[계속 전장이 바뀌니까 마법쓰기가 힘들어]
[졸렬한 법사련들 꼴좋다]
확장팩 출시와 함께 경쟁전에 추가된 신규 맵은, 맵 중앙에 거대한 성당이 위치한 성지였다. 게임이 오픈함과 동시에 방송을 켜서 경쟁전을 시작한 칼고는 천천히 새로운 맵의 특성을 이해하는 중이었다.
고성의 내성 구역보다 건물이 밀집해있는 시가지. 위치에 따라서는 무기를 휘두르기 힘들 정도로 좁은 지형도 존재했다. 몸을 은폐할 수 있는 건물도 즐비했으며, 골목길이 많은 탓에 어디서 기습을 당할지도 짐작하기 힘들었다.
성당 구역을 먼저 점령하는 것이 승리 조건인 이상, 플레이어는 복잡한 시가지를 뚫고 먼저 대성당에 도달할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규모 교전이 성지 전투의 핵심이었다.
좁고 복잡한 지형에서의 교전. 이동 경로에 따라서 일대일은 물론이고 일대다의 상황을 마주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 어느 때보다 유저의 개인 기량이 빛을 발하는 맵이었다.
이렇게 맵의 특성을 정리하고 보면, 칼고의 머릿속에서 곧바로 사람 하나가 떠올랐다. 일대일 결전 대회에서 우승을 거둘 만큼, 개인 기량에서는 따라올 사람을 찾기가 힘든 플레이어.
그녀가 성지에 침투해 들어오면 어떤 광경이 연출될지. 제 주머니에 들어있는 듀오 이용권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이번 시즌도, 킹 달성 정도야 문제가 없지 않을까 하고.
"...혹시 노르드 방송켰나요? 확장팩 출시 날이라 복귀했을 법도 한데."
성현은 모른 척하고 입을 열었다.
실상, 노르드에게 오늘 방송을 킬 거라는 확답을 직접 받아냈음에도 내뱉은 질문이다. 막상 언제 방송을 시작할지는 듣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추궁해도 방송 시간은 제 마음대로 하겠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굳이 맞출 필요는 없겠지만, 같은 시간대에 방송을 한다면 듀오를 해서 빠르게 랭크를 올리는 것도 좋은 컨텐츠가 될 것이 분명했다. 확장팩 출시와 동시에 경쟁전 신규 맵에서 연승가도를 이어나가는 영상이라니. 조회수가 보장된 훌륭한 소스가 아닌가.
결코 혜진과 듀오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나온 발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현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확인하고자 채팅창을 훑어내렸다. 아군의 킬 로그가 연달아 올라가고 있는 상황에서, 잠깐의 농땡이 정도야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임 이야기로 가득했던 채팅창이 삽시간에 노르드와 관련된 소식으로 물들었다.
성현은 최근 자신의 방송과 혜진의 방송을 멀티뷰로 동시 시청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잘 알았다. 이렇게 금방 반응하는 걸 보면, 혜진은 정말 출시 시간에 맞춰 방송을 시작한 모양이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내용이 조금 이상했다.
왜 방송 소식을 나르는 채팅에 욕설이 함께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꽤나 높은 빈도로.
의문에 대한 해답은 후원 음성이 대신했다.
<노칼영원해 님이="" 1,000원="" 후원!=""/>
시ㅣㅣㅣ발 그 사람 지금 두 시간째 빌드만 깎고 있다고요ㅋㅋ 성지는 뭔지도 모른다고
성현은 굳이 간섭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오늘은, 듀오를 할 일이 없으리라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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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폴의 빌드 설정창은, 유저들에게 '빌드맵'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는 했다.
빌드를 구성하는 특성들이 중앙을 중심으로 그물처럼 퍼져나가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마인드맵처럼 펼쳐진 그물은 그 끝으로 갈수록 빌드의 핵심이 되는 주요 특성들이 밀집해있었는데, 당연히 유저가 선택할 수 있는 특성의 수에는 제한이 있었다. 상이한 성격의 특성이 서로 멀리 떨어져 위치한 것도 빌드 구상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거북이라 불리는 방어 특화 빌드의 특성은 빌드맵의 우측 상단부에 밀집해있는 반면, 광전사 빌드의 핵심이 되는 '폭주' 특성은 반대편인 좌측 끝자락에 위치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플레이어는 모든 상황에 대처 가능한 만능 빌드를 구성하기 힘들었다. '커다란 방패로 버티다가 체력이 낮아지면 광폭화로 빨라지는' 따위의 공상적인 빌드는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간 이도저도 안되는 무능한 빌드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신규 확장팩이나 패치 등으로 새로운 특성이 대거 늘어날 때도, 유저들은 해당 특성이 빌드맵의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위치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특성에 엄청난 차이가 발생했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신규 특성들을 상세하게 읽어보던 노르드는 지금.
빌드맵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빌드맵 상단부에 새롭게 추가된 '성전' 확장팩의 특성들을 어떻게든 광전사 빌드의 특성들과 연결하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다.
방송 시간, 세 시간째였다.
"'신의 부름'. 이거는 꼭 넣고 싶은데... 폭주랑 같이 쓰려면 나머지를 다 포기해야 돼요."
[ㅅㅂ 그냥 이 빌드를 포기하라고 누가봐도 어글 탱커용 특성이구만 광전사 ㅇㅈㄹ]
[방장 고집질긴거보소 24시간 푹 고아도 안씹힐듯]
[센세... 그거 거북이들 쓰라고 만든거아닐까요...]
[이걸 내가 왜보고있지]
[아니 이 인간 빌드 존나 못만든다니까]
[뭔솔 메죽 노르드가 만든거 모름? 빌알못이네ㅋㅋㅋ 이사람 장인급임]
[멀티뷰로 칼고방송 추천. 신맵 랭크달리는중]
[와 미쳐버릴거같아]
[제발 게임을 해주세요 선생님]
[저 광전사 보러 왔는데... 왜 노인네가 빌드만 깎고있는거죠?]
채팅창은 성화로 가득했다.
확장팩이 출시되자마자, 게임 매칭을 뒷전으로 하고 빌드부터 연구하는 유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빌드 제작자로 이름을 날린 스트리머들도 존재했다. 남들이 새롭게 추가된 모드나 맵에 열광할 때, 참신한 빌드를 개발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러다가 실전성있는 빌드를 제작하기라도 하면, 시즌이 진행되는 내내 빌드를 만든 제작자로 이름을 날리며 유명세를 얻는 경우도 존재했다. 컨트롤로 유명한 네임드 유저와는 또 다른 성격의 인지도였다. 드물지만 그걸 위해 시즌이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빌드만 깎는 플레이어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르드의 방송을 보기 위해 모여든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건 다른 요소였다.
애초부터 결전 대회에서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유명해진 유저였다. 광전사라는 보는 맛이 흘러넘치는 빌드를 가지고 상대를 정면에서 찍어누르는 플레이 스타일. 그걸 최고 랭크에서도 그대로 실현하는 모습은, 어딜가도 보기 힘든 것이다.
새로운 확장팩, 새로운 맵에서 노르드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모여든 시청자들이다. 간만에 그녀의 방송에 방문한 유동 시청자들은 영문도 모르고 몇 시간째 빌드맵만 바라보는 노르드의 방송에 의문을 표했다.
<ㅇㅇ 님이="" 1,000원="" 후원!=""/>
빌드맵만 꼬나보는거 토나오는데 음악이라도 틀어주시면 안되나요?
"노래요? 아, 괜찮네요. 확실히 좀 지루하겠네."
[ㄹㅇ]
[신청곡 받아라 제발]
[아 십 저런 도네 왜하냐 아직도 노르드를 몰라?]
[갈림길 포기하고 부름찍죠]
[ㅋㅋ 조졌네]
노르드가 후원에 반응한 다음이었다. 자연스레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를 실행한 그녀는 곧장 자신이 설정한 재생목록으로 들어갔다.
'123'이라는 성의 없는 제목의 목록에는, 단 하나의 노래만 들어있었다.
'어느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