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8화 〉 128 ­ 실패작과 성공작은 누가 정하는 거야 (128/243)

〈 128화 〉 128 ­ 실패작과 성공작은 누가 정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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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래부터 잔잔한 음악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표현하면 별생각이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난 특정 장르만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내 취향은 음악에도 그대로 적용되고는 했다. 발라드, 힙합, 락, 클래식... 내 귀는 좋은 노래라면 장르를 구분하지 않았다. '좋은 노래'라면 그렇지. 그걸 가르는 세세한 규칙 따위는 모른다. 그냥 들어보고 괜찮으면 그게 좋은 곡이었으니까.

한때는 앉은 자리에서 음악만 닥치는 대로 찾는 게 취미였던 때도 있어서, 내 음원 사이트 계정에는 제대로 분류하지 않고 밀어넣은 산더미 같은 노래들이 여러 재생 목록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 한 번 들어보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면 집어넣은 노래들. 시간이 날 때마다 랜덤 재생을 틀어놓고 노래를 다시 거르는 작업을 반복했다. 두 번, 세 번 들었을 때도 좋게 들리는지 확인하는 일종의 선별작업이다.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추출된 재생 목록은 내가 꽤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종의 수집품이었다. 비록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했으나, 내가 가진 것들 대부분이 그랬으니 별로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대충 칠십 곡 정도였나. 하도 많이 들어서 목록의 절반쯤은 지금도 나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그게 전부 부질없어졌다는 걸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대 있던~ 빈자리를 찾아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얼굴을­》

노래방에서 부를 노래가 단 한 곡도 없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충격 아닌 충격을 먹고 최신 가요 차트 따위를 뒤적거리다 보면, 귀에 콕콕 박히는 것들 대부분이 잔잔한 멜로디의 이별 노래였다.

굳이 구분하자면 내가 즐겨듣는 스타일의 노래는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분명 천편일률적인 노래 가사 때문에 내 선별 목록에도 들어있지 않은 장르였는데... 무슨 변화일까. 어찌 됐든 취향은 바뀌는 모양이다.

듣자마자 몸에 소름이 돋는다거나 하지는 않아도, 뭔가 머리를 계속 맴도는 듯한 여운이 남는 노래였다. 어느새 가사가 귀에 익어 자연스레 흥얼거릴 수 있게 됐다는 것까지.

따지고 보면 이곳에 존재하는 노래 중 내가 가사를 모두 외운 첫 번째 노래가 되는 셈이지 않은가. 의미를 부여하고 나면 없던 애착도 만들어지는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극적인 클라이막스도 없는 평이한 멜로디가 한몫했을지도 모르고. 본래 담백한 맛이 오래 즐길 수 있다고 하지 않나.

어쩌면 술기운이 맴돌던 때의 향취가 계속 남아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노르드한테두들겨맞는칼고 님이="" 1,000원="" 후원!=""/>

­와 노래 너무 좋네요. 제목이 뭔가요? ㅎㅎ

"아, 노래 제목은 '어느날'입니다. 노래 괜찮죠? 가사가 좋아요."

[가사는 좋네]

[방종 ptsd 온다 제발 꺼줘]

[에이 싯팔]

[여러분 듣다보면 좋아요 잘 들어보세용]

[닉이나 바꾸고 후원해라 이새기야]

[씹좆날단 벌써 생겼네... 진짜 아찔하다 아찔해]

[제발 신청곡을 받든가하셈...]

[나이트폴 브금이 선녀다]

[이사람 원곡자한테 돈받음?? 노래 유료광고인가??]

[광고는 커녕 안티제조하고있는거같은데]

반응은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단조로운 멜로디의 노래가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다. 시청자들이 지루함을 호소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함께 보고 듣길 원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 아니던가. 이렇게 무한 반복으로 틀어두면 노래가 서서히 익숙해지면서 좋게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평양 냉면 같은 음식을 억지로라도 계속 먹이면, 육향이라 불리는 애호가들의 그 맛을 느껴볼 수도 있겠지.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간혹가다 가사를 옮겨적은 채팅이 올라가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았다. 적어도 나처럼 노랫말을 외운 사람이 한 명쯤은 더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잔잔한 발라드가 연이어 울려퍼졌다.

노래를 듣는 한편, 내 머리 용량의 대부분은 빌드 구성에 한창이었는데.

사실 신규 특성 출시와 동시에 빌드 제작에 들어간 건, 나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라 생소함이 가득했다.

그도 그렇다. 다 망한 게임에서 새로이 컨텐츠가 추가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신규 특성 같은 거창한 패치야 애초부터 중단된 지 오래였고, 얼마남지 않은 유저들은 서버가 유지되는 것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부족한 컨텐츠를 쥐어짜기에 바빴던 것이다.

아예 빌드맵의 크기 자체가 늘어나는, 이토록 커다란 패치를 격어볼 일도 없었던 게 당연하다.

단언컨대 이건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이번 확장팩은 '성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판타지의 성기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특성들이 많았다. 티저 영상에서 후광을 비추며 철퇴를 휘두르던 기사의 모습이 단순한 연출에 불과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특성 하나하나를 읽어가는 것부터가 재미였다. 중앙 근처의 특성은 대체로 기본적인 육체 스펙 강화와 관련되어 있었고, 끝으로 나아갈수록 신의 힘을 빌려와 상처를 치유하고 공격을 강화하는 식의 본격적인 특성들이 위치했다.

딱 보기에도 우직한 정면 힘싸움에서 강점을 보일 만한 특성들이다. 빌드맵에서도 방어 관련 특성과 밀접한 곳에 배치된 걸 보면, 개발자의 의도를 금방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신규 특성으로 괜히 요상한 빌드나 구상하지 말고 기존에 있던 탱커 빌드에 이용하라는 뜻이겠지. 의도가 꽤 뚜렷했다.

그리고 당연히, 플레이어는 그 의도를 뒤틀어버리기 위해 존재했다. 하라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기차 장난감을 받으면 억지로 조립해 변신 로봇을 만드는 것이 놀이의 시작이었다. 얌전히 기차만 굴려보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특성 제약을 억지로 비틀어가며 자가치유가 가능한 광전사를 만들려는 내 시도도 아무 의미 없는 헛짓거리가 아니었다는 소리다.

안 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 의도하지 않은 바를 억지로나마 구현해 보는 것.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는 것...

그렇다. 이건 로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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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드의 빌드 제작은, 장장 네 시간에 걸친 연구를 거친 뒤에야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동안 이 스트리머가 빌드맵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중간부터는 특성 이해를 위해 종종 연습 모드를 실행했는데, 연습 모드에서라도 신규맵을 보고 싶어하던 시청자들은 굳이 성지를 거르고 붉은 평원을 고르는 노르드를 보며 탄식을 흘려야만 했다.

다섯 번, 여섯 번... 연습 모드와 빌드맵을 오가는 과정이 수차례 반복됐다. 들어가서 하는 행동은 단순했다. 사용자 설정으로 로우 라이프 상태를 맞춰두고는 이런저런 동작을 시도해보는 게 전부였다. 허공에다 대고 무기를 휘두르는 단순한 동작들.

종종 수련용 허수아비를 세워두고 두들기기도 했다. 그럴 때면 철퇴나 대검 따위의 무기가 목각을 두드리는 소리가 잔잔한 발라드 음악에 어색하게 섞여들었다.

노르드의 멘트에 따르면... 빈사 상태에서 발동하는 광전사 특성의 부가 효과가 새로 나온 특성과 어떤 상호작용을 이뤄내는지에 대한 테스트 과정이었다. 물론, 빌드 연구와는 거리가 먼 시청자들은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흘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날'의 가사로 채팅창을 도배하는 시청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다. 정말 노래가 좋아서 그런 것인지, 단순히 어그로성 도배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굳이 나가지 않고 빌드 완성을 기다리는 시청자들이 지루한 연구 과정을 채팅창으로 덮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기다림이 결실을 맺었는지.

드디어, 지겹도록 흘러나오던 노래를 대신해 나이트폴의 웅장한 배경음이 울려퍼졌다. 게임 매칭이 잡혔음을 알리는­ 웅장한 나팔 소리와 함께였다.

채팅창은 기나긴 기다림이 보상받는 것에 대한 환호와­ 완성된 결과물에 대한 의구심으로 가득찬 상태였다. 노르드는 그런 반응을 통합해 '기대감'으로 받아들였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지금 방송에서 가장 흥분으로 가득 차있는 건 그녀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몇 시간동안 빌드를 깎고 드디어 시작한 첫 매칭이다. 기대감이 턱끝까지 차오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바야흐로 출정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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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조용히 방패를 들어올렸다.

복잡한 도시의 한복판이다. 이전 매칭에서의 경험을 되짚어보면, 이곳에서의 방심은 죽음으로 직결될 확률이 높았다.

당장 눈앞에 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안심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대로변을 촘촘히 둘러싼 골목길 어딘가에서, 시야를 가득 메운 하얀 벽 사이에서. 언제 어디에서 기습이 들어올지 감히 예측하기 힘들었다.

순간의 긴장감으로 따지면 나이트폴의 다른 맵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방패를 들어올린 남자는 발소리에 주의하며 천천히 걸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지금 남자가 사용하는 건 비교적 무게를 덜어낸 가벼운 갑옷으로 기동성을 더하고, 신규 특성을 채용해 안정성을 높인 검방 빌드였다. 이전에 비하면 훨씬 몸이 가벼운 세팅이다.

평소 즐겨 사용하던 클레이모어를 버리고 검방을 선택한 이유는, 앞선 세 번의 매칭에서 묵직한 대검을 사용하던 남자가 커다란 벽을 느껴버렸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둔한 장병기로는 복잡한 도심지에서 벌어지는 난전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빠른 대응은 물론이거니와 좁은 골목길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자기 무기의 가동범위를 살피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 와중에 상대의 움직임을 읽어내는 건 남자의 수준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쌍검을 사용하는 적 플레이어에게 얼마나 무참히 농락당했던가. 단순히 상대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결론짓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는 곧장 검방으로 빌드를 변경했다. 이런 곳에서 장병기를 운용하는 건 누가 보더라도 멍청한 짓일 테니까.

그렇다고 검방에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남자에겐 오히려 잘된 셈이다. 시험 삼아 채택한 신규 특성도 이전 게임에서 톡톡히 제 역할을 수행했다.

'신의 부름'이었나. 남자가 채용한 작은 방패로도 적의 강공격을 정면에서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준, 매우 유용한 강화 특성이었다. 아직 몇 판 해 보지 않았는데도 남자가 나름의 확신을 얻을 정도였다. 이번 시즌은, 이 특성을 활용해야 제대로 랭크 등반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아무튼 그러기 위해선 이 배치 게임부터 승리할 필요가 있겠지.

유난히 지붕이 굴곡진 건물을 지나칠 때였다. 어어폰을 꽂고 집중하던 남자의 귀에 깡­ 하는, 돌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도시의 정적을 깨부수기에는 지나치게 이질적인 소리였다. 남자는 황급히 마우스를 움직여 주변 시야를 확인했다.

사람의 형체 하나가 한 블록 너머, 건물 사이의 틈새에서 걸어나왔다.

그건... 괴이한 모습의 적 플레이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드러난 살갗이었다. 경장비라고 부르기도 힘들 것 같은, 허름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방어구. 레더 아머로 추정되는 갑옷은 상반신의 흉부에서 복부까지를 가리고 있을 뿐 어깨부터는 검붉은색 살결을 훤히 내보였다.

하반신도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역시 가죽의 질감으로 보이는 갈색 바지를 입고 있는 채였다. 그 흔한 각반조차 보이지 않았다. 좀처럼 보기 힘든 가벼운 옷차림에, 남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괴이쩍은 사내가 손에 들고 있는 거대한 대검이 그제야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얇디 얇은 경장비에, 무기는 육중하기 짝이 없는 츠바이핸더. 괴이함이 정도를 넘어선 세팅이다.

나이트폴에서 저런 노출도라니. 저 정도면 고인물들이 종종 보여 준다는 알몸 전사와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무런 장비도 세팅하지 않은, 순전히 회피 동작으로 상대를 농락하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예능용 세팅. 배치를 위한 게임이라지만 랭크전에서 볼 만한 장비가 아니라는 뜻이다.

의문의 플레이어는 당연하다는 듯 투구도 쓰고 있지 않았다. 드러난 얼굴에서 흉터가 가득한 얼굴이 날카로운 눈빛을 흉흉하게 빛냈다. 똑바로 남자가 서 있는 장소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손은 계속 움직이면서 측면의 하얀 건물 외벽을 쉬지 않고 내리치는 중이었다. 깡­, 깡­ 하고 이전에 남자가 들었던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가까이서 들으니 굉장히 기분 나쁜 소리였다. 저게, 대검으로 돌벽을 내리치는 소리였구나.

저건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나오는 행동이란 말인가. 성지라는 넓은 맵에서, 마치 누군가 접근해 오기를 바라는 것 같은 기이한 행동이었다.

누군가가 가까워지길 바라는 것처럼­ 아.

마주한 흉악한 얼굴이 마치 웃는 것처럼 크게 일그러지고.

남자를 향해, 괴한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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