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129 빌드가 사람을 만든다
* * *
누군가가 말했다. 나이트폴의 승부는, 스포츠로 따지면 테니스와 흡사하다고.
코트 사이로 공을 주고 받는 행위와 철붙이를 맞대는 행위가 비슷하다는 말이었다. 서로의 실력이 대등하면 공이 끝을 모르는 것처럼 왕복하지만, 월등한 실력 차이가 존재할 경우 승부는 단 한순간에 결판난다. 쇳덩이의 충돌도 테니스의 랠리처럼 합이 맞아야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나이트폴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 공감을 표하는 사람이 많았다. 게임을 몇 년 동안 플레이한 유저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이 아닌가. 무수히 많은 게임을 반복하면서, 단 일합에 적수의 목을 날려본 경험이 적지 않았다.
반대로 적과 마주한 순간 바로 화면이 흑백으로 변했다는 경험담도 많았다. 상대에 따라 가해자가 피해자로 돌변하는 게임이다. 한 합에 상대의 수준이 파악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엘튜브에 널려있는 하이라이트 영상처럼, 멋들어지게 검을 부딪치는 일도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대성당을 내려다보면서, 남자는 그런 상념에 빠졌다.
주어진 세 번의 목숨은 이미 괴한의 손에 전부 박살난 뒤였다. 지금 남자의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건, 이번 게임에서 낙오된 자들을 위해 주어지는 관전자 시점의 화면이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성당은 생각보다 공허했다. 몇 번인가 살아서 들어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시점 때문에 벽이나 천장을 가득 수놓은 웅장한 벽화는 볼 수 없고, 시야에 들어오는 건 넓은 강당 뿐이었다. 예배를 올리는 공간일까. 그는 게임을 하면서 세부 설정 같은 건 확인하지 않는 유저였다. 성당에 얽힌 이야기 따위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고 판단하면, 이곳은 지금 성당보다는 전장에 가까웠으니까.
공허한 성당의 한복판이다. 그곳에 괴한이 서 있었다. 추레한 방어구는 처음 마주할 당시와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대검을 비롯해 온몸에 펴바른 듯 흩뿌려진 검붉은 자국들일 것이다.
말라붙은 걸 고려해도 들러붙은 핏자국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필시, 한두 명의 사람으로는 부족한 양이었다.
당연했다. 남자가 흘린 피만 하더라도 삼 인분치는 됐으니까. 지나간 킬 로그를 생각하면 저것도 많지 않았다.
피가 가득찬 양동이 따위를 머리에 뒤집어 쓴 몰골이다. 거기에 본인의 피도 포함되어 있을지는 쉽게 장담하기 힘들었다.
검붉은 핏자국들 사이에서도 핏발 선 붉은 눈동자만큼은 그 색채가 선명했다. 남자가 기억하고 있는 눈빛이다.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는 와중, 그 강렬한 처형 장면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급격히 얼굴이 가까워지는 찰나의 순간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장르가 공포였다는 점이, 여전히 가슴을 철렁이게 만들었다.
남자가 세 번째 조우에서 간신히 만들어낸 생채기가 저 얼룩에 조금이라도 일조를 했을지. 안 그래도 연속으로 죽어나간 탓에 몇 번이나 팀원들의 쓴소리를 감내한 상황이다. 그는 괜히 브리핑이랍시고 그런 쓸데없는 정보를 팀원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알려준다고 달라질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저 여유로은 모습과는 달리... 성당에는 괴한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남자의 팀은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분명, 저 괴이쩍은 존재를 노리는 팀원들이 남아있는 것이다.
방패에 십자가 문양이 그려진 기사가 몸을 사리지 않고 괴한에게 돌진했다. 두꺼운 방패를 앞에 세우고 돌격하는 실드 차징 모션이었다. 중갑을 두른 전사의 맹렬한 돌격이 전차를 연상시켰다.
그 든든한 벽 뒤로, 검신이 가느다란 에스톡(Estoc)을 거머쥔 여성 검사가 기사의 페이스에 맞춰 따라 뛰었다. 전위와의 거리는 세 걸음 반 정도. 가벼운 장비를 생각하면, 일부러 속도를 조절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광전사의 급소를 노리려는 연계 플레이다.
듀오로 합을 맞춰보기라도 했는지 제법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광전사는 급격히 가까워지는 중전차를 보고도 별다른 대응을 보이지 않았다. 모니터 너머로도 전해지는 침착함. 그게 되려 맞서는 플레이어의 초조함을 유발했다.
어깨에 비스듬히 걸친 대검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대성당 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졌다.
이윽고 두 전사가 맞부딪치는 순간이다. 피투성이 괴한은 방패를 든 기사가 코앞까지 도달한 순간 강하게 땅을 박찼다. 좌측으로 몸을 굴러 직선적인 돌진 경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었다.
기사는 괴한의 회피에 당황하지 않았다.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측면으로 빠지는 적의 움직임에 대응해 바로 돌격을 멈추고는 자세를 다시 잡았다. 정면을 향하던 방패가 다시 괴한의 앞을 막아섰다.
틈 하나 보이지 않은 부동의 자세. 금방 맹렬히 돌격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전환이었다.
그와 동시였다. 기사의 뒤에 바짝 붙어 달리고 있던 여검사가 빛살같은 속도로 뛰쳐 나왔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기사의 허리춤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모양새였다. 얇고 뾰족한 쇠꼬챙이가 자세가 흐뜨러진 괴한에게 쇄도했다.
괴한은 황급히 몸을 뒤틀었다. 명백히 급소를 노린 찌르기가 괴한의 목덜미에 선명한 상처를 남기고 지나갔다. 조금만 더 빨랐으면 목을 꿰뚫고 지나갔을 일격이다. 허공을 스친 예리한 검 끝이 괴한의 귓볼 언저리에 닿았다 떨어졌다. 여검사는 곧장 백스탭을 밟으며 검을 회수했다.
목덜미에 남은 상처에서 핏방울이 맺혀 떨어지기도 전이다. 스프링처럼 뒤로 몸을 잔뜩 웅크린 검사가 다시 검을 찔러넣었다. 기동성을 장기로 삼는 빌드였다. 괴한은 피를 잔뜩 머금은 대검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맹렬한 찌르기의 연격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미처 피해내지 못한 일격이 몸 곳곳에 생채기를 만들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몸에 구멍이 뚫릴 정도의 치명적인 일격은 허용하지 않는다. 우스울 정도로 경량화한 장비가 민첩한 움직임을 가능하게 해준 덕일까. 여검사의 연이은 공격에도 괴한은 좀처럼 쓰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공격의 흐름이 끊길까 하는 걱정에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기사가 서서히 앞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곧 스태미나가 떨어질 여검사를 커버하기 위한 움직이었다.
두 팀원의 합이 깔끔하게 맞아떨어졌다. 이대로면, 저 괴한을 쓰러뜨리는 것도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다고 남자가 생각할 때였다.
괴한의 반격은 그때 시작됐다.
남자의 확대된 시점은 괴한의 눈이 선홍빛으로 번뜩이는 모습을 정확히 포착했다. 잊을 수 없는 모습, 버서크의 전조. 외관으론 도무지 빌드를 추정할 수 없는 저 괴한이 본색을 드러내는 시점이다.
남자는 이전의 죽음들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당장 폭주 상태에 대응하라는 채팅은, 죽은 자의 공허한 울음소리에 지나지 않겠지.
남자는 키보드로 손을 옮기지도 못하고 화면에 빠져들었다. 이전의 공격 연계를 바라보며,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남자의 마음 속에서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괴한이 짧게 휘두른 대검에서 빛무리가 번뜩였다.
태양빛을 반사한 검광 따위가 아니었다. 성지에서 맴도는 빛을 연상시키는, 부정할 수 없는 휘광이다.
명치 부근을 향해 내지른 여검사의 가느다란 검신이, 빛무리를 휘감은 괴한의 검과 맞부딪치며 거세게 튕겨져 나갔다.
검을 내던지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었다. 자세를 무너뜨린 여검사가 불안정한 모습으로 뒷걸음질쳤다. 연이은 공세를 한번에 집어삼키는 갑작스러운 카운터였다.
괴한은 멈춰서지 않았다.
무너진 검사를 향해 발을 내딛는다. 붉은 안광이 광휘를 뚫고 번뜩였다. 빛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대검을 세게 거머쥐고, 장작을 패기 위해 도끼를 잡는 것처럼 높이 들어올렸다. 육중한 대검을 들어올렸음에도 자세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쾅!
살갗을 베어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육중한 질량을 가진 무언가가 서로 충돌하며 들리는 굉음이다. 주저앉은 검사의 앞으로, 커다란 방패를 든 기사가 나타나 괴한이 내리친 일격을 막아선 것이다.
자세를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강공격을 받아낸 탓에 그토록 단단하던 기사의 몸도 크게 휘청거렸다. 여검사가 기사의 비호 아래 몸을 추스리며 자세를 다시 잡았다.
비틀거리는 방패를 향해 대검의 연격이 사정 없이 이어졌다. 육중한 철덩어리가 서로 맞부딪칠 때마다 커다란 굉음이 공허한 성당을 가득 채웠다. 넓은 공동에 충격이 메아리쳤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기사도 거센 충격에 서서히 몸을 움츠렸다. 거대한 나무가 점차 깎여들어가는 모습이었다. 보는 이를 위태롭게 만드는 일방적인 공세였다.
떨어져서 지켜보는 남자의 입장에서, 괴한의 움직임은 교묘하기 짝이 없었다. 몸을 일으킨 여검사가 기사가 회복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이런저런 견제를 가하는 게 전부 보잘 것 없는 발버둥으로 비칠 정도였다.
기사가 스태미나를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방패를 두들기면서도, 언제 달려들 줄 모르는 검사를 대비해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계속해서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검사가 만들어둔 생채기도 어느샌가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아마 이전에 맴돌았던 빛무리와 함께였다. 대체 어떻게 만든 건지는 몰라도, 괴한은 지금 광전사 빌드의 특성과 성전 특성을 동시에 활용하고 있었다.
저 괴이한 차림새도 빌드의 최적화를 위한 장치였을까. 남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기사가 마지막 남은 스태미나를 쥐어짜 온몸을 들이밀었다. 부족한 체력 탓에 힘도 거의 실리지 않은, 허술한 일격.
그건 공격이라기 보다 자신의 몸을 희생해 빈틈을 만들어내려는 최후의 발악에 가까웠다. 괴한이 자신의 어설픈 공격을 받아내거나 반격하기 위해 움직이면, 잠깐이라도 틈을 내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 바람이 허망하게도 괴한은 기사의 공격을 받아치지 않고 흘러냈다. 직전까지 이어지던 맹렬한 공세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기이할 정도의 전환이었다.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린 기사가 비틀거리며 쓰러질 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 괴한은 기사가 아닌 검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처가 회복되면서 광전사 특유의 붉은 안광이 사라졌음에도 충혈된 눈동자는 여전히 흉흉하게 번뜩였다.
그게, 이번 게임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
"빌드의 승리네요."
[???]
[팩트)그냥 광전사였으면 앳저녁에 게임 끝냈음]
[존나 잘하긴하네]
[이 구간은 걍 뗀석기로도 캐리하실거 같은데요 선생님... 대체 빌드가 뭔 상관인지?]
[와 이펙트 ㅈ간지다 진짜ㅋㅋ 간지 하나로 먹고 들어가는 듯]
[상대시점으로 리플레이 해주심안되나요ㅠ]
[기껏 버서크 트리거 켜놓고 자가치유로 날려먹는 빌드가 있다!? (충격, 공포, 기괴)]
[거적떼기입고 라이프관리하는거 경이로울지경;]
[이분이 만드는 빌드는 왜 다 나사가 존내게 빠져있는거죠??]
[신은 노르드에게 실력을 줬지만 빌드만드는 능력은 주지 않았기 때문 ㅇㅇ]
빗발치는 반발에도, 방송 중인 스트리머는 뻔뻔한 목소리로 재차 중얼거렸다.
"빌드... 빌드의 승리네요."
아무튼 그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