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0화 〉 130 ­ 전파되는 중 (130/243)

〈 130화 〉 130 ­ 전파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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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B게이밍의 연습실은 오늘따라 유난히 시끄러웠다.

쭉 늘어선 연습용 좌석에는 한자리도 빠짐 없이 사람이 들어서 있었다. 스크림 일정이 잡혀있는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GB게이밍 소속 선수들이 대체로 단체 연습실보다 개인 연습실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걸 생각하면 보기 드문 일이었다.

확장팩 출시 날이 아니라면 쉽게 볼 수 없는, 보기 드문 광경인 것이다.

치익­

목을 축이기 위해 캔음료 하나를 냉장고에서 꺼내온 찬혁은 평소보다 배는 시끄러운 연습실 안을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옆자리에 앉은 놈의 성량에 지지 않겠다는 듯, 점차 올라가는 목소리에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소같으면 이쯤 목소리가 올라갔을 때 소리지르며 불만을 토해내는 녀석이 등장할 텐데. 확실히 날은 날인지, 오늘은 소란스러운 걸 싫어하는 그 녀석조차 방 안의 소란에 크게 일조하고 있었다.

언제나 소음에 피해를 입는 건 가만히 있는 제 삼자의 몫이라고, 잠시 그 중심에서 벗어난 찬혁은 생각했다.

물론...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역시 저 소란의 일부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크으­

차가운 탄산이 거칠게 목을 쓸고 넘어갔다. 시즌 출시와 동시에 한참을 굴러간 머리에 냉각수를 붓는 것 같은 시원함이었다. 숙소에 음료 냉장고를 추가해 달라는 자신의 오랜 청원은 헛된 바람이 아니었다. 자고로 게이머와 탄산 음료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끈적한 사이가 아닌가.

요란한 말소리가 각기 다른 내용을 주절거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팀원들이 바라보는 여섯 개의 모니터도 모두 다른 화면을 투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누군가는 빌드맵을 만져대고 있고, 다른 누군가는 새롭게 추가된 신규 맵에서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찬혁은 한창 게임에 빠져든 진수의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꽤나 몰입해서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는 꼴이... 아마 경쟁전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저 놈은 팀원 중에서 가장 랭크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한 놈이다. 게임에 새롭게 추가된 이런저런 요소들보다 본인의 랭크에 눈이 먼 것이 참 일관적인 모습이었다.

저렇게 유난을 떨어대지만 정작 저번 시즌이 끝날 때는 팀의 막내보다 랭크가 낮았었지. 한동안 그게 진수의 발작 버튼으로 자리 잡아서, 팀원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선 조롱과 함께 웃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역시 맞는 놈이 타격감이 있어야 놀리는 것도 보람이 생기는 법이다. 찰진 반응과 더불어 멘탈은 또 유별나게 튼튼해서, 아무리 놀려도 크게 화를 내는 경우는 없었으니.

찬혁은 캔을 두어 번 홀짝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다들 신규 확장팩에 눈이 돌아간 모습이었다. 올해 최대 규모의 패치였다. 게다가 당장 리그 개막전이 몇 주 안으로 다가온 상황이니 만큼 저렇게 집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프로들은 언제나 메타의 선두에 서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존재여야 했다. 새롭게 추가된 맵이나 특성을 연구하고 실전에 적용하기 위해선,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측정하기도 힘들었다.

아마 몇 주라는 시간을 전부 갈아넣어야 할 거다. 스크림을 통해 다른 팀의 해석을 훔쳐볼 수야 있겠으나... 다들 비장의 한 수는 끝까지 숨기고 있기 마련이니까.

게으름을 피워서야 리그 초반부에 연패를 마주하고 뒤쳐질 게 뻔했다. 순위를 저 밑에 꼬라박고 뒤늦은 추격에 나서는 기분이 프로로서 얼마나 힘이 드는지. 경력이 베테랑에 가까운 찬혁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팀원들을 모두 훑어보던 찬혁의 시선이 연습실 구석의 끝자리에서 멈춰섰다. 팀의 막내가 앉은 자리였다.

그의 눈이 잠시 유심히 막내의 모니터를 지켜보는 듯 하더니, 곧바로 미간이 구겨졌다. 뭔가 이상한 걸 봤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찬혁은 그 즉시 자신의 자리로 향하던 발걸음을 되돌렸다. 시선은 끝자리에 앉은 팀원에게 고정된 채였다.

무상이었다.

턱­

"얌마, 연습실에서 뭐하고 있냐. 전체 화면으로 켜두면 모를 줄 알았어? 무슨 인방을 보고 있어, 개인 연습 시간에."

"아, 형. 잠깐 조용히 해봐요. 지금 중요한 장면이야."

"어쭈? 이거 완전 막나가네."

찬혁은 의자 등받이에서 막내의 머리통으로 향하려던 손을 간신히 억제했다. 아무리 그래도 경황 파악은 모두 마친 뒤 처벌을 가하자는 생각이었다.

시즌 마무리 랭크도 그렇고, 최근 머리가 급격히 자라난 막내는 종종 이렇게 건방진 태도를 보이고는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손이 먼저 나가서는 또 틀딱 꼰대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달기 마련일 테니.

자연스레 시선이 모니터로 향했다. 연습 시간에 그토록 열성적으로 보는 방송이 뭘까 싶은 것이다.

사실, 누구의 방송인지 거의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무상이 즐겨 본다고 말할 수 있는 방송은 하나 뿐이었으니까.

'Nord11'. 이제 찬혁에게도 제법 익숙한 닉네임이었다.

쾅­

중요한 장면이라는 무상의 말이 맞았다. 방송은 지금 전투가 한창이었다.

찬혁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나이트폴의 일인칭 화면이다. 자신이 설정해둔 인터페이스와 조금의 차이는 있었으나 위화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 불편한 건 테두리를 가득 메운 붉은색 경보였다. 상처를 입었음을 알리는, 나이트폴만의 경고 효과. 화면 가장자리서부터 핏발이 선 것처럼 붉은 줄기가 뻗쳐 있는 꼴이 어지간히 위급한 상황인 것 같았다.

결벽증이 있는 것처럼 체력 관리에 신경 쓰는 찬혁으로서는 거북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 정도면, 차라리 목숨을 하나 넘기고 리스폰하는 게 마음이 편할 텐데.

플레이를 하고 있는 당사자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일인칭 특유의 좁은 시야가 사정 없이 움직였다.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화면 속에서 적의 움직임은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어지간한 감도로는 흉내내기도 힘들 것 같은 고감도 설정이다.

대체 어떻게 상대를 읽어내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노르드는 요령 좋게도 적의 공격을 모두 받아냈다. 찬혁은 그걸 눈이 아닌 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철이 맞부딪히는 충돌음이 연이어 들려온 까닭이다.

팔을 비틀어 대검을 휘두르는 역동적인 동작에 시야가 크게 흔들린다. 내지른 검을 타고 핏물이 비산했다. 핏발 가득한 화면 때문에 붉은 핏방울을 놓칠 법 한데도, 이상하게도 피는 선명하게 제 존재감을 내비쳤다. 프로인 찬혁조차 알지 못하는 나이트폴의 그래픽 설정이 있는 건지.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폭주 상태. 근처을 둘러싼 적만 세 명이다.

사방이 붉게 물든 시야 속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을 알리는 모든 경고 효과가 노르드의 화면에 메아리쳤다. 붉은 경보, 아득하게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전장의 소음들, 출혈 때문에 흔들리는 시야, 그와중에 선명히 울려퍼지는 숨소리까지.

광전사를 선호하지 않는 찬혁은... 아니, 광전사를 즐겨 사용하는 플레이어라도 이런 화면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발동시킨 트리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어지러운 화면이었다. 나이트폴에서 이렇게 극한의 빈사 상태로 플레이한 경험을 누가 가지고 있을까. 대부분 이 지경에 몰리기 전 목숨이 끊어질 텐데.

끄아악­

비명소리마저 아득하게 들려왔다. 노르드가 휘두른 대검에 팔이 잘려나간 적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연이어 강하게 휘두른 대검의 무게중심 때문인지 어지러운 화면이 한차례 크게 회전했다.

근처을 둘러싼 적이 남아있다는 걸 감안하면 지나치게 커다란 동작이다. 적들에겐 미쳐 날뛰는 광전사를 마무리하기 위한 귀중한 빈틈으로 느껴지겠지. 찬혁이 보이지 않는 적의 움직임을 확신한 순간이다.

붉게 물든 시야로 환한 빛이 터져나왔다.

극적인 연출이었다. 화면 중앙까지 침투했던 붉은색 줄기가 찬란한 빛무리에 휘감겨 조금씩 지워졌다. 아득하게 들려오던 소음이 점차 선명함을 되찾고, 흔들렸던 시야가 뚜렷한 초점을 회복했다. 온전히 치유되지는 않았는지 화면 테두리에 붉은 기운이 맴돌았으나,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이전에 비하면 놀랄 수밖에 없는 변화였다.

맑아진 화면에 환하게 빛나는 대검이 존재감을 뿜어냈다. 창을 내질렀던 적 플레이어는 무엇에 당했는지 자세가 무너진 상태로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노르드는 빈틈이 생긴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빛이 일렁이는 대검이 곧장 창병의 몸에 내리꽂혔다.

즉사였다.

"...방금 뭐야?"

무심코 튀어나온 물음이 감탄사를 대신했다.

"이번에 새로 나온 특성이요."

"그게 아니라... 아이씨, 정리가 안 되네. 저거 뭔 빌든데? 광전사 빌드 아니야? 어떻게 성전 특성이 튀어나오냐고. 저 인간이 만든 거야?"

"봐봐요. 제가 괜히 보는 게 아니라니까요. 이해가 안 되죠? 저는 빌드 만드는 과정부터 봤는데도 그래요."

"방송에서 만든 거야?"

"네. 다시보기 그대로 남아있을걸요. 틀어드릴까요?"

"어. 빨리."

빌드를 만들었다고.

묘한 충격이 찬혁의 머리를 강타했다. 결전 대회를 봤을 때부터 범상한 유저가 아니라는 것쯤은 파악하고 있었으나, 그걸 이렇게 재차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확장팩이 출시하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나 빨리 저런 빌드를 만들어내다니. 그만큼 방금 교전에서 보여준 노르드의 빌드가 경이로웠던 것이다.

광전사 빌드가 유독 대회에서 활용되지 않는 까닭은, 소위 '현자타임'이라고 말하는 빌드 특유의 무기력함 때문이었다. 조건이 충족될 시의 폭발력이야 말할 것도 없었으나... 팀 단위로 합을 맞추는 프로 리그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짐승 하나쯤은 연계를 통해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막혔을 때 폭주가 끝난 광전사만큼 무능한 빌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빌드를 프로 게임에서 활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방금 노르드가 보여준 빌드를 활용한다면 어떨까. 버서크 특성이 발동한 이후 효력이 다할 때를 맞춰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면. 리스크를 한없이 낮추면서 리턴을 극대화하는, 최고의 빌드였다. 빌드의 자세한 세팅을 살펴보기 전부터 너프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이번 확장팩을 관통해서 커뮤니티에서 커다란 파장을 불러올 것 같은­

"여기... 여기가 거의 완성하기 직전 같은데. 아, 찾았다. 이 화면에 특성이랑 장비 다 나오네요. 한 번 보세요. 저 처음보고 기겁했다니까요? 방어구 세팅 레전드야, 진짜로."

무상이 일시정지로 멈춰둔 화면이었다. 찬혁의 눈이 정지된 화면을 천천히 읽어갔다. 아홉 시 정각을 가리키는 시계 바늘처럼 기이한 형태로 구성된 빌드맵과, 어딘가 훤히 비어있는 방어구 세팅...

방어구 세팅?

"씨발, 장난해?"

"아, 형. 왜 욕을 하고 그래요? 기껏 다시보기 틀어줬구만."

"아니! 나 나이트폴 십 년하면서 저런 방어구 세팅 처음 본다. 저게 말이 되냐? 일인칭이라 못 봤는데 방어구 꼴 봐라. 눈 먼 화살에 맞아죽겠어, 진짜.

이거 그냥 방송용 예능 빌드잖아. 씹, 이제 보니까 상충 특성 억지로 찍을라고 장비 유틸 전부 포기했네. 이딴 빌드를 누가 써?"

부푼 기대감을 안고 화면을 훑던 찬혁의 마음이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그제서야 그의 머릿속으로 노르드가 이전에 만들어낸 기형적인 빌드 하나가 떠올랐다. 과연 그랬다.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대체 누구를 믿고 있었다는 말인가.

찬혁이 그렇게 한숨을 내쉴 때였다. 무상이 입을 열었다.

"노르드가 쓰잖아요."

"...뒤질래?"

"진지하게 이거 괜찮아 보이지 않아요? 여기 좀 과하다 싶은 거 좀 쳐내고 경갑옷 정도만 입을 수 있게 세팅하면 되잖아요. 여기도 그렇고. 거기에 츠바이 고집할 필요 없으니까, 그냥 아밍 소드 정도로 타협하면 어때요. 전 완전 가능성 있어 보이는데."

"그래서 뭐, 대회에서 쓰겠다는 거야? 솔랭은 뭘 하든­"

"진짜로요. 저 마죽도 고려 중이라고 했잖아요. 그거 빈말 아니라니까요."

찬혁은 무상과 눈을 마주했다.

이번 시즌 데뷔를 앞둔 패기 넘치는 신인은, 창창한 나이에 어울리는 또랑또랑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내뱉은 말이 농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당찬 눈빛이었다.

그러고 보면, 진수가 최근 막내의 전적이 이상하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때가 있었던가. 그때는 랭크도 뒤쳐진 패배자가 말이 많다고 놀렸었는데... 진지한 소리였던 것이다. 진수 나름대로 팀의 미래를 걱정하는.

"저 노르드님이랑 친추도 되어있거든요? 대회 끝나고 바로 걸어서. 그, 아직 개인 메세지 보낸 적은 없긴 한데. 빌드 상의하려고 물어보면 답장 해주지 않을까요? 저걸로 대회 이긴 다음에 인터뷰에서­"

찬혁은 신나게 조잘거리는 무상의 말을 뒤로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바닥에 가려진 시야는 어둡기 짝이 없었는데.

찬혁에게는 그게 팀의 미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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