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132 이기는 쪽이 맞겠지
* * *
사용자 설정의 방을 개설하고 있자니, 별 생각이 다들었다.
확장팩은 당연히 없고, 하다못해 작은 밸런스 패치 소식도 들리지 않아 게시판에 적막한 싸늘함만 맴돌던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럼 사실 그곳을 떠나 다른 곳을 찾아가면 될 텐데, 굳이 폐허에 남아 다 죽어가는 게임을 조몰락거리는 저능아들이 있더랬다. 그럼 나이트폴이라는 타이틀을 제목에 걸고 있는 게시판이 전혀 다른 이야기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갈 데 까지 간 게임의 말로라고 해야 할까.
점심을 뭘 먹을지 물어보는 헛소리부터, 유행하는 인기 게임을 언급하는 놈. 심지어 갑작스레 자신의 불행한 인생사에 대해 풀기 시작하는 머저리도 존재했다. 그 의미없는 주절거림을 대체 왜 보고 있는 건지. 놀랍게도 그런 글에는 댓글도 많이 달렸다. 할 것 없어 남아있는 종자들은 심한 욕설을 달면서도 그런 폐기 글 하나하나에 답글을 달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러던 와중에도 소란스러운 게시판을 단숨에 게임 이야기로 전환시키는 마법같은 화제가 존재했는데... 그건 바로 빌드에 대한 논쟁이다.
운을 띄우는 건 간단했다. 누군가 '이 빌드는 A특성이 맞지 않냐?' 따위의 글을 올리기만 하면 성공이다. 그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지 인생 썰에 열중하던 잡놈 하나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기 시작한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며 당연히 B특성이 옳다는 식의 내용을 품은 장문의 댓글과 함께.
상주하는 인원이 얼마 남지않은 게시판에, 누가 무슨 빌드를 선호하는지 정도야 모두가 알고 있는 판이다. 제각기 다른 발작 버튼 몇 개를 외워놓고 필요할 때마다 상황에 맞는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그럼 할 게 없어서 어그로를 끌던 놈들도 다 즉각적으로 빌드 논쟁에 끼어들어 게시판을 게임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는 했다.
이 정도면 관리자가 함박 웃음을 지을 만한 세기의 발명품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내가 이런 사실들을 왜 알고 있을까. 당연히 나도 망해가는 게시판에 상주하는 소수 정예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렇다.
이제 막 사회 초년생의 삶을 걷던 와중에 왜 그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당시 나이트폴 게시판은 내 삶의 드물디 드문 낙 중 하나였다. 거기서 열심히 뻘글을 올리다, 다른 누군가 빌드 이야기를 시작하면 나도 열을 올리며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참전 조건은... 뭐였더라, 그래. 광전사 빌드에 대한 언급이었을 거다. 나중에는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광전사 빌드를 언급하는 놈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나름 유명한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
맥락없이 시작된 논쟁은 게시판에만 국한되지 않았는데, 논쟁이 치열해질 법하면 나이트폴 내에서 승부를 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승부 내용과 상관하지 않고 이기는 놈의 말이 옳다고 결정나는, 일대일의 단판 승부였다.
당연히 나도 그 결투의 장에 자주 참가했다. 이길 때도 질 때도 있었다. 패배하고 나서 이긴 놈이 게시판에 올린 인증 글을 볼 때면, 그것만큼 열받는 일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저딴 놈한테 내 빌드가 틀렸음을 인정해야 되는 꼴이 얼마나 치욕적이었는지.
몸까지 뒤바뀐 지금에서야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과거는 종종 어떤 기계장치가 작동하는 것처럼, 지금의 나에게 묘한 영향력을 행사하고는 하는 것이다.
내가 프로에게 시비 비스므리한 결투 신청을 걸어버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변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튼 그랬다.
###
리그에서의 사용을 전제로 한 세팅이다. 이전에 결전 대회에서 맞붙었던 것처럼 표준적인 일대일 상황을 가정하고 붙으면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방적인 일대다 상황을 연출할 수도 없으니, 결국 무상과의 협의 하에 대략적인 규칙이 만들어졌다.
세팅은 서로가 제시한 방향성대로. 나는 츠바이에 가죽 갑옷(시청자들이 거적때기라고 음해한 그 방어구)을 착용했고, 무상은 아밍 소드나 에스톡과 함께 경갑옷을 착용하기로 했다.
빌드의 핵심 특성을 유지하면서 장비 중량을 최대로 맞추면 전신을 갑옷으로 두르는 건 무리더라도 팔뚝까지는 갑옷을 두를 수 있겠지. 그건 편의에 따라 알아서 조정하라고 말했다. 어쨌든 누구의 세팅이 유효한지 알아보기 위한 결투였으니까.
맵은 성지였다. 무상의 말에 따르면 이번 시즌 리그에서 곧바로 추가될 맵이라나. 빌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소규모 교전이나 좁은 교전 구역을 전제로 내뱉는 말이 많았던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애초부터 성지에서의 사용을 염두에 두고 물어본 것이다.
승패를 가르는 조건은 단판 승부가 아니었다. 교전 지속력을 강점으로 만든 빌드의 특징을 서로 살려보기 위한 전투였다. 리스폰 구역을 교전 장소와 가깝게 설정하고, 서로에게 세 번의 목숨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전 승부의 상처가 그대로 이어지는 연속 교전. 연이은 세 번의 전투에서 먼저 상대의 목숨을 전부 끊어내는 쪽이 승리하는 조건이다.
폭주 상태를 제대로 활용하면 상처를 입은 상태가 오히려 이점을 가져갈 수도 있는, 제법 재밌는 룰이다.
일반적인 게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올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시가전을 특징으로 하는 성지라면 더욱 그렇겠지. 전투가 끝난 직후, 혹은 전투 도중 다른 적이 난입하는 상황 정도야 나이트폴 유저들이 매번 겪는 일이 아닌가. 프로 리그라고 그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대강의 세팅을 맞추고 무상을 초대했다. 만들어진 방에서 내 맞은편에 위치한 상대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결전 대회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관전자가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 당시와 똑같은 환경이었다. 반대편에 무상을 두고, 결승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닉네임 앞에 붙은 팀 이름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프로라는 걸 알고 있어도 얼굴을 마주하는 게 아니니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우습게도 닉네임 앞에 붙은 'GB'라는 타이틀에 현혹되는 것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저건 아직 리그를 제대로 본 적 없는 내게도 종종 이름이 들려올 정도로 유명한 팀이었다. 아마 내가 프로 리그 경기를 보기 시작한다면 그 무게감을 더 크게 느낄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3, 2, 1.
게임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 다운을 보면서.
나는 오랜만에, 가슴을 죄는 긴장감을 느꼈다.
###
오랜만이라고, 무상은 생각했다.
노르드가 설정한 성지 맵은 무척이나 좁은 구역이었다. 골목길에서 적의 기습을 조우한 상황을 연출한다고 말한 것을 정확히 짚어낸 것 같았다. 리스폰 지역으로 설정한 건물의 돌담을 넘어 나가자, 사람 둘이 지나가면 서로 어깨가 닿을 만한 좁은 골목길이 펼쳐졌다.
이 정도면 성지에서도 가장 좁은 길이었다.
무상은 괜스레 짧게 쥔 검을 휘둘러 돌담을 두들겼다. 챙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검이 튕겨져 나갔다. 스스로 요청한 사항임에도, 왠지 자신이 유리한 상태로 결투에 임하는 느낌이었다. 될 수 있으면 저번처럼 정정당당하게 맞붙고 싶었는데.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앉은 의자 뒤는 여전히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무상은 최대한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볼륨을 키워둔 이어폰을 귀 안쪽으로 세게 밀어넣었다. 그 행동이 우습게 보였는지 뒤편의 웃음소리가 더 커진 기분이다. 단순한 구경거리를 보는 기분이겠지, 저 망할 놈의 팀원들은. 이래저래 불쾌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골목길을 걸어나갔다.
노르드는 가까운 곳에서 등장했다.
방송 설정에서 본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복장이었다. 어깨부터 손목까지 그대로 드러나는, 방어도가 처참해 보이는 복장. 바닥에 내려꽂은 대검을 습관처럼 쓸어내는 동작은 무상에게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노르드가 나이트폴을 플레이할 때면 매번 보여주는...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동작이다.
무상의 등장을 알아챘는지 골목길 한편에 선 노르드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좁디 좁은 골목길에서 흉터 가득한 얼굴이 무상과 마주했다.
저건 여전하구나. 느껴지는 압박감이 묘하게 다가왔다. 그제야 노르드와 다시 맞붙는다는 사실이 현실감을 찾은 느낌이었다. 이걸 감동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의 랭크 게임에 맞춰 저격을 시도한 지난 날이 눈앞에 아른거릴 정도였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무상은 그대로 검을 들어올렸다.
주저 없이 뻗은 발이 골목길을 거세게 박차며 뛰쳐 나갔다. 어깨춤으로 잡아당긴 에스톡이 금방이라도 정면을 찌를 것처럼 강한 존재감을 내비쳤다.
공격의 우선권을 쥔 쪽은 무상이었다. 노르드 쪽으로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히면서, 마우스를 움직이며 방향을 조절했다. 검을 찌르기 위한 빈틈을 찾는 행위였다.
노르드의 대응은 기민했다. 무상이 땅을 박참과 동시에, 제자리에서 커다란 대검을 들어올려 앞으로 세웠다. 정면을 찌르는 모양새였다. 좁은 공간을 의식했는지 왼손으로는 크로스가드 위쪽, 날이 세워지지 않은 검신의 리카소(Ricasso) 부근을 거머쥐고 있었다.
공격적인 자세가 곧 수비를 겸했다. 무리하게 파고들면 기다란 검신을 피하지 못하고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서로의 칼끝이 부딪치기 직전, 질주를 멈춘 무상이 노르드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스탭을 밟았다.
전진 스탭과 백스탭을 반복하며 공격 타이밍을 헷갈리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뒤로 두 걸음 반, 앞으로 세 걸음.
비좁은 골목길이다. 서로가 마주한 상대를 외면할 수 없었다. 대검을 앞으로 내민 채 살짝 허리를 굽힌 노르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무상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앞으로 한 걸음, 뒤로 두 걸음.
직선적인 움직임에도 변칙이 담겼다. 발을 움직이며 잇달아 흔들리는 검 끝이 광전사를 위협했다. 가늘고 뾰족한 에스톡의 검신이 위아래를 분주하게 오고 갔다.
뒤로 한 걸음 더, 그리고 앞으로.
간격을 유지하던 순간이다. 가벼운 스탭으로 땅을 두드리던 무상이 어느샌가 진각을 밟으며 앞으로 뻗쳐 나갔다. 흔들리던 검 끝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검신을 잡느라 앞으로 돌출된 노르드의 왼쪽 손목을 노리는 찌르기가 빛살 같은 속도로 다가왔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대검이 뒤늦게 반응했다. 양손으로 부여잡은 대검을 낮추고는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무상의 에스톡을 향해 맞서 날을 세웠다.
피슉
핏방울이 튄다. 노르드의 피였다. 반응이 빨랐음에도 먼저 움직인 무상의 검을 온전히 받아칠 수는 없던 모양이다. 뱀처럼 대검을 지나친 얇은 검신이 노르드의 왼쪽 팔뚝을 훑고 지나갔다. 타격과 동시에 몸을 내뺀 무상의 앞으로 거센 바람이 섬뜩하게 공간을 훑고 지나갔다. 추격을 위해 휘두른 노르드의 대검이었다.
일격, 무상이 우위를 가져갔다.
모니터 속 검사가 내쉬는 숨이 무상이 현실에서 내쉬는 숨과 일치하는 순간이다.
무상은 다시 땅을 박찼다.
"오 방금 저거 패링 시도한 건데. 반쯤 성공했잖아. 살짝 비껴갔네."
"에스톡 상대로 굳이 패링을 쳐? 회피 누르기엔 좁아서 그런가."
"저기 존나 좁아. 체감은 더해. 벽이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어설프게 회피치는 것보단 패링 시도하는 게 나을 수도 있음. 물론 나 같으면 저기서 츠바이는 절대 안 고름."
"또 패링 쳤다. 그냥 저렇게 운영하려는 거 같은데? 성공하면 대박이고 반성공해도 직격은 흘릴 수 있잖아. 얕은 거 몇 대 허용하면서 폭주키고 한 방 노리는 건데, 저거."
"...너무 줄타기야. 한 번 실패하면 급소 뚫리고 뒤지잖아. 츠바이로 패링치는 것도 너무 비효율적이고. 저렇게 할 거면 소드 앤 버클러로"
"찬혁이 너는 씹게이라서 그런 거고. 상남자는 리스크 전부 감수하고 츠바이 같은 투핸디드 골라서 한 방 노리는 거지. 뭐 검방들고 버서크된다고 별 거 있냐? 최소 망치나 도끼 정도는 들어야지, 게이쉑."
"..."
".. 그래서 팬들이 너 의문사 장인이라고 부르냐?"
"......상남자는 그 정도 별명은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지랄하네."
찬혁은 진수를 향해 한심하다는 눈짓을 보내고는 곧장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전투가 한창이었다. 도망칠 곳도, 도망칠 이유도 없었다. 무상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핏물이 튀어 건물의 하얀 외벽을 붉게 물들였다. 반격을 위해 내지른 육중한 대검은 애꿎은 허공을 휩쓸고 지나갈 뿐이었다. 일방적으로 보이는 전황. 그러나, 진수의 말대로 연달아 패링을 시도한 노르드가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또 한 번. 무상의 날카로운 검 끝이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이쯤인가. 노르드의 팔뚝에서 힘줄이 드러나고, 붉게 물든 눈이 핏빛으로 번쩍였다.
버서크의 전조. 아마, 본격적인 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일 터.
모니터를 유심히 지켜보던 찬혁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상이 죽으면 내가 교체로 들어가야겠는데."
"얼씨구, 이 새끼가 이제는 신성한 막고라에 돌은 던질라 그러네. 진짜 인간 박찬혁 쓰레기 다 됐다, 다 됐어."
"...너 자꾸 말 그따구로 할래?"
"됐고, 그럼 너 다음은 내가 할래."
"뭐?"
"나도 존나 궁금하단 말이야. 저 사람 커뮤에서 말도 많았는데. 전시즌 랭크에서도 만난 적 없어서 붙어보지도 못했다고."
"근데 왜 신성한 막고라 이 지랄이야?"
"그야 재밌으니까 억!"
뒤쪽에 어떤 난리가 났는지도 모르는지, 이어폰을 꽂은 무상은 노르드와의 전투에 한창 몰입한 모습이었다.
느닷없이 차륜전으로 돌변하려는 양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 132화 〉 132 이기는 쪽이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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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설정의 방을 개설하고 있자니, 별 생각이 다들었다.
확장팩은 당연히 없고, 하다못해 작은 밸런스 패치 소식도 들리지 않아 게시판에 적막한 싸늘함만 맴돌던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럼 사실 그곳을 떠나 다른 곳을 찾아가면 될 텐데, 굳이 폐허에 남아 다 죽어가는 게임을 조몰락거리는 저능아들이 있더랬다. 그럼 나이트폴이라는 타이틀을 제목에 걸고 있는 게시판이 전혀 다른 이야기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갈 데 까지 간 게임의 말로라고 해야 할까.
점심을 뭘 먹을지 물어보는 헛소리부터, 유행하는 인기 게임을 언급하는 놈. 심지어 갑작스레 자신의 불행한 인생사에 대해 풀기 시작하는 머저리도 존재했다. 그 의미없는 주절거림을 대체 왜 보고 있는 건지. 놀랍게도 그런 글에는 댓글도 많이 달렸다. 할 것 없어 남아있는 종자들은 심한 욕설을 달면서도 그런 폐기 글 하나하나에 답글을 달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러던 와중에도 소란스러운 게시판을 단숨에 게임 이야기로 전환시키는 마법같은 화제가 존재했는데... 그건 바로 빌드에 대한 논쟁이다.
운을 띄우는 건 간단했다. 누군가 '이 빌드는 A특성이 맞지 않냐?' 따위의 글을 올리기만 하면 성공이다. 그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지 인생 썰에 열중하던 잡놈 하나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기 시작한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며 당연히 B특성이 옳다는 식의 내용을 품은 장문의 댓글과 함께.
상주하는 인원이 얼마 남지않은 게시판에, 누가 무슨 빌드를 선호하는지 정도야 모두가 알고 있는 판이다. 제각기 다른 발작 버튼 몇 개를 외워놓고 필요할 때마다 상황에 맞는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그럼 할 게 없어서 어그로를 끌던 놈들도 다 즉각적으로 빌드 논쟁에 끼어들어 게시판을 게임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는 했다.
이 정도면 관리자가 함박 웃음을 지을 만한 세기의 발명품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내가 이런 사실들을 왜 알고 있을까. 당연히 나도 망해가는 게시판에 상주하는 소수 정예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렇다.
이제 막 사회 초년생의 삶을 걷던 와중에 왜 그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당시 나이트폴 게시판은 내 삶의 드물디 드문 낙 중 하나였다. 거기서 열심히 뻘글을 올리다, 다른 누군가 빌드 이야기를 시작하면 나도 열을 올리며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참전 조건은... 뭐였더라, 그래. 광전사 빌드에 대한 언급이었을 거다. 나중에는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광전사 빌드를 언급하는 놈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나름 유명한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
맥락없이 시작된 논쟁은 게시판에만 국한되지 않았는데, 논쟁이 치열해질 법하면 나이트폴 내에서 승부를 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승부 내용과 상관하지 않고 이기는 놈의 말이 옳다고 결정나는, 일대일의 단판 승부였다.
당연히 나도 그 결투의 장에 자주 참가했다. 이길 때도 질 때도 있었다. 패배하고 나서 이긴 놈이 게시판에 올린 인증 글을 볼 때면, 그것만큼 열받는 일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저딴 놈한테 내 빌드가 틀렸음을 인정해야 되는 꼴이 얼마나 치욕적이었는지.
몸까지 뒤바뀐 지금에서야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과거는 종종 어떤 기계장치가 작동하는 것처럼, 지금의 나에게 묘한 영향력을 행사하고는 하는 것이다.
내가 프로에게 시비 비스므리한 결투 신청을 걸어버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변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튼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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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에서의 사용을 전제로 한 세팅이다. 이전에 결전 대회에서 맞붙었던 것처럼 표준적인 일대일 상황을 가정하고 붙으면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방적인 일대다 상황을 연출할 수도 없으니, 결국 무상과의 협의 하에 대략적인 규칙이 만들어졌다.
세팅은 서로가 제시한 방향성대로. 나는 츠바이에 가죽 갑옷(시청자들이 거적때기라고 음해한 그 방어구)을 착용했고, 무상은 아밍 소드나 에스톡과 함께 경갑옷을 착용하기로 했다.
빌드의 핵심 특성을 유지하면서 장비 중량을 최대로 맞추면 전신을 갑옷으로 두르는 건 무리더라도 팔뚝까지는 갑옷을 두를 수 있겠지. 그건 편의에 따라 알아서 조정하라고 말했다. 어쨌든 누구의 세팅이 유효한지 알아보기 위한 결투였으니까.
맵은 성지였다. 무상의 말에 따르면 이번 시즌 리그에서 곧바로 추가될 맵이라나. 빌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소규모 교전이나 좁은 교전 구역을 전제로 내뱉는 말이 많았던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애초부터 성지에서의 사용을 염두에 두고 물어본 것이다.
승패를 가르는 조건은 단판 승부가 아니었다. 교전 지속력을 강점으로 만든 빌드의 특징을 서로 살려보기 위한 전투였다. 리스폰 구역을 교전 장소와 가깝게 설정하고, 서로에게 세 번의 목숨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전 승부의 상처가 그대로 이어지는 연속 교전. 연이은 세 번의 전투에서 먼저 상대의 목숨을 전부 끊어내는 쪽이 승리하는 조건이다.
폭주 상태를 제대로 활용하면 상처를 입은 상태가 오히려 이점을 가져갈 수도 있는, 제법 재밌는 룰이다.
일반적인 게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올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시가전을 특징으로 하는 성지라면 더욱 그렇겠지. 전투가 끝난 직후, 혹은 전투 도중 다른 적이 난입하는 상황 정도야 나이트폴 유저들이 매번 겪는 일이 아닌가. 프로 리그라고 그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대강의 세팅을 맞추고 무상을 초대했다. 만들어진 방에서 내 맞은편에 위치한 상대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결전 대회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관전자가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 당시와 똑같은 환경이었다. 반대편에 무상을 두고, 결승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닉네임 앞에 붙은 팀 이름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프로라는 걸 알고 있어도 얼굴을 마주하는 게 아니니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우습게도 닉네임 앞에 붙은 'GB'라는 타이틀에 현혹되는 것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저건 아직 리그를 제대로 본 적 없는 내게도 종종 이름이 들려올 정도로 유명한 팀이었다. 아마 내가 프로 리그 경기를 보기 시작한다면 그 무게감을 더 크게 느낄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3, 2, 1.
게임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 다운을 보면서.
나는 오랜만에, 가슴을 죄는 긴장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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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라고, 무상은 생각했다.
노르드가 설정한 성지 맵은 무척이나 좁은 구역이었다. 골목길에서 적의 기습을 조우한 상황을 연출한다고 말한 것을 정확히 짚어낸 것 같았다. 리스폰 지역으로 설정한 건물의 돌담을 넘어 나가자, 사람 둘이 지나가면 서로 어깨가 닿을 만한 좁은 골목길이 펼쳐졌다.
이 정도면 성지에서도 가장 좁은 길이었다.
무상은 괜스레 짧게 쥔 검을 휘둘러 돌담을 두들겼다. 챙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검이 튕겨져 나갔다. 스스로 요청한 사항임에도, 왠지 자신이 유리한 상태로 결투에 임하는 느낌이었다. 될 수 있으면 저번처럼 정정당당하게 맞붙고 싶었는데.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앉은 의자 뒤는 여전히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무상은 최대한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볼륨을 키워둔 이어폰을 귀 안쪽으로 세게 밀어넣었다. 그 행동이 우습게 보였는지 뒤편의 웃음소리가 더 커진 기분이다. 단순한 구경거리를 보는 기분이겠지, 저 망할 놈의 팀원들은. 이래저래 불쾌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골목길을 걸어나갔다.
노르드는 가까운 곳에서 등장했다.
방송 설정에서 본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복장이었다. 어깨부터 손목까지 그대로 드러나는, 방어도가 처참해 보이는 복장. 바닥에 내려꽂은 대검을 습관처럼 쓸어내는 동작은 무상에게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노르드가 나이트폴을 플레이할 때면 매번 보여주는...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동작이다.
무상의 등장을 알아챘는지 골목길 한편에 선 노르드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좁디 좁은 골목길에서 흉터 가득한 얼굴이 무상과 마주했다.
저건 여전하구나. 느껴지는 압박감이 묘하게 다가왔다. 그제야 노르드와 다시 맞붙는다는 사실이 현실감을 찾은 느낌이었다. 이걸 감동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의 랭크 게임에 맞춰 저격을 시도한 지난 날이 눈앞에 아른거릴 정도였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무상은 그대로 검을 들어올렸다.
주저 없이 뻗은 발이 골목길을 거세게 박차며 뛰쳐 나갔다. 어깨춤으로 잡아당긴 에스톡이 금방이라도 정면을 찌를 것처럼 강한 존재감을 내비쳤다.
공격의 우선권을 쥔 쪽은 무상이었다. 노르드 쪽으로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히면서, 마우스를 움직이며 방향을 조절했다. 검을 찌르기 위한 빈틈을 찾는 행위였다.
노르드의 대응은 기민했다. 무상이 땅을 박참과 동시에, 제자리에서 커다란 대검을 들어올려 앞으로 세웠다. 정면을 찌르는 모양새였다. 좁은 공간을 의식했는지 왼손으로는 크로스가드 위쪽, 날이 세워지지 않은 검신의 리카소(Ricasso) 부근을 거머쥐고 있었다.
공격적인 자세가 곧 수비를 겸했다. 무리하게 파고들면 기다란 검신을 피하지 못하고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서로의 칼끝이 부딪치기 직전, 질주를 멈춘 무상이 노르드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스탭을 밟았다.
전진 스탭과 백스탭을 반복하며 공격 타이밍을 헷갈리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뒤로 두 걸음 반, 앞으로 세 걸음.
비좁은 골목길이다. 서로가 마주한 상대를 외면할 수 없었다. 대검을 앞으로 내민 채 살짝 허리를 굽힌 노르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무상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앞으로 한 걸음, 뒤로 두 걸음.
직선적인 움직임에도 변칙이 담겼다. 발을 움직이며 잇달아 흔들리는 검 끝이 광전사를 위협했다. 가늘고 뾰족한 에스톡의 검신이 위아래를 분주하게 오고 갔다.
뒤로 한 걸음 더, 그리고 앞으로.
간격을 유지하던 순간이다. 가벼운 스탭으로 땅을 두드리던 무상이 어느샌가 진각을 밟으며 앞으로 뻗쳐 나갔다. 흔들리던 검 끝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검신을 잡느라 앞으로 돌출된 노르드의 왼쪽 손목을 노리는 찌르기가 빛살 같은 속도로 다가왔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대검이 뒤늦게 반응했다. 양손으로 부여잡은 대검을 낮추고는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무상의 에스톡을 향해 맞서 날을 세웠다.
피슉
핏방울이 튄다. 노르드의 피였다. 반응이 빨랐음에도 먼저 움직인 무상의 검을 온전히 받아칠 수는 없던 모양이다. 뱀처럼 대검을 지나친 얇은 검신이 노르드의 왼쪽 팔뚝을 훑고 지나갔다. 타격과 동시에 몸을 내뺀 무상의 앞으로 거센 바람이 섬뜩하게 공간을 훑고 지나갔다. 추격을 위해 휘두른 노르드의 대검이었다.
일격, 무상이 우위를 가져갔다.
모니터 속 검사가 내쉬는 숨이 무상이 현실에서 내쉬는 숨과 일치하는 순간이다.
무상은 다시 땅을 박찼다.
"오 방금 저거 패링 시도한 건데. 반쯤 성공했잖아. 살짝 비껴갔네."
"에스톡 상대로 굳이 패링을 쳐? 회피 누르기엔 좁아서 그런가."
"저기 존나 좁아. 체감은 더해. 벽이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어설프게 회피치는 것보단 패링 시도하는 게 나을 수도 있음. 물론 나 같으면 저기서 츠바이는 절대 안 고름."
"또 패링 쳤다. 그냥 저렇게 운영하려는 거 같은데? 성공하면 대박이고 반성공해도 직격은 흘릴 수 있잖아. 얕은 거 몇 대 허용하면서 폭주키고 한 방 노리는 건데, 저거."
"...너무 줄타기야. 한 번 실패하면 급소 뚫리고 뒤지잖아. 츠바이로 패링치는 것도 너무 비효율적이고. 저렇게 할 거면 소드 앤 버클러로"
"찬혁이 너는 씹게이라서 그런 거고. 상남자는 리스크 전부 감수하고 츠바이 같은 투핸디드 골라서 한 방 노리는 거지. 뭐 검방들고 버서크된다고 별 거 있냐? 최소 망치나 도끼 정도는 들어야지, 게이쉑."
"..."
".. 그래서 팬들이 너 의문사 장인이라고 부르냐?"
"......상남자는 그 정도 별명은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지랄하네."
찬혁은 진수를 향해 한심하다는 눈짓을 보내고는 곧장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전투가 한창이었다. 도망칠 곳도, 도망칠 이유도 없었다. 무상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핏물이 튀어 건물의 하얀 외벽을 붉게 물들였다. 반격을 위해 내지른 육중한 대검은 애꿎은 허공을 휩쓸고 지나갈 뿐이었다. 일방적으로 보이는 전황. 그러나, 진수의 말대로 연달아 패링을 시도한 노르드가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또 한 번. 무상의 날카로운 검 끝이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이쯤인가. 노르드의 팔뚝에서 힘줄이 드러나고, 붉게 물든 눈이 핏빛으로 번쩍였다.
버서크의 전조. 아마, 본격적인 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일 터.
모니터를 유심히 지켜보던 찬혁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상이 죽으면 내가 교체로 들어가야겠는데."
"얼씨구, 이 새끼가 이제는 신성한 막고라에 돌은 던질라 그러네. 진짜 인간 박찬혁 쓰레기 다 됐다, 다 됐어."
"...너 자꾸 말 그따구로 할래?"
"됐고, 그럼 너 다음은 내가 할래."
"뭐?"
"나도 존나 궁금하단 말이야. 저 사람 커뮤에서 말도 많았는데. 전시즌 랭크에서도 만난 적 없어서 붙어보지도 못했다고."
"근데 왜 신성한 막고라 이 지랄이야?"
"그야 재밌으니까 억!"
뒤쪽에 어떤 난리가 났는지도 모르는지, 이어폰을 꽂은 무상은 노르드와의 전투에 한창 몰입한 모습이었다.
느닷없이 차륜전으로 돌변하려는 양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 132화 〉 132 이기는 쪽이 맞겠지
* * *
사용자 설정의 방을 개설하고 있자니, 별 생각이 다들었다.
확장팩은 당연히 없고, 하다못해 작은 밸런스 패치 소식도 들리지 않아 게시판에 적막한 싸늘함만 맴돌던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럼 사실 그곳을 떠나 다른 곳을 찾아가면 될 텐데, 굳이 폐허에 남아 다 죽어가는 게임을 조몰락거리는 저능아들이 있더랬다. 그럼 나이트폴이라는 타이틀을 제목에 걸고 있는 게시판이 전혀 다른 이야기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갈 데 까지 간 게임의 말로라고 해야 할까.
점심을 뭘 먹을지 물어보는 헛소리부터, 유행하는 인기 게임을 언급하는 놈. 심지어 갑작스레 자신의 불행한 인생사에 대해 풀기 시작하는 머저리도 존재했다. 그 의미없는 주절거림을 대체 왜 보고 있는 건지. 놀랍게도 그런 글에는 댓글도 많이 달렸다. 할 것 없어 남아있는 종자들은 심한 욕설을 달면서도 그런 폐기 글 하나하나에 답글을 달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러던 와중에도 소란스러운 게시판을 단숨에 게임 이야기로 전환시키는 마법같은 화제가 존재했는데... 그건 바로 빌드에 대한 논쟁이다.
운을 띄우는 건 간단했다. 누군가 '이 빌드는 A특성이 맞지 않냐?' 따위의 글을 올리기만 하면 성공이다. 그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지 인생 썰에 열중하던 잡놈 하나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기 시작한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며 당연히 B특성이 옳다는 식의 내용을 품은 장문의 댓글과 함께.
상주하는 인원이 얼마 남지않은 게시판에, 누가 무슨 빌드를 선호하는지 정도야 모두가 알고 있는 판이다. 제각기 다른 발작 버튼 몇 개를 외워놓고 필요할 때마다 상황에 맞는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그럼 할 게 없어서 어그로를 끌던 놈들도 다 즉각적으로 빌드 논쟁에 끼어들어 게시판을 게임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는 했다.
이 정도면 관리자가 함박 웃음을 지을 만한 세기의 발명품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내가 이런 사실들을 왜 알고 있을까. 당연히 나도 망해가는 게시판에 상주하는 소수 정예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렇다.
이제 막 사회 초년생의 삶을 걷던 와중에 왜 그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당시 나이트폴 게시판은 내 삶의 드물디 드문 낙 중 하나였다. 거기서 열심히 뻘글을 올리다, 다른 누군가 빌드 이야기를 시작하면 나도 열을 올리며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참전 조건은... 뭐였더라, 그래. 광전사 빌드에 대한 언급이었을 거다. 나중에는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광전사 빌드를 언급하는 놈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나름 유명한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
맥락없이 시작된 논쟁은 게시판에만 국한되지 않았는데, 논쟁이 치열해질 법하면 나이트폴 내에서 승부를 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승부 내용과 상관하지 않고 이기는 놈의 말이 옳다고 결정나는, 일대일의 단판 승부였다.
당연히 나도 그 결투의 장에 자주 참가했다. 이길 때도 질 때도 있었다. 패배하고 나서 이긴 놈이 게시판에 올린 인증 글을 볼 때면, 그것만큼 열받는 일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저딴 놈한테 내 빌드가 틀렸음을 인정해야 되는 꼴이 얼마나 치욕적이었는지.
몸까지 뒤바뀐 지금에서야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과거는 종종 어떤 기계장치가 작동하는 것처럼, 지금의 나에게 묘한 영향력을 행사하고는 하는 것이다.
내가 프로에게 시비 비스므리한 결투 신청을 걸어버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변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튼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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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에서의 사용을 전제로 한 세팅이다. 이전에 결전 대회에서 맞붙었던 것처럼 표준적인 일대일 상황을 가정하고 붙으면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방적인 일대다 상황을 연출할 수도 없으니, 결국 무상과의 협의 하에 대략적인 규칙이 만들어졌다.
세팅은 서로가 제시한 방향성대로. 나는 츠바이에 가죽 갑옷(시청자들이 거적때기라고 음해한 그 방어구)을 착용했고, 무상은 아밍 소드나 에스톡과 함께 경갑옷을 착용하기로 했다.
빌드의 핵심 특성을 유지하면서 장비 중량을 최대로 맞추면 전신을 갑옷으로 두르는 건 무리더라도 팔뚝까지는 갑옷을 두를 수 있겠지. 그건 편의에 따라 알아서 조정하라고 말했다. 어쨌든 누구의 세팅이 유효한지 알아보기 위한 결투였으니까.
맵은 성지였다. 무상의 말에 따르면 이번 시즌 리그에서 곧바로 추가될 맵이라나. 빌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소규모 교전이나 좁은 교전 구역을 전제로 내뱉는 말이 많았던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애초부터 성지에서의 사용을 염두에 두고 물어본 것이다.
승패를 가르는 조건은 단판 승부가 아니었다. 교전 지속력을 강점으로 만든 빌드의 특징을 서로 살려보기 위한 전투였다. 리스폰 구역을 교전 장소와 가깝게 설정하고, 서로에게 세 번의 목숨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전 승부의 상처가 그대로 이어지는 연속 교전. 연이은 세 번의 전투에서 먼저 상대의 목숨을 전부 끊어내는 쪽이 승리하는 조건이다.
폭주 상태를 제대로 활용하면 상처를 입은 상태가 오히려 이점을 가져갈 수도 있는, 제법 재밌는 룰이다.
일반적인 게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올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시가전을 특징으로 하는 성지라면 더욱 그렇겠지. 전투가 끝난 직후, 혹은 전투 도중 다른 적이 난입하는 상황 정도야 나이트폴 유저들이 매번 겪는 일이 아닌가. 프로 리그라고 그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대강의 세팅을 맞추고 무상을 초대했다. 만들어진 방에서 내 맞은편에 위치한 상대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결전 대회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관전자가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 당시와 똑같은 환경이었다. 반대편에 무상을 두고, 결승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닉네임 앞에 붙은 팀 이름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프로라는 걸 알고 있어도 얼굴을 마주하는 게 아니니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우습게도 닉네임 앞에 붙은 'GB'라는 타이틀에 현혹되는 것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저건 아직 리그를 제대로 본 적 없는 내게도 종종 이름이 들려올 정도로 유명한 팀이었다. 아마 내가 프로 리그 경기를 보기 시작한다면 그 무게감을 더 크게 느낄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3, 2, 1.
게임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 다운을 보면서.
나는 오랜만에, 가슴을 죄는 긴장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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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라고, 무상은 생각했다.
노르드가 설정한 성지 맵은 무척이나 좁은 구역이었다. 골목길에서 적의 기습을 조우한 상황을 연출한다고 말한 것을 정확히 짚어낸 것 같았다. 리스폰 지역으로 설정한 건물의 돌담을 넘어 나가자, 사람 둘이 지나가면 서로 어깨가 닿을 만한 좁은 골목길이 펼쳐졌다.
이 정도면 성지에서도 가장 좁은 길이었다.
무상은 괜스레 짧게 쥔 검을 휘둘러 돌담을 두들겼다. 챙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검이 튕겨져 나갔다. 스스로 요청한 사항임에도, 왠지 자신이 유리한 상태로 결투에 임하는 느낌이었다. 될 수 있으면 저번처럼 정정당당하게 맞붙고 싶었는데.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앉은 의자 뒤는 여전히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무상은 최대한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볼륨을 키워둔 이어폰을 귀 안쪽으로 세게 밀어넣었다. 그 행동이 우습게 보였는지 뒤편의 웃음소리가 더 커진 기분이다. 단순한 구경거리를 보는 기분이겠지, 저 망할 놈의 팀원들은. 이래저래 불쾌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골목길을 걸어나갔다.
노르드는 가까운 곳에서 등장했다.
방송 설정에서 본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복장이었다. 어깨부터 손목까지 그대로 드러나는, 방어도가 처참해 보이는 복장. 바닥에 내려꽂은 대검을 습관처럼 쓸어내는 동작은 무상에게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노르드가 나이트폴을 플레이할 때면 매번 보여주는...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동작이다.
무상의 등장을 알아챘는지 골목길 한편에 선 노르드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좁디 좁은 골목길에서 흉터 가득한 얼굴이 무상과 마주했다.
저건 여전하구나. 느껴지는 압박감이 묘하게 다가왔다. 그제야 노르드와 다시 맞붙는다는 사실이 현실감을 찾은 느낌이었다. 이걸 감동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의 랭크 게임에 맞춰 저격을 시도한 지난 날이 눈앞에 아른거릴 정도였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무상은 그대로 검을 들어올렸다.
주저 없이 뻗은 발이 골목길을 거세게 박차며 뛰쳐 나갔다. 어깨춤으로 잡아당긴 에스톡이 금방이라도 정면을 찌를 것처럼 강한 존재감을 내비쳤다.
공격의 우선권을 쥔 쪽은 무상이었다. 노르드 쪽으로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히면서, 마우스를 움직이며 방향을 조절했다. 검을 찌르기 위한 빈틈을 찾는 행위였다.
노르드의 대응은 기민했다. 무상이 땅을 박참과 동시에, 제자리에서 커다란 대검을 들어올려 앞으로 세웠다. 정면을 찌르는 모양새였다. 좁은 공간을 의식했는지 왼손으로는 크로스가드 위쪽, 날이 세워지지 않은 검신의 리카소(Ricasso) 부근을 거머쥐고 있었다.
공격적인 자세가 곧 수비를 겸했다. 무리하게 파고들면 기다란 검신을 피하지 못하고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서로의 칼끝이 부딪치기 직전, 질주를 멈춘 무상이 노르드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스탭을 밟았다.
전진 스탭과 백스탭을 반복하며 공격 타이밍을 헷갈리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뒤로 두 걸음 반, 앞으로 세 걸음.
비좁은 골목길이다. 서로가 마주한 상대를 외면할 수 없었다. 대검을 앞으로 내민 채 살짝 허리를 굽힌 노르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무상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앞으로 한 걸음, 뒤로 두 걸음.
직선적인 움직임에도 변칙이 담겼다. 발을 움직이며 잇달아 흔들리는 검 끝이 광전사를 위협했다. 가늘고 뾰족한 에스톡의 검신이 위아래를 분주하게 오고 갔다.
뒤로 한 걸음 더, 그리고 앞으로.
간격을 유지하던 순간이다. 가벼운 스탭으로 땅을 두드리던 무상이 어느샌가 진각을 밟으며 앞으로 뻗쳐 나갔다. 흔들리던 검 끝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검신을 잡느라 앞으로 돌출된 노르드의 왼쪽 손목을 노리는 찌르기가 빛살 같은 속도로 다가왔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대검이 뒤늦게 반응했다. 양손으로 부여잡은 대검을 낮추고는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무상의 에스톡을 향해 맞서 날을 세웠다.
피슉
핏방울이 튄다. 노르드의 피였다. 반응이 빨랐음에도 먼저 움직인 무상의 검을 온전히 받아칠 수는 없던 모양이다. 뱀처럼 대검을 지나친 얇은 검신이 노르드의 왼쪽 팔뚝을 훑고 지나갔다. 타격과 동시에 몸을 내뺀 무상의 앞으로 거센 바람이 섬뜩하게 공간을 훑고 지나갔다. 추격을 위해 휘두른 노르드의 대검이었다.
일격, 무상이 우위를 가져갔다.
모니터 속 검사가 내쉬는 숨이 무상이 현실에서 내쉬는 숨과 일치하는 순간이다.
무상은 다시 땅을 박찼다.
"오 방금 저거 패링 시도한 건데. 반쯤 성공했잖아. 살짝 비껴갔네."
"에스톡 상대로 굳이 패링을 쳐? 회피 누르기엔 좁아서 그런가."
"저기 존나 좁아. 체감은 더해. 벽이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어설프게 회피치는 것보단 패링 시도하는 게 나을 수도 있음. 물론 나 같으면 저기서 츠바이는 절대 안 고름."
"또 패링 쳤다. 그냥 저렇게 운영하려는 거 같은데? 성공하면 대박이고 반성공해도 직격은 흘릴 수 있잖아. 얕은 거 몇 대 허용하면서 폭주키고 한 방 노리는 건데, 저거."
"...너무 줄타기야. 한 번 실패하면 급소 뚫리고 뒤지잖아. 츠바이로 패링치는 것도 너무 비효율적이고. 저렇게 할 거면 소드 앤 버클러로"
"찬혁이 너는 씹게이라서 그런 거고. 상남자는 리스크 전부 감수하고 츠바이 같은 투핸디드 골라서 한 방 노리는 거지. 뭐 검방들고 버서크된다고 별 거 있냐? 최소 망치나 도끼 정도는 들어야지, 게이쉑."
"..."
".. 그래서 팬들이 너 의문사 장인이라고 부르냐?"
"......상남자는 그 정도 별명은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지랄하네."
찬혁은 진수를 향해 한심하다는 눈짓을 보내고는 곧장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전투가 한창이었다. 도망칠 곳도, 도망칠 이유도 없었다. 무상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핏물이 튀어 건물의 하얀 외벽을 붉게 물들였다. 반격을 위해 내지른 육중한 대검은 애꿎은 허공을 휩쓸고 지나갈 뿐이었다. 일방적으로 보이는 전황. 그러나, 진수의 말대로 연달아 패링을 시도한 노르드가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또 한 번. 무상의 날카로운 검 끝이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이쯤인가. 노르드의 팔뚝에서 힘줄이 드러나고, 붉게 물든 눈이 핏빛으로 번쩍였다.
버서크의 전조. 아마, 본격적인 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일 터.
모니터를 유심히 지켜보던 찬혁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상이 죽으면 내가 교체로 들어가야겠는데."
"얼씨구, 이 새끼가 이제는 신성한 막고라에 돌은 던질라 그러네. 진짜 인간 박찬혁 쓰레기 다 됐다, 다 됐어."
"...너 자꾸 말 그따구로 할래?"
"됐고, 그럼 너 다음은 내가 할래."
"뭐?"
"나도 존나 궁금하단 말이야. 저 사람 커뮤에서 말도 많았는데. 전시즌 랭크에서도 만난 적 없어서 붙어보지도 못했다고."
"근데 왜 신성한 막고라 이 지랄이야?"
"그야 재밌으니까 억!"
뒤쪽에 어떤 난리가 났는지도 모르는지, 이어폰을 꽂은 무상은 노르드와의 전투에 한창 몰입한 모습이었다.
느닷없이 차륜전으로 돌변하려는 양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